마2:13-18 2013.12.22일)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의 주간에 성경에 나오는 좋은 말 하나를 묵상합니다. “위로”라는 말입니다. 사실 “위로”라는 말처럼 좋은 말은 없습니다. 이 말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외로움이 없애줄 수 없다면 그 다음 차선은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이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위로”라고 합니다. 위로의 기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함께 있습니다. 내가 당신이 당하는 고통을 나도 함께 당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조금 예루살렘 쪽으로 가다보면 유명한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라헬의 무덤”입니다(사진).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 죽자 야곱이 길가에 장사해줘서 생긴 무덤입니다. 창35장에 나옵니다. 이곳은 지금 팔레스틴 자치지구 안에 있지만 이스라엘이 양보하지 않아 이스라엘 지역안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덤에는 수많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찾아 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 아이 낳기위해 준비하는 여인들, 문제가 있는 여인들, 인생의 맺힌 한과 슬픔이 있는 여인들, 유대인뿐 아니라 아랍인 여인들도 찾아옵니다. 팔레스틴과 유대인은 거의 원수 수준으로 살아가는 데 왜 이 무덤에는 유대인과 함께 아랍여인이들이 같이 올까요? 무엇인가 위로받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위로입니까? 아이 못낳은 고통에 대한 위로, 아이 낳다가 사산한 고통에 대한 위로, 여자로서 힘들게 살고 차별당하며 사는 고통에 대한 위로, 그 위로를 받고 싶어서 옵니다.
그런데 라헬은 그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라헬 자신도 고통을 당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둘째 아내로 큰 부인 레아가 아들 넷을 낳고 여종들이 아들 여섯을 낳을 때 까지 아이를 못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 하나 낳았는 데 둘째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여자로서 온갖 고통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 그가 남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고통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고통이 남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위로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나도 남처럼 고통을 당해 보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고통당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탄에 오신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그 분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면 왜 위로가 될까요? 우리는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어떻게 위로를 받아야 할까요? 성탄에 위로자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로자가 되시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도 고통을 당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자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지금의 이란, 이라크에서 별을 보며 점을 치는 점성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느날 별을 보았는 데 그 별은 반드시 이 세상에 큰 왕이 태어날 별이었습니다. 그들이 별을 따라 멀고 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들어오자 그들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낯선 사람들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샀습니다. 복장도 이상하죠, 낙타를 타고 왔죠. 이미 왕이 있는 데 왕이 또 어디 있느냐고 묻죠. 상당히 이상합니다. 이 소식은 곧 사람들의 입을 통해 헤롯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당시 헤롯왕은 심각한 켐프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서의 후손 에돔족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두메라고 불리는 지금의 브엘쉐바 근처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지방세금징수원으로 있던 그의 아버지가 로마에 엄참나게 뇌물과 아부를 바쳐 어느날 갑자기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주전 37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 누구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정식 절차를 거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에게는 늘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는 컴프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동방박사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느냐고 찾고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조사시켰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니. 아니 나 말고 왕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신하중 성경을 조금 아는 사람이 구약 미가서에 다윗의 고향 베들드레헴에서 다윗의 혈텅으로 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된 말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결심합니다. “그래? 혹시 태어났다면 큰 일이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어제 오늘 태어난 핏덩이일테니 넉넉잡아 2살 미만의 어린아이는 다 죽여라”.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때 적어도 1400여명의 아이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그때 거기 있었습니다. 다행히 천사의 지시를 받고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예수님이 일생동안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외국으로 피난간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이스라엘을 10박 11일로 다녀왔습니다. 성경을 전문한 목사님들을 모셨이니 대충 다닐 수 없었습니다. 웬만한 곳은 다 발로 밟았습니다. 저 남쪽 바란광야에서 북쪽 헬몬산까지 다녔습니다. 이번에 안 것은 이스라엘 땅이 그렇게 좁고 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산과 골짜기의 땅입니다. 지금처럼 길이 없던 옛날에는 오로지 골짜기를 통해 다녔습니다. 힘든 골짜기를 통과하면 또 광야가 나옵니다. 광야는 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고대세계에서의 여행은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한대로 여행에는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굶주림과 자지 못함의 위험이 있습니다. 떠나기는 하지만 반드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걸어 예수님은 지금의 카이로 부근에 도착했습니다. 지금도 거기에는 예수님 피난교회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집도 아니고 동굴입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애굽에서 예수님은 동굴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집은 동굴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우리의 위로자인지 아십니까? 먼저 자신이 고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예수님도 다 당했습니다. 히브리서를 볼까요? 히4:15,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시험”은 고난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당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질병을 빼놓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죽을 뻔 했습니다. 쫓겨났습니다. 도망다니셨습니다. 위험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배고팠습니다. 목말랐습니다. 외로웠습니다. 배신당했습니다. 마지막에 죄없이 죽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방송인이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입니다(사진). 이 분이 20년 넘게 진행한 TV토크쇼가 20년간 미국 시청율 1위를 기록했습니다. 미국 시청자만 2,200만명에 이르고 전 세계 140개국에서 시청합니다. 돈도 많이 벌어 한 해동안 약 1억 65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872억을 법니다. 이렇게 성공한 이유가 딱 하나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시시피주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누군지 모릅니다. 9세 때 사촌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사춘기때 방황하며 마약에 빠졌습니다. 14살에 미혼모가 되었고 2주만에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게스트로 초청받은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 이해합니다. 게스트가 “나는 한때 마약을 했어요” 하면 “나도 그랬는데”. 게스트가 자기는 성폭행당해 죽고 싶었다 하면 “나도 한때 그랬는데”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며 위로를 받습니다. 나와 똑같은 고통을 당했다는 그것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오프라 윈프리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님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한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주님, 제가 요즘 사업 때문에 쫓겨다녀요”.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그래? 나도 사람들에게 쫓겨다녔는데”. “주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심지어 그렇게 믿었던 교회 식구로부터 상처를 받았어요”.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그랬는데. 나도 3년을 사랑했던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팔렸는데. 너도 그렇구나”. “주님, 나 요즘 살기 어려워요. 좋은 집 날리고 작은 집에 살아요”. “그래? 나도 그랬는 데. 나도 갈 데가 없어 여우처럼 동굴에 살았는데”.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위로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되시네”.
두려움 때문에 위로를 빼앗깁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위로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위로를 빼앗아 가는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입니다. 예수님 시대 베들레헴은 이 두려움으로 가득찼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이었습니다. 헤롯이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가진 부모는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꼭 2살미만의 부모만이 아니라 혹시 내 아이가 2살 미만으로 오해받아 죽으면 어떨까? 어쩌다 내 아들이 잡혀가면 어떨까? 부모들은 전전긍긍하며 떨었습니다. 헤롯은 생각보다 악한 왕이었습니다. 역사가 전한 헤롯은 2살미만의 아이만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왕이 되자 권력의 상층부에 올라갈 생각으로 대제사장의 손녀 딸 미리암과 정략결혼을 합니다. 그 후 웬만큼 정권이 안정되자 자기 아내를 간통의 혐의를 씌워 죽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대제사장 히르카누스는 부정부패자로 몰아 죽입니다. 처남 아리스토블러스는 정권의 경쟁자로 같이 수영장에 빠뜨려 죽입니다. 미리암이 낳은 자기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블러스는 사마리아에서 구테타를 모의했다고 자기 보는 앞에서 죽입니다. 완전히 현대편 김정은입니다. 요즘 김정은이를 보면 과거 헤롯을 지배했던 죽음의 신의 사주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죽을 때 가장 가까운 신하를 불러 명령합니다. “아마 내가 죽으면 아무도 안 울거야. 그러니 너는 이렇게 해라. 내가 죽는 날 존경받는 유대인들을 경기장에 모이게 하고 그들을 죽이라. 그리하면 많은 사람이 애곡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죽어 우는 줄 알거다”. 그러나 지혜로운 신하는 헤롯이 죽자 그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대량학살을 면했습니다. 이것이 헤롯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위로룰 빼앗아 간 것은 헤롯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위로를 빼앗기면서 전전긍긍하고 사는가 하고 보면 무슨 종류의 두려움때문입니다. 먼저 사도 요한의 말입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 사도 요한은 두려움속에는 형벌이 있다고 합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고통이 오는 것이 형벌이 아니라 두려움 자체안에 이미 형벌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의 말씀이 탁월합니다. 잠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기서 “올무”는 “덫”입니다. 두려워하면 그때부터 인생은 덫에 걸린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두려운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느낌이 있는 것뿐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감정을 벗기고 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올 때 먼저 냉정해야 합니다. 가령 누가 어느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합시다. 그래서 그 사람만 보면 두렵다고 합시다. 사실 그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내 감정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상처를 줘서 두렵지만 어쩌면 그는 내게 상처준 일도 기억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상처는 주는 사람은 잊고 있는 데 받는 사람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령 그가 나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었다 해도 그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가 죄인이 아니었으면 그런 일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준지도 모르고 계속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불쌍한 존재입니다. 두렵다는 생각은 내 안에 있는 감정의 산물입니다. 내가 내 감정만 다독거리면 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특징은 첫째 감정이고 둘째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내가 그를,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위에 놓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더 높은 분이라고 우리는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일을 당하고 나면 하나님은 사라지고 그 일이 더 크게 보입니다. “내가 그러다 죽으면 어쩌지. 와, 이러다 내가 죽겠다. 아, 너무 힘들다. 그 사람 때문에”.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가 그 사람이, 그 일이 하나님보다 커집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두려워 하는 사람은 사람을 절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불쌍히 여김의 대상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사51:12-13,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죽을 사람, 풀같은 인자, 그들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분을 믿는 데 어떻게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잠14:26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잠 14:26). 27절입니다. 잠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두려움을 이기는 세 가지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딤후1:6-7,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세 가지입니다. 능력과 사랑과 근신입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능력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두려움의 본질은 자기 사랑입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나를 지키는 본성이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지킨다고 지켜집니까? 능력이 있어야 지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안에 두려움의 감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깁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로자인 첫 번째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겪어 보셨습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자, 애굽으로 갔던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시 돌아옵니다. 자기 자식을 잃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33년을 그들과 함께 삽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우라가 당하는 고통을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고통의 경험하고, 고통당하는 우리와 함께 살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이기고 부활로 승리하시고, 아멘.
이번에 목회자들과 함께 성지순례하면서 많은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위로의 땅이었습니다. 목회에 지친 목회자들이 간 데마다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골짜기에 갔습니다. 골찌기는 움푹 꺼진 땅이 아니었습니다.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길이 나 있었습니다. 골짜기의 위로입니다. 아침 일찍 광야에 갔습니다. 물이 없는 그곳에 아침 일찍 함초롬히 이슬이 적셔 있었습니다. 광야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 광야의 위로였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탄생 교회를 가서 찬양을 했는 데 누가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번에 함께 간 최명선 여자 목사님이었습니다. 이 분은 평소 허리가 안 좋아 힘들어 했고 이번 성지순례도 갈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서 치료받은 것입니다. 그가 저에게 보내온 이메일을 읽겠습니다.
“저는 최명선 목사입니다. 저는 평소에도 허리가 안 좋았고 이스라엘에 도착해서도 허리 통증 때문에 아주 괴로웠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아파서 옷을 입거나 벗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례에 참여하면서도 나로 인하여 일행이 계획한 일들이 차질이 없도록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참여했지만 예수님의 발자취를 밟으며 허리는 더 심하게 아파왔습니다. 그러다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곳에 내가 와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찡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중 예수님께서 내어나신 마굿간 앞에서 한 사람씩 촬영을 했고 내 순서가 되어서 앉아서 사진을 찍는데 너머 허리가 아파서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이윤재 목사님이 ”베들레헴에 왔으니 우리 모두 모여 기도와 찬양을 드리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자들이 간절히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 불쌍히 여기소서”. 이 예수기도를 반복하며 기도하는 중 123장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그때 였습니다. 어떤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계속 찬송하는 데 다시 한 번 누가 제 내 허리를 꾸욱 누르시며 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내에서 눈물이 터져나왔고 내 입에선 내가 들어도 아름다운 방언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은 찬양이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 순간 온 몸이 전기가 통한 듯 시원해지면서 온 몸이 나았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온 몸이 가쁜 해진 것입니다. 30년을 짓눌러 왔던 허리가 쫙 펴지면서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습니다. 탄생 교회를 나와 광장을 나왔는 데 아름다운 트리를 보는 순간, 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엉엉 울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울면서 핸드폰을 꺼내 제 자신을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리통증은 그쳤고 내 몸은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으로 순례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이 목사님은 그 후 5일동안을 계속 울면서 성지순례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확신했습니다. “하나닙은 지금도 우리를 위로하신다. 2천년전 베들레헴에 위로자로 오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치료하시고 위로하신다”. 오늘 이 시간, 저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싶습니다. 가정, 사업, 교회 사역, 목자, 사역 때문에 상처받고 힘든 일로 마음 고생한 성도들, 장로님, 목회자, 사업, 경제
사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마2:13-18 2013.12.22일)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라헬의 무덤(사진).
예수님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히4:15,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오프라 윈프리(사진).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되시네”.
두려움 때문에 위로를 빼앗깁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
잠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두려움은 감정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51:12-13,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잠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잠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딤후1:6-7,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
사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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