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윤재목사

제자의 삶(6) 눅9:28-36 2014.2.9(일)

제자의 삶(6) 9:28-36 2014.2.9()

 

제자의 소원, 높은 산에 오르라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저도 영화를 좋아하는 데 이번 설날 즈음에 우연히 T.V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워낙 좋은 영화라 오래 기억하고 있었는 데 다시 보니까 감동이 새로웠습니다. 이 영화는 독일 나찌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무렵, 오스트리아의 해군 대령의 집에서 가정교사 마리아와 대령, 그리고 자녀들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뮤지컬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번에 저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이 대령과 마리아, 그리고 7자녀가 나찌의 검은 손을 떠나 자유를 찾아 알프스산을 넘는 장면입니다. 자기 조국을 사랑하여 에델바이스를 부르는 장면도 감동적이었지만 7사람이 자유를 찾아 높은 산을 넘는 모습은 큰 감동이었습니다. 더 좋았던 것은 그때 들려온 노래 높은 산에 오르라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한번 옛날 추억에 잠겨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실까요?(영화)

 

어떻습니까? 노래가 들려오셨나요? “모든 산을 오르며 높고 낮은 곳을 헤매고 여러 길을 걸어도 알수 있어요. 모든 산을 오르며 여러 강줄기를 따라 무지개를 쫓아요 너의 꿈을 찾을 때까지”. 원래 이 노래는 마리아가 대령의 집에서 나와 수녀원에 돌아온 후 대령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알게 된 수녀원 원장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불러 준 노래입니다. “너의 사랑이 필요한 곳은 네가 사는 모든 삶 속에 있어 네가 살아가는 동안 모든 산을 오르며 여러 강줄기를 따라 무지개를 쫓아요. 너의 꿈을 찾을 때까지”.

 

이 노래는 비단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와 트랩대령의 사랑을 실현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을 생각하게 하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오를 수 있는 높은 산을 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골짜기에 있는 한 우리의 사랑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무지개를 쫓아가야 합니다. 구름밑에 있는 한 우리는 무지개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의 꿈을 찾아야 합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만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전에 산악인 고미영씨가 히말라야의 높은 봉우리를 올라갔다가 실족해서 사망했습니다. 8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가 히말라야에 14개가 있는데 그중 열한 번째에 올라갔다가 결국 6천 미터 지점에서 추락해서 정상점을 바라보고 죽었습니다. 이분이 그곳에 가기 전에 TV에 나와서 내가 148천 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봉우리를 다 올라간 다음에 한국 여성의 기개를 만천하에 보이겠다라고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뉴스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 산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저렇게 목숨까지 바칠까?” 그 뒤에 또 한 분이 히말라야에 도전했습니다. 오은선 씨인데 그분이 히말라야를 올라가기 전에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산을 좋아합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산이 그리워서 갑니다”. 사람들은 왜 그 위험한 산을 그리워 할까요? 사람이 산에 오르는 것은 단지 건강때문일까요? 사람이 산에 오르는 것은 건강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대로 그것은 인간의 상승 본능때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적 본성, 하나님처럼 거룩해지고 싶은 본성, 높이 계신 하나님에 대한 열망, 그 거룩에의 본성 때문에 사람들은 더 높이 높이 올라가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높은 산에 오릅시다

그래서 오늘도 그 산을 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들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떤 산에 올랐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보통 변화산이라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에는 그런 산이 없습니다. 변화산은 예수님이 변화된 산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지만 고유명사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제 올라갔었을 변화산에는 두 개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헬몬산이고 또 하나는 다볼산입니다. 헬몬산은 2814미터,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이스라엘 최고의 산입니다(그림).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할 때 예수님이 올라가신 산은 다볼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그림). 다볼산은 이스라엘 중앙 이스르엘 평야 지역에 우뚝 솟은 이 산은 해발 558미터로 높기는 헬몬산보다 못하지만 지형적 특성상 굉장히 높아 보이고 평소에도 구름이 많이 내리는 등 성경의 분위기와 일치합니다. 교회역사는 이곳을 변화산이라고 보고 실제 초대교회때부터 이곳에 변화산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그림).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이 산에 올라가셨을까요? 성경에는 산에 오르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려고 산에 올라갓습니다. 모리아산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올라갔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아들만 바치려고 했다면 왜 굳이 그 높은 산에까지 올라가야 합니까? 그 산에서 하나님 만나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여호아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시내산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단지 십계명만 받으려고 했다면 어디서 받든지 무슨 상관입니까? 성경을 보면 모세가 8번 시내산에 올라갑니다. 왜 모세는 2285미터의 높은 산을 8번이나 올라갑니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싸우기 위해 갈멜산 정상까지 올라갔습니다. 바알만 이기면 된다면 골짜기에서는 안됩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갈멜산 정상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악을 이기시는 승리의 하나님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높은 데 있습니다. 이사야2:3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믿었던 하나님은 거록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높은 산에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산의 하나님입니다. 율법도 여호아의 말씀도 높은 산에서 나옵니다. 높은 산의 이미지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미지와 닮았습니다.

 

높다는 것은 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십니다. 높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살고 우리는 순간을 삽니다. 높다는 것은 오르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입니다. 가수 이문세의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런 날은 안 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세상을 다 알고 하나님도 다 아는 날은 오지 않습니다. 산은 높습니다. 하나님이 높은 산에 계신다는 말은 그래도 우리가 산에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높다는 것은 험하다는 것입니다. 험하지만 그래도 올라야 합니다. 인생도 성공도 힘들게 올라야 이루어집니다. 최근 추신수 선수 이야기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추신수가 미국에 간 것은 26, 재능은 있지만,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고, 팔꿈치도 수술해서 안 좋았답니다. 2군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데 처음에 받은 돈은 100만원 수준이라 네 식구 살기도 힘들었습니다. 갈 데가 없어 같은 팀의 세 선수가 함께 월세를 살았습니다. 가족들이 너무 고생한다고 생각한 추신수가 그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자. 이젠 힘들 것 같아." 그때 아내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랑 애들 신경 쓰지 말고, 여기서 당신이 할 것을 하세요. 당신이 처음 가졌던 꿈을 이루세요. 여기에 꿈을 이루려고 온 거잖아요? 당신에게 방해된다면, 우리는 한국 가면 되니까. 당신은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이때 아내는 건강도 안 좋은 상태였고 한쪽 눈이 안좋아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남편의 꿈을 지지했고 그 꿈을 이룰 것이라 강력하게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추신수가 힘든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5시간, 6시간씩 피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험하고 높은 산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연봉 1,370,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매주 3억원씩을 번 셈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올라가는 큰 산은 없습니다. 험해도 올라야 하고 험하기 때문에 올라야 합니다. 찬송가 491장과 같습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내 주여 내 발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동안 인생도 신앙도 싸우며 힘들게 오르겠습니까? 주님의 인도를 믿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겠습니까? 험해도 오르고 험하기 때문에 오르겠습니까?

 

높은 산에서 예수님 만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입니다. 29-31절을 볼까요? 9:29-31,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베드로와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예수님이 변화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희어 졌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깜깜해 지면서 소리가 들립니다. 35, 9:35, “아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릴리에서 계속 같이 다녔습니다. 바닷가에서 식사도 같이 했고 산에서 말씀도 들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도 고쳤고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도 먹였습니다. 그리고 변화산도 예수님과 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와 보니 전혀 다른 분입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이야기해서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 올라보니 예수님은 전혀 다른 분이었습니다. 하늘의 빛이 임하자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변화되었습니다.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을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셋이 같이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둘 다 죽지 않고 승천하지 않았습니까? 그나마도 오래 전에 살았던 전설적인 성경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 영광중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런 모습이었을까요?(그림).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그린 예수님의 변모라는 그림입니다. 로마 바티칸 성당에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세 제자는 죽은 듯 누어 있고 예수님 좌우에는 모세가 엘리야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광가운데 하늘로 승천하고 있습니다(그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세 제자가 이런 광경을 보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산 밑에는 9명의 제자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려 실갱이 하고 있습니다. 산위와 산아래, 차이는 산에 올랐느냐 오르지 않고 산밑에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산에 오른 세 제자만 보았습니다. 나머지 제자는 아직도 산밑에서 먹고 사는 일상의 문제와 실갱이 하면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중 누구도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땅만 바라보고 귀신들린 아이와 아버지만 바라봅니다. 또 고칠 능력도 없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산에 오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산에 오르기는 힘들고 어렵지만 신앙은 산에 올라야 합니다. 산에 오르는 변화된 예수님을 봅니다.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예수님 바라보아야 승리합니다.

 

언젠가 제가 아주 고등학교때 학교 다니다가 주말에 집에 내려가면 정미소에 가서 아버님 일을 거들었습니다. 정미소는 쌀, 보리, , 고춧가루 빵구기 때문에 냄새도 나고 먼지도 많습니다. 어느날 일하다가 눈을 들어보니 정미소가 뿌연 먼지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햇빛이 창문 사이로 뾰족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 정미소에 참 먼지가 많네생각했습니다. 그 날따라 햇빛이 신기해서 햇빛이 비추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밖에 태양이 밖에서 아주 환하게 빛났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이런 묵상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가? 먼저 먼지를 통해 압니다. 처음부터 태양을 봐서 태양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먼지가 시작입니다. 그러면 먼지는 어떻게 아는가? 창틈으로 비취는 햇빛을 통해 압니다. 햇빛이 비취지 않으면 먼지의 존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전부가 아닙니다. 창을 열고 태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태양을 보는 순서가 이렇습니다. “먼지-햇빛-태양”.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보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안에 있는 먼지, 우리 속에 있는 문제, 우리 곁에 있는 죄를 통해 봅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햇빛을 통해 압니다. 설교를 통해, 성경공부를 통해 압니다. 그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태양을 보기 위한 과정입니다. 신앙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훗날 제가 영성신학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오래전에 살았던 우리 영성의 사람들도 이런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음을 알았습니다.

 

먼지 햇빛 태양

문제 은혜 하나님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먼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죄를 봅니다. 우리의 실상이 먼지요 우리의 존재가 죄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햇빛을 비췹니다. 조명입니다. 말씀의 빛, 성령의 도움, 은혜의 빛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빛자체이신 태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태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광채입니다. 그에게 나아가 그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붙잡아야 할 최종의 목표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지금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매우 약합니다. 지금 나이가 95세인데 전 세계의 기독교인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전 미국인 사랑하는 위인 1위로 57회나 뽑혔습니다. 한 기자가 빌리 그레이엄에서 말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 당신은 정말 위대한 생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때 빌리 그레이엄이 대답했습니다. “전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위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가진 위대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변화산에 오른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앞에 놀라서 모두 자빠졌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감격해서 말합니다. 33절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겠습니다”. 여기서 초막을 짓는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집을 짓고 거기 살겠다는 것입니다. 왜 초막짓는 것이 중요합니까?

 

세 제자가 변화산에 올라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본 것은 정말 잘했습니다. 영광의 주님을 본 것은 그들에게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어쩌다 한번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있고 은혜안에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한 두 번 체험했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머물러야 합니다. 분수옆에 있으면 물보라가 옷을 적시듯, 향나무 아래 있으면 향냄새가 몸에 배이듯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예수님을 닮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에 머물렀던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생기고 바나바가 예루살렘교회의 파송을 받고 와서 한 첫 번째 메시지가 이것이었습니다.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다같이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지만 기뻐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은혜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머물러 있으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나와도 자주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오래 예수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씀을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못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은혜에 머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믿음에 머물러야 합니다. 은혜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초막을 짓고 거기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에 머물러야 할까요? 31절을 보면 별세라는 말이 나옵니다. 9: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여기서 별세는 헬라어오 엑소돈입니다. 이 말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입니다. 변화산에 영광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세 가지로 계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을 분, 다시 부활하실 분, 그리고 하늘에 올라 세상을 다스릴 분, 이 메시지가 별세란 말 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별세의 메시지를 한 구절로 정리한 것이 갈2:20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데 이 말씀은 바울이 예수님을 깊히 묵상하다 발견한 복음의 진리입니다. 묵상은 우리가 예수님안에 머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묵상은 농부가 수원지에 가서 물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물을 자기 논에 대는 것입니다. 묵상은 광부가 금광에 가서 금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금을 캐서 자기 바구니에 넣는 것입니다. 청교도 목회자 토마스 왓슨이 묵상의 산에 오르라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설교가 광맥에 대해 듣는 것이라면 성경공부가 광맥을 캐는 것이라면 묵상은 광맥에서 금을 캐 내 소유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들어도 은혜가 없는 이유는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설교는 금광이 어디 있는가 가르쳐 주고 성경공부는 곡괭이로 금을 파는 법을 가르쳐 주지만 그 금을 담아 집으로 가게 하는 것이 묵상입니다. 묵상은 예수님의 생수를 내 심령에 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듣는 것이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연구하는 것이 성경공부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게 하는 것이 묵상입니다. , 보십시오. 2:20은 이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예수님 - 바울의 묵상 - 2:20

 

그러면 바울이 예수님을 묵상하다가 받은 갈2:20은 어떤 내용입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어떻게 자기 삶에 묵상해서 그 예수님안에 구체적으로 머물렀는가를 보여 줍니다. 먼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예수님이 바울을 위해 죽고 바울도 예수님안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나의 현재적 신분을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초대교회 한 수도사가 자주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괜히 속상하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한번은 수도원 원장이 말했습니다. “내일 공동묘지에 가서 소리치고 와라. 이 나쁜 놈들아,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음 날 원장이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더냐?” “아무 말도 안던데요”. 원장이 말했습니다.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삶이 되려면 거기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통해 죽었다는 말씀을 설교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 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언제나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 머뭅니다. 그래야 죽은 자로 삽니다.

 

다음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두 번째는 내 안에 예수님이 산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육체적으로 사는 것은 나지만 내 안에 실제 사시는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이를 위해 내 안에 계신 주님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늘 살아계신 주님이 내 안에 있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묵상의 초막이 필요합니다. 자기 마음에 보초를 세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나 안 계시나 늘 간수해야 합니다. “주 떠나 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기쁘나 슬프나 늘 계시옵소서”.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하고 성경읽으며 내 안에 계신 주님과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낮에 길을 걸을 때나 일을 할 때 계속 물어야 합니다. “주님, 지금 내 안에 계시죠?” 그리고 잘 때 한번 더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나와 함께 계셨죠?” 이것이 머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 사는 것이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면 이제부터 나의 삶의 목표는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와 목적을 예수님께 두겠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살겠습니까? 그렇다면 거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나오고 영성은 말씀에 머물러야 나옵니다. 은혜가 임하면 구원에 이르고 은혜에 머물면 거룩에 이릅니다. 받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듣고 본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머물러야 합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 음성을 들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머문 산이 제자들이 올라갈 가장 높은 산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새해 높은 산에 오르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모든 길을 따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강줄기를 따라 무지개를 따라가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리고 꿈을 찾을 때까지 오르고 또 오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오를 가장 큰 산은 영광의 예수님을 만나는 산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 높은 산에 올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영광의 주님을 뵈옵고 그 음성을 듣고 그 은혜안에 머물겠습니까? 그 축복을 누리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제자의 삶(6) 9:28-36 2014.2.9()

 

제자의 소원, 높은 산에 오르라

 

사운드 오브 뮤직”(영화)

 

너의 사랑이 필요한 곳은 네가 사는 모든 삶 속에 있어 네가 살아가는 동안 모든 산을 오르며 여러 강줄기를 따라 무지개를 쫓아요. 너의 꿈을 찾을 때까지”.

 

우리도 높은 산에 오릅시다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헬몬산(그림)

 

다볼산(그림)

 

2:3,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찬송가 4913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내 주여 내 발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 만납니다.

9:29-31,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9:35, “아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라파엘(그림)

 

예수님(그림)

 

먼지 햇빛 태양

문제 은혜 하나님

 

우리가 예수님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9: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묵상은 우리가 예수님안에 머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토마스 왓슨, “설교가 광맥에 대해 듣는 것이라면 성경공부가 광맥을 캐는 것이라면 묵상은 광맥에서 금을 캐 내 소유로 삼는 것이다”. (묵상의 산에 오르라)

 

예수님 - 바울의 묵상 - 2:20

 

2:20 묵상

(1) 나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었다.

 

찬송가 4071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 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2)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신다.

 

찬송가 4463

주 떠나 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기쁘나 슬프나 늘 계시옵소서”.

 

(3) 이제부터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