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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삶(4) 욥1:12-22 2014.1.26(일)

제자의 삶(4) 1:12-22 2014.1.26()

 

제자의 승리, 믿음이 이긴다

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새해들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함입니다. 용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입니다. 결국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2차 세계 대전후, 여객기로 개조된 B29 전투기가 운항을 하다가 고장이 났답니다. 할 수 없이 낙하산으로 뛰어내려야 하는 데 모두 겁이 나 뛰어내릴 생각을 안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이 기장이 한 사람씩 불러 말합니다.

 

먼저 독일사람에게 말합니다. “히틀러의 명령이니 뛰어내리시오”. 독일 사람이 하이! 히틀러하며 뛰어내립니다. 일본 사람을 불러 말합니다. “천황 폐하의 명령이니 뛰어내리시오”. 일본사람도 소데스까하며 뛰어내립니다. 다음 프랑스 사람을 불러 패션의 나라답게 멋지게 뛰어내리시오했더니 폼을 잡고 뛰어내렸습니다. 미국 사람을 불러 모두 뛰어내리니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뛰어내리시오했더니 뛰어내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이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한국인을 뛰어내리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국인을 불러 귀속말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사람이 용감하게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린 후 기자가 물었습니다. “기장이 무엇이라고 말하던가요?” 한국사람이 말했습니다. “공짭니다. 뛰어 내리세요 해서 뛰어내렸습니다”.

 

새해 우리는 많은 일을 만날 것입니다. 차마 비행기에서 뛰어내리지는 않겠지만 많은 산과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때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겨울에도 잎이 푸른 나무를 상록수라고 합니다. 어떻게 추운 겨울에도 푸르게 살아 있을까? 뿌리에서 올라오는 진액때문입니다. 나무의 생명은 뿌리에 있고 뿌리는 옥토에 뿌리박고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모든 잎과 줄기, 꽃은 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곧 뿌리입니다. 우리 삶을 지탱해주고 중심잡아 주고 생명을 공급해주는 것이 뿌리입니다. 한 해도 믿음으로 승리하기 원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많은 열매를 맺기 원합니까? 그를 위하여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만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가 예수님 없는 바다에서 풍랑 때문에 바다속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손잡고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믿음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은 우리에게 어떤 힘과 승리를 줍니까?

 

믿음은 풍랑속에서 생깁니다

먼저 베드로가 빠진 갈릴리 바다 상황을 봅시다. 갈릴리 바다는 아름다운 바다입니다. 물고기도 많고 주변의 환경도 아름답습니다. 그래도 항상 있는 것이 풍랑입니다. 지난 12월에도 목회자들과 함께 방문해서 배를 탓는 데 큰 풍랑이 치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 풍랑은 바다가 해저 210미터의 낮은 곳이기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갈릴리는 마치 세수대야처럼 움푹 꺼져 있습니다. 주변에 둘러쌓인 높은 산들이 해수면 높이입니다. 그래서 산에서 바람이 불면 바다속으로 곤두박질합니다. 계절에 따라 바람이 조금 다릅니다. 여름에는 남서풍이 불고 겨울에는 북동풍이 붑니다. 여름에 부는 바람은 지중해 쪽에서 불어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킵니다. 대부분 풍랑을 일으키는 바람은 북동풍입니다. 그러니까 여름보다 겨울, 11월 부터 2월 사이에 부는 이 바람이 바다에 풍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성경에 픙랑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 나오면 , 이때가 겨울이구나. 11월에서 2월 경이구나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문제는 갈릴리바다에 있으면 여름이든 거울이든 바람은 항상 불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실까요?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리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고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배를 탓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갈릴리바다처럼 늘 풍랑이 치지 않습니까? 질문은 이것입니다. 항상 치는 풍랑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운명이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당하자그래야 합니까? ”꾸뻬씨의 행복 여행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행복에 대한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행복의 최대 적은 경쟁이다“. 그 중에서 좋은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행복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바다 풍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풍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풍랑을 어떻게 보며 풍랑을 통해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결국 풍랑을 통해 무엇을 얻었습니까? 믿음을 얻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책상머리에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교실에서 베드로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풍랑치는 바다에서 믿음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아한 성경공부시간이나 은혜로운 예배시간에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책을 통해서도 얻고 좋은 스승을 통해서도 얻지만 믿음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풍랑치는 갈릴리 바다 현장입니다.

 

여러분은 욥기라는 책을 아십니까? 욥기는 딱 한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난입니다. 세상에 많은 책과 논문이 있지만 오직 고난에 대해서만 깊히 생각하게 하는 책은 욥기 밖에 없습니다. 책을 펼치면 동방의 의인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그것도 세 가지를 갑자기 당합니다. 먼저 사막의 깡패들이 욥의 모든 소와 나귀들을 칼로 죽이고 빼앗아 갑니다. 조금 있다가 갑자기 태풍이 불더니 욥의 열 아들, 딸들을 몰살 시킵니다. 마지막엔 믿었던 아내마저 욥을 떠납니다. 정말 황당합니다. 왜 이런 갑작스러운 일이 욥에게 일어난 것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입니다. 이들은 욥을 위로하려고 멀리서 왔지만 결국은 욥을 더 힘들게 합니다. 고난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와 욥이 고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기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1) 먼저 엘리바스, “네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은 네가 잘못 믿었기 때문이다. 잘 믿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겠느냐?” 엘리바스는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욥이 제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뭔가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면 절대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죄짓고 잘못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꼭 우리가 잘못 믿어서 그런 것입니까? 그러면 잘 믿었으면 고난이 없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난당했고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었습니까?

(2) 둘째 빌닷입니다. 빌닷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네가 당하는 고통은 네가 지은 죄의 결과다. 자업자득이다. 그래서 너는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잘 참는 일이다”. 빌닷의 생각은 욥의 고난이 욥의 죄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곧 응과응보라는 것입니다. 8:3-4입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우리가 죄짓기만 기다리고 계실까요? 우리를 혼내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3) 세 번째 사람이 소발입니다. 소발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잘 믿으면 복도 받는 데 네가 그렇지 못한 것은 분명 네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복이 아니다”. 소발의 생각은 요즘 말하는 소위 성공주의 신앙을 대표합니다. 믿는 사람은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하는 데 고난은 복이 아니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0:4-5을 볼까요?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믿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복이 아닙니까? 고난이 하나도 없어야 복을 받는 것입니까?

 

이렇게 세 친구들이 말할 때 욥이 대답합니다. 23:10절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말씀은 욥기의 주제요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 항상 고난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기 때문에 고난이 없다거나 고난이 없어야 좋은 믿음이라거나 고난이 있는 것은 우리가 잘못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믿음은 고난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고난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어떻게 바라봅니까? 고난을 통해 우리를 정금같이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고난을 피하는 믿음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영적 군사가 되는 믿음입니다. 인생에는 잡석이 있고 보석이 있습니다. 잡석은 하나님이 없는 돌입니다. 보기는 괜찮아도 때려 보면 산산히 부서져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보석은 고난을 통해 단련된 정금같은 믿음입니다.

 

이것을 도표로 볼까요?

 

엘리바스 신앙생활 잘못해서

빌닷 고난 죄 때문에 욥 연단으로 정금같이 됨

소발 복이 아니다

 

고난은 우리가 잘못 믿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죄때문에만 오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이 복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연단되면 정금같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쓴 글을 읽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목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입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웃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운다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성가신 일에 연루된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상과 꿈을 사람들 앞에 내어 놓은 것은 그들의 사랑을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돌려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절망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시도해 본다는 것은 실패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며,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는 어떤 고난이나 슬픔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배우거나 느끼거나 변하거나 자라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확신에 매인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들도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 것을 아십니까? “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는 것을 아십니까? 베드로가 풍랑치는 갈릴리 바다에서 믿음을 얻었듯이 욥이 고난속에서 정금같은 믿음을 얻었듯이 우리도 인생의 고난을 통해 정금같이 됩니다.

 

믿음은 기도로 강해집니다

그러나 풍랑속에서 믿음을 얻었다고 풍랑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풍랑에서 생겨나고 기도를 통해 자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만나기전 예수님이 어디를 가셨습니다. 어디를 가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가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은 산에 가셨습니다. 그 전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해서 함께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재촉했다는 말은 강권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강권했음에도 불구파고 제자들은 그냥 배를 탓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간 목적이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23절입니다.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는 아직 제자들이 바다에서 배를 타기 전입니다. 배를 타기 전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직은 아무 문제가 없을 때, 갈릴리 바다가 거울처럼 아름답고 그림처럼 평안할 때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올라 가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놓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만 여깁니다. 기도를 문제가 생기면 부르짖는 사후약방문정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는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풍랑만난 바다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살려 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을 때 아직은 갈릴리 바다가 잔잔할 때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고통의 예방약입니다. 기도한다고 고통이 없어지지 않지만 기도하면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우연처럼 보이는 기적이 일어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우연같은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지만 기도가 꼭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하면 이미 때는 늦습니다. 평소에 기도해야 합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당황함과 예수님의 담대함의 차이가 어디서 옵니까? 기도에서 나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소리지르거늘”,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기도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기도했고 제자들은 바로 바다로 갔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기도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전에 기도했고 제자들은 사후에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일어나기 전에 기도했고 제자들은 풍랑 일어난 후에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일어나지 않기 위해 기도했고 제자들은 풍랑을 잔잔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했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제자는 위급할 때만 기도했고 예수님은 매일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은 일이 있어서 기도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를 무려 170번이나 불렀습니다. 매일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며 산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일생 주님으로부터 세 번이나 두려워 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세 번의 음성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심하게 고난당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기도할 때입니다. 첫 번째 음성은 고린도에서 였습니다. 18:9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결국 바울은 고린도에서 승리했습니다. 밤에 바울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행23장에서 공회에 잡혀 재판받을 때입니다.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바울을 납치하여 죽일 것이라는 정보가 있던 때, 하나님이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 23: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다같이 그날 밤에”. 왜 하필 밤입니까? 밤에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폭도들을 막아 주셨습니다. 마지막이 행27장에서 죄수들과 함께 배타고 로마로 갈 때입니다. 그 칠흙같은 풍랑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어떻습니까? “내 곁에 서서란 말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고난가운데 기도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안드류 머레이가 쓴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머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려 한다면 한 손으로는 물에 빠진 사람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더 강한 것을 붙잡아야 한다”. 머레이의 이 말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필요한 지혜를 말한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뛰어들 때 그냥 뛰어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둘 다 죽습니다. 뛰어들 때 더 강한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나를 붙잡아 것이 있는 만큼 내가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한 손으로 세상을 향해 내밀고 다른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기도는 한손오르는 직장을 잡고 한손으로는 하나님 붙잡는 것입니다. 기도는 한손으로는 내 소원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는 힘만큼 내가 세상에서 힘을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하나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기도를 낳고 기도는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믿음이 승리하게 합니다

풍랑에서 믿음이 생긴 베드로가 기도를 통해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결국 그 믿음이 베로로를 승리하게 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데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27,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풍랑위를 걸으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베드로는 담대해졌습니다. 담대함은 행동으로 곧 나타났습니다. 배에서 내려 물위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때 풍랑이 또 몰려 왔습니다. 베드로가 풍랑 때문에 물속에 빠져 가자 31절입니다.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여기서 즉시가 중요합니다. 주님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즉시 응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 있으나 믿음의 행동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진 베드로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스스로 믿음으로 일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바다위에 성큼 발을 내 딛게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물에도 빠졌지만 멀리 보아야 합니다. 한번 물에 빠졌다고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지면 예수님이 손내밉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은 마술을 기대하지 않고 믿음을 기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마술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대학에 붙고 가만히 있어서 사업이 잘되고 가만히 있어도 교회가 부흥되는 않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풍랑속에서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물에 빠지기를 두려워 해서는 물에서 나올 수도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베드로가 물에 빠지기 전에는 예수님도 손내밀지 않았다는 것을. 믿음은 예수님 바라보고 모험하는 것입니다. 모험이 없으면 성공도 없습니다.

 

모험할 때 단 한 가지를 기억하면 됩니다. 사실보다 진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실의 세계가 있고 진실의 세계가 있습니다. 사실의 세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현실 세계요 진실의 세계는 우리가 바라보고 소원하는 하늘의 세계입니다. 언제나 진실한 믿음은 사실을 따라가지 않고 진실을 따라 갑니다. 처녀 마리아가 임신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났을 때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 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처녀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사실을 믿지 않고 진실을 믿었습니다.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처녀 혼자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과학적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남자가 없이도 아이 낳을 수 있다는 진실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사실을 믿는 사람은 과학적인 사람이고 진실을 믿는 사람은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모세때 12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했습니다. 가보니 그들은 가나안사람들에 비해 메뚜기 떼였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진실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할 수 있다. 여호아께서 함께 계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10사람은 사실을 믿고 2사람은 진실을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0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2사람만 들어갔습니다. 언제나 기적은 믿음에서 오고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모세는 갈라지지 않은 홍해바다의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바다도 갈라진다는 말씀의 진실을 믿었습니다. 결국 믿음이 이겼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의 난공불락의 성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믿음이 이겼습니다.

 

언제나 사실보다 진리가 승리합니다. 네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난 이희아는 손가락이 전부 네 개뿐이며, 무릎 이하로는 다리도 없는 장애아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다 틀렸다고 낙심했지만 희아 엄마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잘될거야”. 결국 믿음이 승리했습니다. 혈루병 여인은 매일 피를 흘리고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안정하라고 말했지만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그 결과 나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가 붙잡고 믿어야 말씀이 있습니다. 요일5:4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승리하게 합니다. 고통은 우리에게서 믿음을 일으킵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결국 믿음이 승리하게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 그 믿음이 우리를 승리하게 합니다. 한 해동안 그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자의 삶(4) 1:12-22 2014.1.26()

 

제자의 승리, 믿음이 이긴다

 

믿음은 풍랑속에서 생깁니다

갈릴리 풍랑(사진).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리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세 친구의 고난 이해

(1) 엘리바스, “네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은 네가 잘못 믿었기 때문이다. 잘 믿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겠느냐?”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2) 빌닷, “네가 당하는 고통은 네가 지은 죄의 결과다. 결국 자업자득이다. 그래서 너는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잘 참는 일이다”.

 

8:3-4,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3) 소발, “잘 믿으면 복도 받는 데 네가 그렇지 못한 것은 분명 네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복이 아니다”.

 

20:4-5,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엘리바스 신앙생활 잘못해서

빌닷 고난 죄 때문에 욥 연단으로 정금같이 됨

소발 복이 아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웃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운다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성가신 일에 연루된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상과 꿈을 사람들 앞에 내어 놓은 것은 그들의 사랑을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돌려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절망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시도해 본다는 것은 실패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며,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는 어떤 고난이나 슬픔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배우거나 느끼거나 변하거나 자라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확신에 매인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믿음은 기도로 강해집니다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가기 혼자 계시더니”.

14:26,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소리지르거늘”,

14: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과 제자들의 기도의 차이

예수님은 사전에 기도했고 제자들은 사후에 기도했다.

예수님은 풍랑일어나기 전에 기도했고 제자들은 풍랑 일어난 후에 기도했다.

제자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했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위해 기도했다.

제자들은 일이 있어서 기도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했다.

 

바울의 두려워 말라

18:9, "두려워 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안드류 머레이, “만일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려 한다면 한 손으로는 물에 빠진 사람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더 강한 것을 붙잡아야 한다”.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

 

믿음이 승리하게 합니다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사실보다 진실을 바라보라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