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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삶(5) 빌4:4-7 2014.2.2(일)

제자의 삶(5) 4:4-7 2014.2.2()

 

제자의 행복,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2월 첫 주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예수님의 제자로 열매맺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출발했습니다. 열매맺는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제자가 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행복한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합니까? 몇 년 전 우리나라 어느 재벌이 가지고 있다는 한 그림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눈물이라는 그림인데 그림값이 무려 90억 원이었습니다(그림). 그림을 보면 한 여자가 웃으면서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아무리 봐도 비쌀 것 같지 않은 데 90억입니다. 왜 이 그림이 비쌀까? 웃으니까 비쌀까?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어서 비쌀까? 자세히 보면 웃고 있는 데 눈물도 흘립니다. 눈물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것인지 고통의 대가를 지불해야 웃을 수 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웃는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있습니다(그림). 그런데 이 그림을 아무리 봐도 미소가 그렇게 밝지 않습니다. 살짝 웃을 뿐이지 어딘가 모르게 슬픕니다. 그래서 에드 디너라는 평론가가 모나리자 미소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모나리자의 웃음을 분석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나리자의 얼굴의 83% 정도가 행복한 감정을 표현하고, 17% 정도가 슬픈 감정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모나리자의 얼굴의 미소가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얼굴에 숨은 그늘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연하기를 인간 세계에 완전한 행복은 없다. 완벽하지 않는 행복, 고통과 슬픔이 함께 있는 행복, 그것이 인간이 가진 현실적인 행복이다. 모나리자는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라고 썻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행복은 없습니다. 1%도 슬픔이 없는 행복, 한번도 불행하지 않은 행족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바랍니다. 슬픔속에서도, 고통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새해, 우리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안에서 행복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요? 오늘 말씀은 행복의 비밀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라. 그리하면 행복할 것이다”. 4절 보실까요? 4: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씀이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로마의 감옥에서 썻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기뻐할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2천년전 로마의 감옥은 습기찬 지하실에 벌레가 기어다니고 온 몸은 쇠사슬로 묶인 채 자유를 빼앗긴 고통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나마 바울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였습니다. 도대체 사형수에게 무슨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무엇이 그렇게도 기뻐 남에게까지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이 기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뻐해야 하며 기쁨은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줍니까?

 

기쁨은 제자의 삶의 표지입니다.

먼저 기쁨은 제자의 삶의 첫 번째 표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때 그 첫번째 되는 특징이 기쁨입니다.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것은 다른 기쁨이 아니라 내 기쁨”, 예수님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16장에서도 말씀했습니다.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가진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신 기쁨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기쁨은 무엇일까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예수님의 주는 기쁨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형으로 말하고 있고 그나마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빌립보서 전체에서 9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9번이 다 명령형이고 현재형입니다. 반드시 기뻐해야 하고 지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오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큰 불행은 행복을 미래로 미루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쁨은 적극적인 것이며 지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당시 지식인들이 가졌던 생각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스토아 학파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고통이 있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대해는 태도는 기독교와 달랐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고통을 인정하면서 그 고통에 대해서 소극적인 대처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있는 고통이니 체념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걱정한다고 신경쓴다고 고통이 없어지지 않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일희일비하고 아등바등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본래 그런거야하며 관조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릅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소극적 체념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것입니다. “그런가 보다가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 일은 분명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뻐하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마치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들리는 징집의 나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 복종해야 할 일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기쁨을 명령으로 받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것을 다짐합니까? 기쁨은 인생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임을 아십니까?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기뻐하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하게 살기로 다짐합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기뻐하며 살기로 결심합니까?

 

이것을 성경의 말로 표현하면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과 무관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며칠전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413장의 배경을 알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부터 140년전에 미국 시카고에 호레이쇼 스패포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187311월 스패포드는 아내와 네 딸과 함께 프랑스에 갈 일이 있어 배를 탓습니다. “빌 뒤 아브르라는 배를 예약하고 함께 떠나기로 했는 데 중간에 스패포드에게 급한 일이 생겨 자신은 뒤에 남고 가족들만 배를 탓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탄 배가 항해 도중에 다른 배와 충돌해 침몰했습니다. 스패포드의 아내는 살아 남았지만 네 딸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스패포드는 급히 다른 배를 타고 조난현장으로 갔지만 딸들은 이미 차거운 대서양 바다에 실종된 후였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괴로워 몇 달을 힘들어 하는 어느날 오늘 말씀을 읽었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씀은 슬픔에 잠긴 스패포드에게 큰 소리로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가 이것을 쓴 것은 로마의 감옥이다. 나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너도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도 기뻐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기뻐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뻐할 일은 언제나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기뻐해야 앞으로 기뻐할 수 있다. 지금 어려울 때 기뻐해야 앞으로 더 어려울 때 기뻐할 수 있다. 지금 기뻐하라. 크게 기뻐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스패포드의 마음에 파고 들자 스패포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기쁨은 그에게 명령이요 결심이요 결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기도하는 데 어느날 아침 찬413장의 가사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대서양의 무서운 바다가, 큰 풍파가 내 딸들을 앗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기뻐하리라. ? 주 예수님이 우리의 대장이시니까. 그가 끝내 싸워서 나를 이기시니까“. 여러분도 항상 기뻐하겠습니까? 기쁨은 주님의 명령임을 믿습니까? 기쁨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신앙임을 믿습니까? 기뻐하지 않으면 불순종이요 불신앙임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관용을 통해 기쁨이 커집니다.

4절에서 기쁨이 무엇인가를 말한 바울은 5절에서 기쁨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말합니다. 그것은 관용입니다. 5절입니다.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왜 바울은 기쁨을 말하다가 갑자기 관용을 말하는 것일까요? 관용이란 관대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상태로 말하면 관용은 속상해 하지 않는 상태”, 너그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나 남에게 편한 마음, 조급하거나 보채는 마음이 아니라 기다리는 마음, 넓은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관용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말합니다. 왜 바울이 기쁨을 말하면서 관용을 말할까요? 우리의 기쁨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지만 상처받지 않도록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철학자 헤겔이 말한대로 마음을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기쁨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방법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상처를 받지 않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받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았다는 느낌입니다. 요즘 최고의 개그 유행어가 느낌 아니까입니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너무 느낌에 의존한다는 것을 실토한 말이기도 합니다.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느낌이 문제입니다. 느낌이 문제라면 느낌만 극복하면 상처는 없게 됩니다. 그 느낌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할 것은 우리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받은 것은 우리가 감정이 약하고 자존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상처를 안 받거나 덜 상처받으려면 내가 안정된 자존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백설공주이야기를 아십니까? 백설공주의 계모는 항상 거울을 보며 이렇게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녀는 항상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또 그 사실을 매일 확인하려고 합니다.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뺏을까봐 늘 전전긍긍합니다. 그래서 백설공주의 계모가 의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입니다. 상처는 이렇게 자신감,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찾아 옵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가 말한대로 열등감은 우월감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내가 최고다하는 사람은 내가 못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까불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나 좀 살려줘하는 말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여기서 관용은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그러워야 합니다. 자기에 대하여 당당하지 못하니까 남이 조금만 뭐라고 말해도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 남과 비교하여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게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남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없는 것이 남에게 있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은 나에게 있습니다. 경주를 하려고 하지 말고 완주를 하려고 해야 합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 토끼는 경주는 했고 거북이는 완주를 했습니다. 경주는 남과 경쟁하는 것입니다. 경쟁심이 상처를 불러 오고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깨뜨립니다. 거북이처럼 누구와 경주하지 않고 자기 길에서 완주하려고만 하면 언젠가 승리할 날이 옵니다.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대하면 남에 대해서도 관대해 집니다. 내가 여유가 있으니까 남에게도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남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고 누구나 상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애게 상처를 주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속에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처에 대하여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는 마치 남에게 던지기 위해 자기 손에 쥐고 있는 뜨거운 석탄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탄 때문에 먼저 상처를 입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상처는 밖으로 표출되기 전에 속에서 나오고 속에서 나올 때 이미 우리를 해칩니다. 상처는 남에게 주기 전에 이미 우리가 받습니다. 상처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성경 엡4: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래 두면 내가 먼저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기쁨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누구나 사랑해야 합니다. 혹시 누구에게 상처를 당했다 해도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타임즈지에 보면 흥미로운 복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의 한 노동자가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어느날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 마침 물두덩이를 지나던 차가 물을 튀겨 이 사람 차가 흙탕물로 바가지를 썻습니다. 이 사람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복수하기로 마음먹고 끝이 뵤족한 드라이버를 갖고 근처 주차장으로 가 550대가 넘는 차들의 타이어에 구멍을 냈습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종로에서 화풀이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결국 경찰에 잡혔습니다. 이 사람은 복수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감옥에 가는 것과 함께 엄청난 보상을 해야 했습니다. 복수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손해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믿는 우리가 복수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5절 뒷 부분,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왜 이 말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때가 되면 주께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런데 마음의 기쁨을 위해 우리가 관용을 배워야 할 또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형제들이 같이 갔지만 같이 가지 못한 동생이 있었습니다. 동생의 아내중 하나가 갑자기 몸이 아파 수술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일만 하던 동생 내외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암이 생겨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는 데 목회하는 제가 평소에 얼마나 형제들에게 잘 했겠습니까? 늘 시간에 쫓기고 제대로 못해서 마음으로 미안했습니다. 그러다가 수술날 병원에 갔는 데 몸이 아파 괴로워 하는 제수씨, 옆에서 간호하는 동생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독일의 본회퍼 목사님이 쓴 <신도의 공동생활>의 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짐이 될 때 그가 나의 형제입니다”. 그때 저는 망치로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의 이 말은 에 대한 저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본래 짐이란 무거운 것입니다. 누구도 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회퍼목사님은 짐을 지게 한 그가 나의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묵상할 때 마11:28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의 이 말은 어려운 말입니다. 어떻게 멍에를 메는 것이 자유입니까?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면서 배우라고 하실까? 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오직 짐을 진 자만 배울 수 있고 배운다는 것은 곧 짐을 지는 것입니다. 6:2에도 나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교회안에서 주님을 위해 짐을 질 때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짐지기를 싫어하고 특별히 다른 사람의 짐을 피하면 편하게 믿을 수는 있지만 교회가 그의 집이 되거나 교인이 그의 형제가 되지는 못합니다. 오래 교회 다녀도 믿음이 안 자라는 이유, 오래 교회 다녀도 교회안에 친구가 없는 이유는 언제 한번 남의 짐을 지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도 짐을 지우는 신자가 형제입니다. 목회자는 늘 그런 신자 때문에 깨어있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습관적으로 짐을 지우는 사람은 삶을 바꿔야 합니다. 자신 때문에 짐을 진 사람은 영적으로 유익을 얻지만 남을 이유없이 괴롭히고 습관적인 짐이 된 사람은 그것 때문에 불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짐을 지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남의 짐을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에 있는 예수님 제자의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 그 보화는 그냥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하여 관용하고, 남의 짐을 지는 마음이 있어야 지켜지고 성장합니다.

 

기도를 통해 기쁨은 하나님의 평강이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 제자안에 있는 기쁨을 위해 6절로 나아갑니다. 4절이 기쁨의 본질을 말한다면, 5절은 기쁨에 영향을 줄 인간적 측면을 살피고, 6절 이하는 기쁨을 완성할 영적 측면을 말합니다. 그 영적 측면이 기도입니다. 6절 이하를 보시겠습니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님 제자가 누릴 기쁨은 다만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용이 우리 자신과 남에 대한 좋은 태도이지만 좋은 자세와 태도를 가진다고 자동적으로 기쁨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도에 대하여 말할 때 세 가지 기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6, 그냥 기도”, “간구”, 그리고 감사의 기도. 왜 그냥 기도하라 하면 될 것을 기도, 간구, 감사, 세 가지로 기도를 말할까요? 기도의 세계란 넓고 크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서 하나님께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마치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가 다양한 것과 같습니다. 영국의 .C.S.루이스는 사랑을 세 가지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선물의 사랑, 필요의 사랑, 감상의 사랑. 이것을 기도에도 적용한다면 기도에도 선물의 기도, 필요의 기도, 감상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 기도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기도- 선물의 기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약속의 기도(믿고 구하면 약속한 것을 주신다)

(2) 간구- 필요의 기도. 하나님,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요청의 기도(무엇이든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3) 감사- 감상의 기도, 하나님, 친해지고 싶어요. 교제(사귐)의 기도(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닮아간다)

그런데 이 기도들을 통해 우리안에 기쁨이 유지되고 자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강이 됩니다. 가도는 우리를 어떻게 행복하게 할까요?

 

(1) 긍정적인 생각

우리를 기도하면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같은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옛날 한 유대인에게 딸이 둘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하나는 못생기고 하나는 입이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것들을 시집보낼까 아버지가 고민을 했는 데 다른 방법은 없고 해서 기도만 했답니다. 그랬더니 하루는 그 소식을 듣고 한 중매장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게 좋은 신랑감 둘이 있습니다. 둘이 다 좋은 데 한 가지씩 안 좋은 것이 있지요. 한 사람은 장님이요 또 하나는 귀먹어거리입니다. 그러니 내 생각에 앞못보는 장님은 큰 따님과 결혼시키시고 못 알아듣는 귀먹어거리는 둘째 따님과 결혼시키면 어떻습니까?" 결국 두 딸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기도한다고 타고난 얼굴과 성품이 한꺼번에 바뀌지 않지만 거기에 맞는 신랑감을 만나게 해서 행복하게 살게 합니다. 기도가 좋은 것은 늘 이렇게 좋은 해결책, 좋은 지혜, 좋은 생각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기쁨이 샘솟고 평강이 찾아 옵니다.

 

(2) 기쁨의 에너지

기도하면 우리에게 임하는 또 하나는 우리안에 기쁨의 에너지가 공급된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생활의 문제는 우리는 기쁘게 살기를 바라지만 가끔 그럴 힘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 크리스쳔이 해석자의 집이라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벽난로가 있고 불꽃은 타오르는 데 한 사람이 거기에 물을 계속 붓습니다. 그러면 불이 꺼져야 하는 데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안내자를 따라 옆방으로 가보았더니 거기에 한 사람이 계속 기름을 붓는 데 그 기름이 통을 따라 옆방의 난로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물을 부어도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기도는 곧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세상이, 사람이, 그리고 마귀가 우리 심령의 불을 끄려고 갖은 수단을 다해도 계속 기도하면 성령의 기름이 우리속에 부어져 우리 속에서 기쁨의 불길이 타오르고 생의 에너지가 생겨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안에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2월을 맞아 예수님의 제자로 열매맺기 원합니까? 그럴려면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은 기쁨에서 옵니다. 기쁨은 명령입니다. 기쁨은 선택입니다. 기쁨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기뻐하기로 결정해야 하고 기쁘게 살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기쁨은 관용을 통해 자랍니다. 자기 자신을 억눌러서는기쁨이 생길 수 없습니다. 기쁨도 상처도 내 속에서 생겨 나에게 먼저 영향을 줍니다. 상처받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 살지만 상처받지 않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간구와 감사의 기도로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차게 됩니다.

 

 

 

 

 

 

 

 

 

 

 

 

 

 

 

 

 

 

 

 

 

 

 

 

 

 

 

제자의 삶(5) 4:4-7 2014.2.2()

 

제자의 행복,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행복한 눈물”(그림).

모나리자”(그림).

4: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쁨은 제자의 삶의 표지입니다.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413, “내 평생에 가는 길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관용을 통해 기쁨이 커집니다.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리가 다른 사람으로 받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았다는 느낌이다“.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상처란 마치 남에게 던지기 위해 자기 손에 쥐고 있는 뜨거운 석탄과 같다. 그 석탄 때문에 가장 먼저 상처를 입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본회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짐이 될 때 그가 나의 형제입니다”.(신도의 공동생활)

 

11:2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기도를 통해 기쁨은 하나님의 평강이 됩니다.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세 가지 기도

(1) 기도- 선물의 기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약속의 기도(믿고 구하면 약속한 것을 주신다)

(2) 간구- 필요의 기도. 하나님,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요청의 기도(무엇이든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3) 감사- 감상의 기도, 하나님, 친해지고 싶어요. 교제(사귐)의 기도(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닮아간다)

 

기도를 통해 얻는 것들

(1) 긍정적인 생각

 

(2) 기쁨의 에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