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삶(7) 시1:1-8 2014.2.16(일)
제자의 뿌리, 묵상하라
지난 주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겨울이 되면 모든 생명이 마르고 그 위에 하얀 눈이 내립니다. 눈이 오면 도로는 불편하지만 보기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와도 죽지 않고 파랗게 살아 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상록수라고 부릅니다. 소나무, 주목나무, 측백나무, 향나무, 대나무, 동백나무, 사철나무등입니다. 왜 이 나무들은 겨울에도 파랗게 살아 있을까요? 땅속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 연결되어 생명의 진액의 공급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급받는 것은 상록수만이 아닙니다. 봄이 되면 우리 교회 주차장 화단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납니다. 분명 겨울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 데 봄이 되면 핍니다. 식물학자 정덕연 집사님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없었던 것이 생겨나지요?” 정집사가 말했습니다.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겨우내 땅속에 있던 뿌리에서 생명이 돋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 뿌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과 뿌리가 살아 있기만 하면 때가 되면 꽃이 핀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생명에 열결되어 있으면 때가 되면 반드시 꽃이 핀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자연의 원리가 그렇듯이 영적인 원리도 그럴까요? 우리의 영혼이 상록수처럼 살아 언제나 푸릇 푸릇 하려면 우리의 영적 뿌리가 늘 생수의 근원과 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영적 생명의 살고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뿌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 있습니다. 존 비니안이 쓴 “천로역정”입니다. 이 책은 주인공 크리스쳔이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의 길을 통해 우리가 가는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길을 가다가 해석자의 집이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안내자가 나와 캄캄한 방으로 크리스쳔을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 안에는 한 남자가 철창에 갇혀 있었습니다. 남자는 한없이 슬픈 얼굴에 한숨까지 쉬고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그랬더니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과거에는 생각도 못했던 사람이죠”. “과거에는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믿음에 관해서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남자가 말했습니다. “자포자기 상태예요. 매일 절망감이 나를 에워싸고, 나는 이제 틀렸어요”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죠?” 남자가 말했습니다. “믿음 생활을 계속하지 못했죠. 한때 잘 믿은 것을 자만하여 중간에 너무 오래 쉬었죠. 그리고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았어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갖지 못했어요. 교회는 나갔지만 영적 생활을 하지 못했죠. 규치적인 공급을 받지 못했어요. 신앙이 질펄질퍽 했어요. 몇 일 잘하다가 몇 달 쉬고, 몇 일 기도하다 몇 년 하나님 떠났어요. 그랬더니 어느날 보니 내 영혼이 말랐더라고요. 그 뒤부터 회복하지 못하고 이러고 있어요”. 결국 공급의 문제였습니다. 신앙의 침체의 문제는 곧 공급의 문제입니다. 마치 땅속에 있는 뿌리가 생명의 진액의 공급받는 것처럼 우리 영혼이 끊임없이 생수의 공급을 받아야 하는 데 공급이 중단되자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뿌리를 통해 매일 생명의 공급을 받습니까? 왜 그렇게 오래 예수믿고 왜 그렇게 많이 교회안에서 봉사해도 기쁨이 없고 자주 시험들고 들쭉 날쭉 한지 아십니까? 공급의 문제입니다. 지속적인 공급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열매맺는 삶을 위해 제자가 할 첫 번째는 묵상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를 공급받는 방법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는 방법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안에 오래 머무는 법, 하나님의 생수를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법을 배우시겠습니까? 시편1편은 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1절을 읽겠습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다윗은 우리에게 묵상을 가르치기 전에 마음을 준비시킵니다. 이렇게 준비시킵니다. “묵상을 배우기 저전에 죄짓지 않는 법을 배워라”. 1절 보십시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영적인 사람은 악인의 꾀에 빠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쁜 것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꾀”는 생각입니다. 죄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생각에 잠복해 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계속하면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갑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생각의 반복은 죄로 길로 내몹니다. 길은 사람들이 계속 다녀서 생긴 것입니다. 생각이 반복되면 길이 됩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자리를 잡습니다. “자리에 앉았다”는 말은 죄의 습관이 반복적 행동을 낳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죄가 터를 잡고 나면 그때부터 죄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죄는 언제나 과정을 따라 갑니다. 처음에는 “꾀”로 시작하여 반복하면 “길”이 되다가 더 계속하면 아예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기 싫어도 합니다. 묵상을 위해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죄를 경계하는 일입니다.
죄를 안짓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1절에서 죄를 경계한 다윗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1:2, “오직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만일 우리의 영적 생활이 1절로 충분하다면 다윗은 2절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2절이 바로 “오직 여호아의 율법”으로 나가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키”, “그러나”가 있습니다. 1절에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않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있습니다. “but”,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고 하나님의 생수를 계속 공급받으려면 다만 죄안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절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술, 담배 먹는 것이 죄입니까? 왜 예수믿는 사람들은 술, 담배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까?”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술, 담배 먹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은 다만 죄짓지 않기 위해서 삽니까? 왜 얼마든지 당신의 삶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데 굳이 술, 담배하면서 술담배는 죄가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고 삽니까?” 어떤 분은 또 묻습니다. “목사님, 아무리 찾아봐도 신약성경에 십일조 하라는 말이 없던데요”.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면 있으면 하겠습니까?” 신약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6번이나 나옵니다. 구약성경에는 262번이나 나옵니다. 문제는 성경을 핑계대며 십일조 안하려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왜 안할까요? 아깝기 때문이죠. 손해보는 것 같지요. 그러나 다만 손해보지 않고 계속 쥐고 있는 것이 물질생활의 목표입니까? 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고 풍성히 누리며 살지 않습니까? 성경은 십일조하면 내가 네 창고에 부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까? 오직하면 하나님이 “나를 시험해 보라”까지 말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 말씀은 못 믿고 아까워만하면서 풍성한 삶을 놓치며 삽니까? 저는 지금까지 십일조안해서 부자된 사람 못 보았고 십일조해서 가난한 사람 못 보았습니다. 안해서 쥐고 사는 것보다 드리고 복받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아내보고 교회는 나가되 미치지는 말라고 합니다. 나쁜 것에 미쳐야 문제지 하나님께 미치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당신은 언제 한번 옳은 일에 미쳐보았습니까?
1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천국에 갑니까? 못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은 악한 일을 안하는 것 이상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은 자가 될 뿐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만한 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매사에 소극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눅18:11,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앞에서 자기들이 하지 않은 것들을 자랑스럽게 나열했지만 그렇다고 한 것도 없어서 칭찬도 받지 못했습니다.
절대 소극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해서 안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착해 보인다고 속까지 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은 남기지 않은 종에게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란트받아 땅을 파고 꼭꼭 묻어둔 사람에게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하고 책망했습니다. 이 종이 어떤 악한 일을 했습니까? 남기지 않았습니다. 남기지 않은 것이 악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마3:10,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보통은 이렇게 말해야 맞습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마다 불에 던지리라”. 그런데 말씀은 나쁜 열매가 아니라 좋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입니다. 좋은 열매맺지 않은 사람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는 남에게 손해를 끼친 적이 없다. 다만 좋은 열매맺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무슨 잘못이냐?”. 그러나 예수님은 좋은 열매 안 맺은 것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나쁜 짓 안한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나쁜 열매 안 맺힌 것이 잘한 일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마25장에 예수님의 저주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선포한 사람들을 보면 나쁜 일을 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가 주릴 때 먹을 것 안 준 사람입니다. 사람이 죄짓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남에게 손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남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안 먹이고 안 찾아간 것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먹이고 당연히 찾아갔어야 할 일을 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안할 일을 안한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표준은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 5명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남의 기름을 훔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등에 기름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이 주인에게 상받는 것은 그가 포도원에서 울타리를 훼손하지 않고 나무를 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포도원에서 딴 포도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교인과 다투지 않았기 때문에 상받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상 받습니다. 20년, 30년 내 한 몸 교회 안 빠졌기 때문에 상급받지는 않습니다. 전도해서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해야 상급받습니다. 그래서 다시 2절입니다. 시1:2, “오직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죄 안짓고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다.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다만 죄짓지 않고 사는 삶이 충분하지 않은 것은 거기에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짓지 않고 사는 신앙은 의무적으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의무적으로 하는 신앙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2절에서 “즐거워하다”와 “묵상하다”가 나란히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묵상은 의무적으로 성경읽는 것이 아닙니다. 즐겁게 읽는 것입니다. 묵상은 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즐겁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즐거워 하는 사람은 묵상합니다. 묵상이 밖으로 나타난 신앙의 표현이라면 즐거움은 안에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즐거움은 묵상을 낳고 묵상은 즐거움에서 옵니다.
다윗은 시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했습니다. 에레미아도 말했습니다. 렘15:16,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묵상은 즐거움을 낳고 즐거움은 묵상에서 옵니다. 다시 에레미아의 말을 보십시오. 렘15:16,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묵상해야 기쁨이 옵니다.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내 영혼, 주 안에서 참 기쁘리”.
그렇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최근에 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았습니다. 어느 교단 총회장 목사님이 설교하는 데 그가 총회장 하던 해 성경을 30번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총회장이 얼마나 바쁩니까? 자칫 영혼이 메말라 질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그 바쁠 때 성경을 30번 읽었다니 제가 회개 했습니다. 성경이 대략 1200장 되기 때문에 하루에 3-4장 읽어야 한번 읽습니다. 그런데 30번 읽었다면 하루에 100장 이상 읽었다는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총회장 하면서 어떻게 하루에 100장 이상 성경을 읽을 수 있을까? 그 목사님은 새벽기도 하기 전에 2시간, 새벽기도 후 2시간, 하루에 네 시간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힘으로 총회장의 직분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보다는 덜 바쁘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은 어디서 옵니까? 우리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옵니까? “오직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말씀의 묵상에서 옵니다.
묵상이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의학용어입니다. 소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음식을 내가 먹어 속에서 소화시키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묵상은 우리 영적 생활의 모든 부분에 필요합니다. 성경 읽습니다. 묵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묵상으로 읽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말한대로 “주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묵상으로 성경읽는 것입니다. 묵상으로 성경읽는 것은 성경을 내가 사용하지 않고 수용하겠다는 말입니다. 사용이 있고 수용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묵상이 필요합니다. 묵상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할 때 내 말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뿐 아니라 귀를 빌려 주셨다고 합니다. 귀를 빌려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말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묵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조용히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12세기의 수도승 구이고가 말했습니다. “묵상 없이 성경읽으면 은혜가 없고 성경읽지 않고 묵상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묵상 없이 기도하는 것은 뿌리없는 나무요, 기도 없이 묵상하는 것은 열매없는 나무다.”
설교를 들을 때도 묵상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를 묵상으로 듣는다는 것은 졸면서 설교를 듣겠다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듣겠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에 어스킨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어떤 부인이 어스킨의 명성을 듣고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교회를 적게 나오더니 나중에는 교회도 안 나옵니다. 어스킨이 심방을 갔더니 그가 말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가 처음에는 은혜가 되었는데 갈수록 은혜가 안됩니다.” 설교자들이 가장 듣기 어려워 하는 말입니다. 그때 어스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그것은 부인이 처음에는 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다가 지금은 어스킨의 말로 듣기 때문이요“. 그렇습니다. 어스킨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이윤재 목사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나 제 설교에 은혜받는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설교를 제 개인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데 은혜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묵상은 영혼의 샘에서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이 생수를 먹으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2절 다시 보세요. “오직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다같이 “주야로”. 주야는 아침과 저녁입니다. 영적 생활은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 말씀 묵상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 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성경을 큐티하고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제가 어떤 장로님 가정을 대심방했습니다. 예배를 마쳤는 데 장로님이 노트를 한 아름 들고 나왔습니다. “무엇입니까?” 했더니 “목사님, 말씀노트입니다. 새벽마다 은혜받은 것을 큐티형식으로 메모하고 있는 데 벌써 8권이 되었습니다. 말씀뿐 아니라 좋은 책을 읽으면 메모합니다”. 노트를 보았더니 깨알같이 받은 은혜를 적어 놓았습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은혜받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은혜안에 머물려면 말씀을 묵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매일 아침 읽은 말씀을 트위터로 자녀들에게 보냅니다. 자녀들이 미국에도 있는 데 매일 자녀와 말씀안에서 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보고 “왜 교회 안가냐?”. “믿음이 없다” 그럴 필요없습니다. “여호아의 말씀을 즐거워 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아침마다 묵상한 것을 나누면 됩니다. 그래서 자녀가 하루라도 말씀이 안 오면 “아빠, 어디 아파?” 하고 당장 연락이 온답니다. 객지나 외국에 자녀가 있는 분들, “밥 잘 먹었냐? 잘 잤냐?” 그만 묻고 받은 말씀을 보내주세요. 최고로 좋은 습관이 묵상의 습관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독서하는 습관이 더 중요하다”. 누가 한 말인가 하면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의 말입니다. 습관의 중요성을 말한 것입니다. 안중근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사형당하기 전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라고 읽던 책을 다 읽고 어머니가 지어준 수의를 입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의 습관대로 살다 죽은 것입니다. 저를 여기까지 있게 한 두 가지 습관, 월요일마다 책읽고, 매일 새벽마다 성경읽고, 이 두 가지 습관이 저를 여기 있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묵상하시겠습니까? 여호아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복있습니다. 그러면 묵상하며 사는 삶은 어떤 복을 받습니까? 3절입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묵상하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됩니다.
묵상의 축복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한 말이 없습니다. 묵상하면 한마디로 형통합니다. 나무가 대단해서가 형통한 것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겨졌기 때문에 형통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보시겠습니까?(그림). 이것이 이스라엘 현장에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제가 브엘쉐바 광야에서 직접 찍은 것입니다. 사방이 광야로서 나무가 살 수 없는 환경이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은 나무가 시냇가에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창49:22을 보시겠습니까?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은 것은 샘곁에 심겼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종자가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이 심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샘곁에 심겨 져 물을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활의 원리가 있습니다.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풀리지 않는 환경에 문제를 두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무를 시냇가에 심지 않고 광야에 심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묵상은 우리의 문제를 문제가 풀릴 수 있는 시냇가에 갖다 두는 것입니다. 문제를 시냇가에 갖다 두면 때가 되면 문제가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생수로 인해 문제는 자동적으로 풀립니다. 그것이 3절의 “형통”입니다. 저는 새벽기도후에 제 방에서 성경읽고 묵상하며 매일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받은 은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성경 읽으면서 그것을 내 삶에 묵상하고 적용한 것들입니다. 요즘 제가 시편을 읽고 있는 데 시편을 통해 받은 은혜들입니다.
설날 전후 제가 몸이 안 좋았습니다. 감기 증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41편을 읽었는 데 41:3절의 말씀이 힘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가끔 목회자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에 그를 위해 기도했더니 시31:14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31: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조금 더 읽었더니 하나님이 새로운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시55:12-14,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구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나를 힘들게 하는 그가 나의 동료요 친구라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시3편을 다윗의 이야기도 도전이었습니다. 시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대적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5절이 중요합니다. 시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아꼐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절이 하이라이트입니다. 시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이다”. 시27편에 또 나옵니다. 시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5절이 중요합니다. 시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결정적인 것이 94편입니다. 시94:1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제가 사는 삶의 한복판에서 묵상이 주는 은혜가 저를 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말씀을 통해 힘을 얻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으며 안 풀리는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묵상은 삶의 모든 분야로 확대됩니다. 여러분, 자연을 보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과 들, 꽃과 나무만 봅니다. 그런데 묵상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통해 나를 봅니다. 자연을 묵상하는 법을 볼까요?
자연 --- 하나님 ---- 나
시편은 묵상의 눈으로 자연을 본 말씀으로 가득찼습니다. 자, 바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더니 그냥 바위가 아니었습니다. 견고한 하나님, 나를 숨겨주시는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바위에 숨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18:2, “여호아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산성이시로다”가 나옵니다. 바위를 묵상해서 나온 것입니다. 자, 꽃을 보았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래서 아4:7,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가 나옵니다. 묵상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더니 하나님이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도다”. 묵상으로 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들려주는 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자연이 들려주는 말(척 로퍼)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관용하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여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묵상이 필요합니다. 제자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계속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묵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묵상을 통해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제자의 삶(7) 시1:1-8 2014.2.16(일)
제자의 뿌리, 묵상하라
화단(사진)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를 안짓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시1:2, “오직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눅18:11,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마3:10,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시1:2, “오직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시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렘15:16,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내 영혼, 주 안에서 참 기쁘리”.
묵상은 우리 영적 생활의 모든 부분에 필요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
구이고, “묵상 없이 성경읽으면 은혜가 없고 성경읽지 않고 묵상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묵상 없이 기도하는 것은 뿌리없는 나무요, 기도 없이 묵상하는 것은 열매없는 나무다.”
설교
묵상은 영혼의 샘에서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최고로 좋은 영적 습관이 묵상입니다.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독서하는 습관이 더 중요하다”(빌 게이츠)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묵상하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그림).
창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풀리지 않는 환경에 문제를 두었기 때문이다”.
감기
시41:3“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오해
시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31: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시55:12-14,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구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시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아꼐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이다”.
시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시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시94:1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자연
자연 --- 하나님 ---- 나
시18:2, “여호아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산성이시로다”
아4:7,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도다”.
자연이 들려주는 말(척 로퍼)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관용하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여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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