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삶(3) 마11:11-14 2014.1.19(일)
제자의 비전, 천국을 침노하라
새해 세 번째 맞는 주일입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가 할 일은 꿈을 갖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를 이끌어 갈 비전을 세우는 일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신학교를 가려고 비전을 품고 서울에 상경했습니다.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동대문에 있는 한 독서실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신학교 꿈을 꾸었습니다. 그때 독서실에 붙어 있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어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꿈을 주는 표어였습니다. 글자 그대로 좁은 독서실에서 4개월동안 새우잠을 자면서 고래 꿈을 꾸었습니다. 낮에는 밖에 나가 장사를 하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시험준비를 했습니다. 결국 꿈을 이루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꿈입니다. 미국의 헬렌 켈러는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습니다. 한번은 누가 물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무엇일까요?” 헬렌 켈러가 대답했습니다. “시력은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visual은 있으나 vision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전은 보는 것입니다. 시력이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비전은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시력이 지금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면 비전은 미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비전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비전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비전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러분은 한 해동안 어떤 비전을 가졌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한 해동안 설레이게 하고 무엇이 한 해동안 여러분을 힘있게 이끌어 갑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비전 하나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 비전은 우리가 가진 비전과 조금 다른 성경적 비전입니다. 평소 우리가 갖는 비전이 아니기 때문에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전을 따르면 우리가 행복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그 비전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록된 것을 보셨습니까?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것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외쳤습니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는 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에 38회, 마가복음에 14회, 누가복음에서 32회, 모두 94번 나옵니다. 많이 나온다는 말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고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행20: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은 전도할 때 다른 것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이 하나님의 나라로 마칩니다. 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성경의 큰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의 가장 큰 비전이 될까요? 하나님의 나라 비전을 가지면 우리가 어떻게 되고 어떻게 축복받을까요? 새 해 비전을 세우는 1월에, 하나님 나라 비전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다스리는 비전입니다
여러분은 “천국”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천사가 떠오릅니까? 하나님이 앉아 계신 보좌가 떠오릅니까? 보통 “천국”하면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천사가 날며 성도들이 찬양하는 장소를 떠올립니다.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펄시 콜레 목사님이 남미의 아마존강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정글을 여행하다가 환상중에 천국을 보고 쓴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천국의 넓이가 나옵니다. 사방 2400킬로의 사각형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 보좌의 높이도 나옵니다. 80킬로입니다. 대단합니다. 의자 하나의 높이가 80킬로라면 도대체 천국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에베레스트산이 약 8천미터 되니까 하나님이 앉아 계신 의자는 그 보다 10배가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넓은 우주에 비하면 2400킬로는 얼마나 작은 것입니까? 빛이 일년 달린 거리가 1광년인 데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은하계는 지구에서 20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비친 빛이 2백만년이 지나야 지구에 도착합니다. 그러니 우주는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가끔 우리가 여러 가지 일로 답답하고 힘들 때 하늘을 한번 쳐다 봐야 합니다. 하늘이 얼마나 큰지. 아침에 붉고 떠오르는 태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실 그 태양도 은하계를 유영하는 5천억개의 별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밤 하늘에 팔을 뻗어 100원 짜리 동전으로 우리 눈을 가리면 별 1,500만 개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주는 그렇게 넓고 큰 데 우리는 작은 일로 근심하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하늘을 쳐다 보아야 합니다. 우주는 얼마나 크고 지구는 얼마나 작은가? 그리고 그 지구에 사는 나는 얼마나 작은가? 그래서 성경에 많이 나오는 표현이 “하늘의 하늘들”입니다. 신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시148: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왜 성경이 “하늘의 하늘들”이라고 쓸까요? 하늘이 하나가 아니고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넓고 큰 것은 고대인들도 알았던 것입니다. 어느날 제가 제 방에 앉아 있는 데 방이 햇빛이 쫙 비치면서 햇빛이 먼지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짧은 글을 썻습니다. 제목은 “햇빛과 먼지”입니다. “이른 아침에 햇빛이 비친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득 제가 그 작은 먼지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작은 먼지도 잊지 않고 햇빛이 비춰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작은 먼지입니다. 그래서 늘 하늘을 바라보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늘은 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넓은 우주를 다스리시듯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 뉘앙스가 다릅니다. “하늘”이 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적 개념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적 개념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통치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를 다스리신다“. 이렇게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대단한 능력입니다.
마12:28 볼까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다같이 “임하였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습니다. “임했다”는 말은 전쟁용어입니다. 정복군이 질풍노도와 같이 쳐들어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그 나라 모든 방송시설을 장악하고 정부기관을 무력화시킨 뒤에 게엄령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부,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믿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믿는 것은 많은 종교중의 하나로 기독교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군대가 진주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미 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만 사해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진 권세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다스리면 그 정부는 그 정부가 부여하는 새로운 통치를 시작합니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장관, 사령관, 공무원, 군인들을 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믿고 제자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세와 권능을 줍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면 우리는 그에게서 새로운 능력을 받습니다. 권세와 권능입니다. 권세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요 권능은 자격을 갖춘 자가 누릴 힘입니다.
요1:12을 아십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 “권세”가 나옵니다. 영어로 하면 authority입니다. 공적으로 허락받은 자격, 힘입니다. 우리는 예수믿을 때 간신히 죄용서받고 죽은 뒤에 천국이나 가는 그런 사람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권세와 권능을 받았습니다. 권세가 나라로부터 받은 합법적 권리라면 권능은 그 권리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의 내용입니다. 영어로는 power입니다. 마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제자로 부를 때 이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자녀가 될 권세, 자녀답게 살 권능, 예수님 제자로 누릴 권세, 예수님 제자로 행할 수 있는 힘, 다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미 우리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믿음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제자로 살 때 한 가지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했을 뿐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세례요한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죽어가면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메시아로 믿었던 예수님이 혹시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높이 평가하면서 여자가 낳은 자중 가장 큰 자가 세례요한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12절에서 말합니다.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은 그가 천국을 침노했다는 것입니다. 이 ”천국을 침노했다“는 말이 무엇일까? 12절은 두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또 침노하고”. 한번은 침노를 당합니다. 수동형입니다. 다른 한번은 침노합니다. 능동형입니다. “침노당하고 침노합니다”. 우리가 예수믿는 제자로 살려면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침노당했습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대로 예수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군대처럼 예수믿는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권세와 권능으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찬289장을 아십니까?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믿음은 내가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맘에 오신 것입니다.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침노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맘에 하나님이 오셨으면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침노하셨다면 우리도 세상으로 침투해야 합니다. 여기서 ”침노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길을 열었다는 말입니다. 굳게 닫힌 문을 연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하포레츠", 영어로는 "breaker"입니다. "길을 깼다. 문을 부쉈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누가 먼저 했는가 하면 세례요한이 먼저 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을 열고 신약을 처음 시작한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는 이 일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가 되면서 세례요한이 이 일을 했습니다. 마치 구약시대의 문을 break, 깨부수고 예수님이 오도록 문을 열었습니다. 말하자면 세례요한은 굳게 닫힌 문을 연 사람입니다. 마치 고선지 장군이 천산산맥을 넘어 서역의 길을 연 것처럼, 컬럼버스가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을 연 것처럼 세례 요한이 예수님 오신 길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침노”입니다.
“침노”라는 이 말은 구약에 한 번 나옵니다. 미가서 2:13입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여기에 “길을 여는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포레츠”, 영어로는 “breaker” (부수는 사람)라는 뜻입니다. 어떤 성을 공격할 때 제일 먼저 공성퇴로 육중한 성문을 부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빗발처럼 화살을 맞으며 온 몸으로 성문을 부숩니다. 그러면 뒤에서 보병이 “와”하고 함성을 지르며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세례요한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시해 보겠습니다.
1) 세례요한
먼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자, 여기에 구약이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수 천년동안 이렇게 갇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갇혀 있는 성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태어났습니다. 그에게 어느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리고 길을 열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을 문을 열어 예수님께 나아가게 한 사람입니다. 그는 구약시대를 부수고 신약시대로 침노했습니다.
구약
세례요한
예수님
2) 목장
이스라엘 목장의 상황에서 “침노한다”는 말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양들이 잠자는 우리가 있습니다. 양의 우리입니다. 양은 이렇게 둥근 우리에 모여 삽니다(그림). 돌을 쌓았거나무나 풀로 원형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들짐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시덤불로 덮어 놓았습니다. 문은 좁고 양 한 마리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가 일어나서 양우리로 갑니다. 양들이 잘 잤는가를 확인한 다음 문을 엽니다. 그러면 양들은 그 좁은 문으로 쏜살같이 빠져 나와 목자를 따라 들로 갑니다. 이것이 “문을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침노”입니다. 밤새 울안에만 있다가 아침에 목자가 문을 열어 문밖으로 쏜살같이 나가는 것입니다.
양우리
목자
들
3) 교회
교회도 매일 침노합니다. 자 여기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마치 어린양들이 모여 사는 영적 양우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랬더니 성도들이 권세와 권능을 받아 세상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보다 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땅에 삽니다. 성도들은 교회 모여 삽니다. 성도들이 교회 모여 사는 것은 교회가 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을 이루는 교두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모여 하나님 나라를 바라봅니다.
조금 어렵지만 이 표를 보시면 좋겠습니다.
교회 하나님의 나라
현재적 미래적
잠정적 완성적
죄인과 의인의 나라 성도와 의인의 나라
(밀과 가라지) (밀)
사람 하나님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사는 것은 교회가 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다. 다시 그림을 보시면 교회에 사는 성도는 끊임없이 교회를 부수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회
성도
하나님의 나라
여러분, 그래서 왜 우리가 교회안에 안주하면 안될까요? 왜 우리가 예배마치면 곧 바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는 부지런히 세상을 섬기며 선교해야 할까요? 교회밖에 더 큰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한 부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 부부는 훌륭한 믿음을 가진 분들로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저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한참 있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는 데 “목사님, 저희 부부가 이번에 생기는 광교한신교회에 가서 섬기면 안될까요?” 제가 몇 마디 그 분들하고 이야기하면서 그 분들에게 진심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잘했습니다. 어디나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거기서 잘 하나님을 섬기세요”. 인간적으로 보면 이 분들은 우리 교회를 떠나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고 우리 교회에서 지도력을 갖고 섬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생각입니다. 우리 교회보다 큰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숴야 합니다. 내 교회, 내 교단, 우리 교회, 욕심, 소유, 아집을 부수고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 하나 세우는 데 많은 물질과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자신을 깨뜨려야 합니다. 자기교회, 개교회주의, 깨뜨려야 합니다. 목회자의 욕심도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침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열기 위해 천국열쇠를 사용하십시요
이 일을 했던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깨뜨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사람은 세례요한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성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성문을 부수고 길을 내야 합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12:12,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를 영어 성경으로 보면 "forceful men lay hold of it"입니다. "강한 자가 빼앗는다“는 뜻입니다.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강한 용사만이 자기를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엽니다.
요즘 나온 좋은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적 경영작가 세스 도딘이 쓴 ”이카루스 이야기“입니다(사진).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왕의 미움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왕궁 첨탑에 갇히게 됩니다. 살 길이 막막하던 아버지는 하늘을 날아 아들과 탈출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높히도 날지 말고 너무 낮게도 날지 말라. 너무 높게 날면 태양과 가까워 날개가 녹을 것이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너무 흥분해서 너무 높게 날다가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 이카루스는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높게 날다가 죽었는 데 현대인은 아예 날기 조차 두려워 한다. 이 시대에 정말 그리운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날았던 이카루스다. 그는 자기 두려움을 뛰어 넘어 하늘을 날았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안전한 데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안전에 길들여지지 말고 높이 날아라. 누구나 한번은 날 수 있다”.
세례요한처럼 강한 자가 되고 새로운 세계로 침노하려는 자는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여 높히 날기를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안전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 담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천국열쇠입니다.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천국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믿고 고백하는 우리에게도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열쇠의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안에서 잠그는 기능과 밖으로 여는 기능입니다. 천국 열쇠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밖으로 여는 기능이 필요합니다. 안에서 잠그면 자기는 안전하겠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못합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성경은 천국이 세례요한때부터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세례요한 이후로 천국은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침노하면 빼앗습니다. 누구나 천국 열쇠를 사용하면 열립니다. 열쇠를 가진 자에게 벽은 없습니다. 모든 벽에는 문이 있습니다. 육중한 벽도 찾아보면 어딘가 반드시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은 열쇠만 꽂으면 열립니다. 예수님 제나로 부름받은 우리가 평생 이 비전을 갖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세례요한처럼 길여는 자가 되겠다. 나는 세례요한처럼 길만드는 자가 되겠다. 길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가는 곳이 길이 되게 하겠다. 하나님 나라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매일 나의 성을 부수겠다. 안전하게 살기 보다 위험을 무릎쓰고 하늘을 날겠다. 예수님 제자로 편한 삶에 길들여지지 않겠다. 안전에 길들여지지 말고 높이 날겠다. 누구나 한번은 날 수 있다. 내 앞에 어떤 벽이 있어도 반드시 밀어 문이 되게 하겠다. 나는 나보다 크고 심지어 교회보다 큰 하나님 나라를 늘 바라보겠다. 이 놀라운 꿈, 제자의 비전이 평생 저와 여러분의 비전되기를 바랍니다.
제자의 삶(3) 마11:11-14 2014.1.19(일)
제자의 비전, 천국을 침노하라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어라”.
“시력은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행20: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다스리는 비전입니다
신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시148: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햇빛과 먼지”
이른 아침에 햇빛이 비친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득 제가 그 작은 먼지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작은 먼지도 잊지 않고 햇빛이 비춰주시니 감사합니다.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권세=나라로부터 공적으로 허락받은 자격
권능=권리안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힘
마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해야 합니다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찬289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침노했다="하포레츠"(breaker)="길을 깼다. 문을 부쉈다”
미2: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1) 세례요한
구약
세례요한
예수님
2) 목장
양의 우리(그림).
양우리
목자
들
3) 교회
교회 하나님의 나라
현재적 미래적
잠정적 완성적
죄인과 의인의 나라 성도와 의인의 나라
(밀과 가라지) (밀)
사람 하나님
교회
성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열기 위해 천국열쇠를 사용하십시요
세스 도딘, ”이카루스 이야기“(사진).
“안전에 길들여지지 말고 높이 날아라. 누구나 한번은 날 수 있다”.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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