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삶(2) 요19:38 2014.1.12(일)
제자의 힘, 담대하라
새해들어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새해들어 여러분의 삶에 많은 열매가 맺히기 바랍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축복합시다. “새해에 많은 열매를 맺으세요”. 문제는 열매맺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열매맺기 위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금주에 성경을 읽다가 이사야30:15절을 읽었습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이 말씀을 읽다가 “힘”이라는 단어에 눈이 갔습니다. “힘, 힘이 필요하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내우외환, 고난을 겪는 것은 바로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앞에 잠잠하고 그를 신뢰하면 힘을 얻고 힘을 얻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데 너희에게 지금 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왜 힘이 없을까? 우리에게도 힘이 있을까? 한 해동안 우리를 이끌고 갈 힘이 무엇일까?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이 무엇일까? 그러다가 요일3:21을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여기에 “담대함”이란 말이 나옵니다. “담대함”은 여기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중요한 단어중 하나입니다. 히브리서 10:35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에베소서 3:12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요한1서에 자주 나옵니다. 요한1서 2:28은 “주의 강림하실 때 담대함”, 요한1서 4:17은 “심판날에 담대함”.
성경의 “담대함”은 하나님앞에 선 성도의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앞에 나갈 때 어떤 자세로 나가는가? “담대함”, 하나님앞에 어떤 자세로 서는가? “담대함”,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가? “담대함”, 하나님앞에 담대하고, 사람앞에 담대하고, 그 담대함이 우리에게 “힘”을 가져오고 그 힘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담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순교자처럼, 전도자처럼 담대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담대함이 아닐까요? 한 해를 막 시작하면서 우리 삶을 붙드는 힘, 담대함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모델을 아리마대 요셉에게서 찾았습니다. 성경에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은 이름, 제자 아리마대 요셉, 오늘 읽은 요19:38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이 짧은 한 구절속에 한때는 담대함을 잃었다가 어느날 담대함을 회복하여 위대하게 된 제자의 삶이 담겨져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한 해를 담대하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숨어 있는 제자였습니다.
말씀의 앞 부분을 다시 볼까요?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먼저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가 제자라면 어떤 제자였을까? 당연히 12제자의 명단속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와 같은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한다면 그는 어떤 제자였을까요? 제가 지난 연말에 우리 교인들의 명단을 한번 찬찬히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등록을 했는 데 왜 내가 모를까? 모르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우선 제가 심방을 못했습니다. 새가족이 오면 심방을 먼저 가서 교제를 나누는 데 새가족의 상황이 안 맞아 심방을 못 간 것입니다. 심방을 안 갔더라도 교회봉사를 하면 제가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누구입니다”. 하면 좋을텐데 그럴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으면 개인적으로는 편할지 모르지만 관계가 없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분도 한신교인입니다. 등록하면 누구나 한신교회 교인입니다. 교회도 나오고 담임목사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모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이 제자였다는 말이 혹시 그 말이 아닐까? 그가 예수님을 흠모해서 그를 마음으로 따랐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 예수님쪽에서 몰랐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드러내놓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경이 아리마대 요셉이 “숨어 있었다”고 하는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믿었다는 말입니다. 왜 요셉은 숨어 있었을까? 우선 그의 위치가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를 “부자”였다고 말합니다.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그는 부자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 공회의원이었습니다. 막15:43,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의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공회”는 72명으로 구성된 우리의 국회와 법원을 합친 이스라엘 최고 입법, 사법기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리마다 요셉은 예수님을 드러내 놓고 따를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우선 부자입니다. 예수님 따르다가 붙잡히면 모든 재산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공회의원입니다. 예수님 믿다가 걸리면 모든 지위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위험한 일을 하다가 잘못되면 평생에 쌓아왔던 부와 명예를 다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눅23:50-52,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 개념으로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혹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예수님을 안 믿을 수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을 버릴 수는 없어“. 바로 이 믿음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은 먼 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혹 예수님을 숨어서 믿지는 않습니까? 마음으로는,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옳고 그 말씀이 맞지만 본격적으로 그를 믿으면 뭔가 손해볼 것같고, 또 끝까지 잘할 자신도 없어 어정쩡하게 숨어서 믿는 분은 안 계십니까? 신학교 다닐 때 농촌에 전도를 나갔습니다. 한 할아버지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했더니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청년, 예수 믿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오?” 그러면서 “담배값 정도 듭니까?” 그래서 제가 “아마 그럴지 모릅니다”했더니 “그 정도면 믿을만하네” 했습니다. 그 노인은 아마 주일만 헌금을 얼마나 하면 되겠느냐하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주일날 헌금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불한 만큼의 예수를 믿습니다. 담배값 정도 지불하면 담배값 정도의 예수를 믿고 그 이상을 지불하면 그 이상의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이상하면 내게 손해가 되고 잃어버릴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이 다만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숨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기더니”. 영어 성경으로 보면 “in secret through fear. 두려움 때문에 숨어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무엇을 두려워 했을까? 그 첫 번째가 앞에서 말한 대로 잃을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붙잡히고 그러며 그동안 쌓아놓은 재물도 잃고 지위도 잃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잃을 것이 많습니다. ”세상은 넓고 재미는 많은 데”. 교회 나가면 우선 재미가 없습니다. 교회 나가면 언제 등산가고, 언제 여행가고, 언제 골프갑니까? 재미있는 것 다 잃어야 합니다. 잃는 것은 그만 두고 마음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제대로 믿으면 적당히 살 수 있나요? 삥땅도 못하지요. 거짓말도 못하지요. 아내 몰래 만나는 애인도 못 만나지요. 기분 나쁘다고 회사에서 멱살도 못잡지요. 예수 잘 믿으면 정말 마음대로 못삽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운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요일3:21를 다시 읽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사도 요한은 우리가 두려워 하고 담대함을 잃은 이유가 “책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담대하지 못한 이유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책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책망합니까? 뿌리를 따져 올라가면 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책망을 죄책감이라고 부릅니다. 죄책감이 우리를 담대하지 못하고 움츠리게 합니다. 죄책감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죄책감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혹시 아리마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자기만 아는 숨겨놓은 죄로 인해 자주 죄책감을 느꼈을까요? 권력을 이용하여 남을 억누르고 지위를 이용하여 부를 획득했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책감이 들고 그 죄책감 때문에 불안해지고 불안 때문에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이 한 말이 맞습니다. “사람은 마치 공장과 같다. 한편에서는 우상을 만들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우상공장이요 불안공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불안 때문에 교회는 오지만 그렇다고 교회에 완전히 뛰어들지 못하는 것은 죄때문입니다. 한국교회 교인의 윤리의식을 조사한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1998년에 조사하고 2004년에 조사하고 최근에 조사했는 데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술마십니까? 했더니 1998년 49%, 2004년 54%, 지금 68%입니다. 이혼, 허용한다. 1998년 35.9%, 2004년 50%, 지금 65%, 혼전성관계, 가능하다. 1998년 29.5%, 2004년 37%, 지금 49%. 동성애, 1998년 13.5%, 2004년 17.8%, 지금 21%. 전반적으로 윤리의식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죄책감이 우리를 담대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잃을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한편으로는 죄로 인한 마음의 자책감 때문에 우리 마음에 담대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담대함이 사라지면 어떻게 됩니까? 속으로 숨게 됩니다. 미래학자 페이스 팝콘은 이것을 “코쿠닝 신자”라고 불렀습니다. “코쿤”은 누에고치를 가리키는 영어단어입니다. 누에가 본능적으로 고치속에 숨는 것처럼 믿기는 믿는 데 자기 세계에 꽁꽁 숨어 하나님앞에 담대하게 나오지 않는 신자, 그를 “코쿠닝 신자, 누에고치 신자” 라고 부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숨어 있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은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다행히도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숨어 있던 어느날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38절 뒷부분입니다. 요19:38,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마가복음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엊그제 까지만 해도 유대인이 무서워 꽁꽁 숨어 있던 사람이 군인들로 중무장한 총독관저에 나타나 담대히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당돌히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니“. ”당돌히“. ”당돌히“가 무엇입니까?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컴밍 아웃“입니다. 자기를 용감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이런 저런 이유로 숨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예수믿는다. 나는 예수믿는 제자다. 이제 나를 잡아갈테면 잡아가고 죽일테면 죽여라“. 그렇게 숨죽이고 예수믿던 나약한 제자 요셉이 어떻게 달라졌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왜 요셉이 이렇게 담대해졌습니까? 요셉이 용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 그래서 담대한 것입니다. 신앙은 본래 담대한 것입니다. 신앙은 곧 용기입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용기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내가 완전하다고 말하는 용기가 아니라 나는 비록 완전하지 못해도 그래도 주님을 따르겠다는 용기입니다. 무엇을 시작하기에 충분히 만족할만큼 완벽한 때는 없습니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해봤어 정신”이 신앙에서도 중요합니다. 사원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이번 일은 어려울거야” 하면 정회장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해보긴 해봤어?”. 해보지 않고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입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힘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입니다. 두려움을 피하는 힘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과감히 맞서는 힘입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가롯 유다는 실수를 많이 하고 베드로는 실수를 안한 것이 아닙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문제는 가롯 유다는 실수한 자신을 못받아 들였고 베드로는 실수한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자신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용기가 없었고 베드로는 자신을 용서할 하나님을 신뢰할 용기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담대함의 기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니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완벽해서 담대한 것이 아닙니다. 책망할 일이 없어서 용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우리는 날마다 실수하고 날마다 넘어집니다. 넘어지는 나를 보면 담대할 수 없습니다. 요일3:20,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니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합니다.
불행히도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판 자기를 바라보았고, 다행히도 베드로는 우리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는 실패했고 베드로는 성공했습니다. 죄짓고 자살한 것이 용기가 아니고 죄짓고 회개한 것이 진짜 용기입니다. 죄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용기가 아니고 죄짓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진짜 용기입니다. 부모님 속 썩이고 집나간 자식이 용기있는 자식이 아니라 부모님 속 썩이고 울면서 그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용기있는 자식입니다. 한번도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용기있는 신앙이 아니라 어제 빠지고 오늘 또 일어나는 것이 용기입니다. 100% 말씀대로 살고 “나는 말씀대로 살았다”고 말하는 용기가 용기가 아니라 말씀대로 못살고 자주 세상에서 넘어지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께 돌아갈거야“ 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시인 정호승이 <넘어짐에 대하여> 라는 시를 썻습니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신은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 세운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기 때문에 담대하다면 우리는 평생 담대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넘어져도 일어날 시간이 있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키시기 위해 넘어뜨리시고, 넘어 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세운다는 믿음 때문에 담대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믿어야 담대합니다. “신앙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며 위험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는 무엇인가 해본 일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에 대한 후회입니다. 익숙한 것이 편하다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익숙한 것 때문에 우리가 죽습니다. 제가 재작년에 영국에 갔습니다. 해안에 갔는데 갈매기들이 많이 죽어 있었습니다.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안내자가 말했습니다. “해마다 여름철에 여행객들이 오면 갈매기들에게 과자나 사탕 같은 것을 줍니다. 그러면 갈매기들은 그걸 맛있다고 받아 먹습니다. 갈매기들이 그것을 계속 먹다보면 자연식물에 대한 맛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다가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다른 것을 먹지 않고 과자만 기다리다가 그만 굶어 죽고 맙니다. 바닷속에 그 좋은 먹이를 두고서 말입니다.” 신앙은 맛잇는 과자에 길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익숙과 안전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험입니다. “배는 항구에 있어야 안전합니다. 그러나 항상 정박해 있는 배는 폐선이요 배로 가득찬 항구는 폐항입니다. 배는 오로지 바다에 나가기 위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믿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겠습니까? 위험을 피하지 않고 위험속으로 들어가고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두려움과 맞서며 안전하다고 배를 항구에만 대지 말고 끌고 풍랑치는 바다로 배를 몰고 나가시겠습니까? 믿음 자체가 용기요 담대함입니다.
예수님이 담대한 삶의 모델입니다.
그러면 다시 38절로 돌아옵시다. 아리마대 요셉은 어떻게 그렇게 담대해졌을까? 신앙 자체가 용기요 담대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이야기입니다. 뭔가 요셉에게 맞는 이야기는 없을까?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변화의 원인을 생각하려면 이 말씀 전후의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38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은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시신이 된 후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로 숨어 있을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 죽음 이전입니다. 그러면 시간적으로 아리마대 요셉의 변화의 전후에 있었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이길레 아리마대 요셉을 변화시켰는가?
제가 오늘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당시의 상황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날이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받고 십자가에 달린 날이었습니다. 늘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랐지만 공개적으로는 따르지 못했던 요셉은 그날 예수님을 처형한다는 말을 듣고 군중들 틈에 섞여 빌라도의 법정으로 들어갔습니다. 빌라도가 삼엄한 분위기속에서 예수님을 모질게 심문하고 있었습니다. 요19:10,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 예수님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당했습니다. 군병들이 그에게 침을 뺏고 뺨을 쳤지만 그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위엄이 있었고 담대했습니다.
이윽고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향했습니다. 골고다로 가면서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에 눌려 몇 번이나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6시간, 그는 길고 긴 죽음의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 칠흙같은 시간에 그의 생명이 경각간에 넘어가는 시점에 예수님의 입에서 갑자기 외마디 기도소리가 나왔습니다. 눅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리마대 요셉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아니, 죽어가면서 기도하다니”. 그나마 그 기도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큰 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다 이루었다”. 아리마대 요셉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무엇을 이루었단 말인가?” 예수님이 실제 십자가에서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룬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잃은 것만 있었습니다. 생명을 잃었습니다. 희망을 잃었습니다. 자존감을 잃었습니다. 한 벌 남은 겉옷까지 군병에게 빼앗기고 수치스러운 몸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다 이루다니”. 그때 그가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또 올랐습니다.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순간, 요셉은 자기 자신을 돌아 보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따르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 것도 버린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것을 잃지 않는 범위안에서 적당히 예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사회적 지위와 재물을 잃지 않으려고 숨어서 예수를 따랐습니다. 재산상의 손해도 보지 않고 인간적 자존심도 유지하면서 우아하게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마지막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예수님이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예수님은 잃음으로 얻었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또 떠올랐습니다. 요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아, 열매는 그냥 맺히는 것이 아니구나. 죽어야 맺힌다. 십자가는 잃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잃었기 때문에 얻는 곳이었습니다. 너무 자기 것은 잃지 않으면서 얻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요셉, 그가 왜 그렇게 두려워 하고 그렇게 용기와 담대함이 없었는지 알았습니다. 잃을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잃어야얻고 잃으면 얻는 십자가의 진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십자가에서 복음의 진수를 깨달았습니다. 잃으면 얻고 잃어야 얻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십자가는 그동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비주얼로 깨닫게 했습니다.
가장 당당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당당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머니 털어 먼지 안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 당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것을 잃을 각오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 진리를 깨닫자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날 저녁,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의 관저의 문을 노크했습니다. 군병에게 총독을 면담하기를 요청한 후 말했습니다. “총독이여, 오늘 오후에 골고다에서 처형된 예수라는 사형수의 시신을 제게 주십시오. 제가 매장하겠습니다”. 총독이 그를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당신은 아리마대 요셉이 아니요? 당신이 예수 제자였다는 말이요?” 요셉이 말했습니다. “그렇소. 나는 공회의원이었으나 지금은 예수 제자요. 그동안 신분 때문에 숨어 있었으나 이제는 숨지 않겠소. 나는 오늘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제자요. 나에게 우리 주님의 시신을 주시오. 내가 그를 장사하겠소”. 총독은 그의 담대한 행동에 깜짝 놀랐습니다. 빌라도는 그에게 예수의 시신을 넘겨 주었습니다.
제가 이번에도 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찾아 예루살렘 성묘교회를 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예수님 무덤 옆에 있습니다. 예수님 무덤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있는 것과 달리 요셉의 무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셉의 무덤 들어가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죽은 후에 들어가려고 준비한 무덤에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려고 예수님 무덤 옆에 누었습니다.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요셉의 무덤에 앉아 묵상하는 데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그렇습니다.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미래는 미래로 뛰어드는 자의 것입니다. 과거에는 어쨓든지 상관없습니다. 과거에는 예수님 멀리 떨어져 숨어서 에수믿었다면 이젠 달라져야 합니다. 담대하십시오. 한 해동안 제자의 삶을 시작하면서 간직한 카워드가 있습니다. “담대함”입니다. 다시 말씀을 붙드십시오.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담대하십시오. 담대함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담대하십시오. 예수님이 담대함의 표본입니다. 그는 담대히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담대히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늘 우편에 앉아 우리를 격려합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나를 의지하라. 숨어 있지 마라. 두려워 하지 말라. 안에서 나와라. 나와 함께 달리자꾸나. 나는 세상을 이긴 자요 광명한 새벽별이다. 내가 너를 이기게 하리라”. 아멘.
제자의 삶(2) 요19:38 2014.1.12(일)
제자의 힘, 담대하라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아리마대 요셉은 숨어 있는 제자였습니다.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두려운 이유
(1) 잃을 것이 많아서
막15:43,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의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눅23:50-52,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기더니”.
(2) 마음의 죄책감때문에
요일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아리마대 요셉은 다시 시작했습니다.
요19:38,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왜 담대해야 하는가?
(1)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에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니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정호승, “넘어짐에 대하여”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신은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 세운다”.
(2) 신앙은 위험을 자초하며 즐기는 일이기 때문에
“배는 항구에 있어야 안전하다. 그러나 항상 정박해 있는 배는 폐선이요 배로 가득찬 항구는 폐항이다. 배는 오로지 바다에 나가기 위해 있다”.
예수님이 담대한 삶의 모델입니다.
요19:10,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눅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요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사진)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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