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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삶(12) 롬8:31-39 2014.3.23(일)

제자의 삶(12) 8:31-39 2014.3.23()

 

제자의 전투, 맞서 싸우라. 이긴다

새 봄이 왔습니다. 제가 새벽기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발걸음이 멈춰졌습니다. 노란 산수유였습니다. 아직도 쌀쌀한 데 노랗게 핀 꽃을 보면서 자연의 신비를 느꼈습니다(사진). 꽃 한송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머지 않아 우리 교회 화단에서 많은 작은 꽃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할미꽃, 달래, 도라지 꽃, 이 꽃들은 도대체 어떻게 핍니까? 겨울의 긴 추위와 싸우고 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 한 송이가 위대합니다.

 

우리 영혼도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에 피는 꽃도 그냥 피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긴 겨울과 싸워 이기야 핍니다. 영국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날 이후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후 땅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보고 싶어 땅에 내려왔습니다. 한참을 길을 가다보니 한 술주정꾼이 술을 마시고 고래 고래 소리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실로암 못가에서 눈을 치료한 장님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되었소?". 맹인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저를 고쳐주실 때 살 것만 같았지요.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니 서서히 고민들이 쌓이더군요. 그래서 가끔 술 한 한잔 하다보니 이렇게 술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예수님이 또 길을 나섰습니다. 바닷가에 갔더니 한 불량자가 선창가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람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바디메오. 형제는 내가 눈을 고쳐준 바디매오가 아니요? 어떻게 이렇게 대낮에 싸우고 있소?” 바디매오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전에 저를 고쳐주셨을 때 정말 감사했죠.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병신이라고 놀리고 무시해서 제가 화가 나서 싸우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남의 이야기가 같지 않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고쳐주실 때는 그 은혜에 감사하여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은혜를 잊고 이제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교인들의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한 때는 구원받고 너무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눈물이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성령받고 방언도 하고 펄펄 났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쁘게 살아 하나님도 잊고 삽니다. 옛날에 나난 청년회장이었다, 나는 4, 5대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믿음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보면 싸우지 않고 믿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받았는 데 싸우지는 않고 있습니다. 영혼의 봄이 긴 겨울과의 싸움을 통해 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받았으면 싸워야 합니다. 좋은 은혜는 잘 싸우는 은혜입니다. 여러분도 이 봄에 은혜로 싸워 아름다운 승리의 꽃을 피우기 원합니까?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은 싸움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싸움의 시작입니다.

로마서 8장은 위대한 승리를 선포합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성경의 보석과 같다면 롬8장은 그 속에 있는 다이아몬드입니다. 8장이 위대한 것은 우리의 신앙의 최종적인 승리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37절을 읽어보겠습니까?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의 미래에 일어날 승리를 이토록 장엄하게 선포한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승리의 약속은 아무런 전제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겠지만 그 승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31절에서 36절까지 나타난 위험과 도전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어떤 도전일까요? 31,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대적의 도전이 있습니다. 33, “누가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오”. 고발이 있습니다. 대적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고발은 법적인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35절입니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란, 곤고, 기근, 적신, 위험 그리고 칼,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밖에서 오는 것도 있고 안에서 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37절에서 넉넉히 이기느라는 약속은 31절부터 시작한 대적, 고발, 환란, 곤고, 기근, 적신, 위험 그리고 칼을 이겨내야 합니다. 승리를 위해 우리는 이런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37, “넉넉히 이기느니라가 됩니다.

 

두 주전에 저는 로마서6장에서 8장까지의 구조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렇습니다.

 

6-8장의 구조

678

우리가 죽었다 아직도 내안에 죄가 있다 영으로 죽이라

 

6장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6:1-4을 볼까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6장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을 때 우리도 그 죽음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나도 죽고 예수님이 살 때 나도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최고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교회에서 예식으로 고백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단순히 교인되기 위한 관문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내가 물속에 들어갈 때 죽었고 내가 물속에서 나올 때 살았습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례받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에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7장입니다. 19-20입니다. 7:19-20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여전히 나에게 또 죄가 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내 안에 있습니다. ”6장에서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7장에는 내속에 아직도 죄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6장에서 죄에 죽었다는 말은 우리 속에 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지배로 부터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죄를 다스리던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어 생명의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피를 대가로 우리를 사서 새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14절입니다.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법 아래, ”은혜 아래“. 이 말은 지배체계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음으로 누구의 지배를 받게 되었느냐의 문제입니다. 법아래 지배받던 우리가 은혜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던 우리가 예수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6) (1) 주인이 바뀌었다(마귀에서 하나님으로)

(2) 지배권이 바뀌었다(죄에서 예수님으로)

(3) 소속이 바뀌었다(흑암의 권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아

들의 자녀로)

(4) 그러나 우리 안에 죄가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죄는 여전히 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그래서 제발 이 죄가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오호아, 나는 곤고한 자라 탄식하며 삽니다. 이것이 7장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6-8장의 구조

678

우리가 죽었다 아직도 내안에 죄가 있다 넉넉히 이기리라

예수님 은혜 + 싸움 = 최후승리

성령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예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의 지배권이 바뀌고 소유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내 안에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해아 할 일은 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은 최후의 승리입니다. 다시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이기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 계셔 우리의 싸움을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하시니까 우리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싸우되 우리를 통해 싸우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 우리 곁에서 우리의 싸움을 도우십니다. 어떤 점에서 영적 싸움의 주인은 성령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싸우고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어떻습니까? 그래서 이 표를 항상 기억하겠습니까?

은혜 + 싸움 = 최후승리

성령님

 

은혜로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영적 싸움으로 죄를 이겨 최후 승리하시겠습니까?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믿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그 다음 우리가 할 일이 죄와 맞서 싸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죄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죄와 맞서 싸워야 하는 일은 신자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김집사는 믿음이 좋은 남신도입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회사 직원이기도 합니다. 김집사의 문제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일어납니다.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회식을 하는 데 새로온 사장이 술을 좋아해서 자주 술집으로 갑니다. 김집사는 정말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회식자리에서 술대신 콜라를 마시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술을 마시면서 동료들과 친해지고 싶은 데 늘 술자리에서는 동료들과 물과 기름입니다. 술마신 후에는 2차도 갑니다. 노래방도 가고 때로는 더한 데도 갑니다. 그때마다 갈등이 생깁니다. 김집사는 지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박집사는 교회 여집사입니다. 무슨 일로 최근에 목장 식구와 싸웠습니다. 사소한 말다툼이었는 데 자녀들 문제여서 기분이 상했습니다. 평소에도 그 집사님이 잘난 척을 해서 기분이 나빳는 데 자기 아들이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해서 자기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내가 먼저 사과해야지, 사과해야지했지만 못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집사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영적 싸움앞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싸워야 합니다. 사장과 싸우고 목장 식구와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와 싸우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제가 교인들을 만나면서 신자가 당면하는 몇가지 싸움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싸움입니다.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고 내용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크게 우리가 싸워야 할 다섯 가지 싸움이 있습니다. 염려와의 싸움, 조급함과의 싸움, 탐심과의 싸움, 낙심과의 싸움, 그리고 성적인 욕망과의 싸움니다.

 

1) 염려와의 싸움입니다.

염려는 주로 내 생각대로 안될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나온 마음입니다. 우리는 별 염려를 다 하고 삽니다. 나중에 보면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지나치게 염려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염려한다고 신앙인의 염려가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예수님은 염려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염려의 근본 이유는 생활때문이 아니라 믿음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16:8절입니다. “내가 여호아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라리로다”.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아가 내 옆에 계시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벧전5:7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맡기라는 말을 영어성경은 “cast”로 번역했습니다. cast는 던지는 것입니다. 염려는 믿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던져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염려의 깊은 배후에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후 3세기, 이집트의 안토니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세상을 끊고 사막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염려가 많았습니다. 남은 가족에 대한 염려, 재산에 대한 염려, 장래에 대한 염려, 무엇보다 신앙적인 염려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어떤 사람은 젊어서 죽고 어떤 사람은 늙을 때 까지 살다가 죽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응답했습니다. “안토니야, 그런 염려는 하지 말아라. 그것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을 내가 안다고 유익이 되지 않으며 알 수도 없다. 너는 네 영혼이나 걱정해라”.

 

염려의 배후에 교만이 있습니다. 교만이란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식도 자기 마음대로 키우겠고, 사업도 내 마음대로 경영하고, 인생도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될까봐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의 배후에 불신앙과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없습니다. C. S. Lewis<순전한 기독교>에서 말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물들과 사람들을 언제나 경멸하고 낮추어본다. 항상 아래만 보고 살기 때문에 위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가 들어올 때 누구나 다 염려할 수 있어. 괜찮아그러지 말고 , 또 염려가 들어왔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염려야, 물러가라. 불신앙아 물러가라.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겠다”. 소리쳐야 합니다.

 

2) 조급함과 싸워야 합니다.

염려가 내 마음대로 안될까 해서 생기는 마음이라면 조급함은 내가 생각하는 때에 안이루어질까봐 해서 생기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조급함도 불신앙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다고 믿습니까? 37:23, “여호아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하나님에게는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길을 기뻐하십니다.

 

영국에 가면 에딘버러에 Greyfriars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청교도들이 영국국교에 의해 13,000명이 순교했습니다. 당시 영국 국교는 청교도들을 탄압해서 지붕없는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었지만 도망가면 배교가 되기 때문에 30여년간 청교도들은 이 감옥에서 눈비를 맞으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다가 모두 순교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자세히 보니까 감옥벽에 이런 저런 글씨들이 보입니다. 제일 많은 것이 patience, “인내였습니다. 왜 청교도들에게는 고난의 시대에 인내가 필요했을까요? 인내는 어쩔 수 없이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쁘게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다“. 그래서 patience, “인내라고 썻습니다. 과연 1689년 명예혁명과 더불어 청교도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뿌리에서 미국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한국교회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리쳐드 포스터가 말했습니다. “조급증은 마귀의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마귀다”. 마귀는 우리 마음에 항상 조급한 마음을 줍니다. 조급증은 급한 사람의 특징이 아니라 믿음없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조급증이 오면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못 기다리는 불신앙의 조급증아. 물러가라.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때를 믿고 잠잠하리라”.

3) 탐심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또 하나가 탐심입니다. 탐심은 성경이 말한 죄의 목록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도 나옵니다.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3:5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사도 바울은 여러 죄들을 나열하면서 유독 탐심만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탐심이 우상숭배인지 몰랐습니다. 탐심은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탐심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탐욕과 하나님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탐심은 물질을 하나님으로 섬기기 때문에 우상입니다. 그래서 탐심이 오면 맞서야 합니다. “탐심아, 물러가라. 나에게 물질은 필요한 존재이지 섬길 존재가 아니다. 내가 섬길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 내 안에 우상아 물러가라, 나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리라”.

4) 낙심과 싸워야 합니다.

낙심과 싸워야 합니다. 염려가 내 마음대로 알될 것 같아서 생기는 마음이라면 낙심은 내 마음대로 안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입니다. 염려는 미래 일로 인해 생기고 낙심은 과거 일로 인해 생깁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본질은 같습니다. 불신앙과 교만이 그 속에 있습니다. 과거를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낙심이 생기고 미래를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염려가 생깁니다. 낙심이 계속되면 우울증이 됩니다. 현대인이 가장 많이 먹는 약이 우울증약입니다. 우울중은 염려와 낙심이 계속될 때 생기는 병입니다.

 

따라서 우울증의 원인도 불신앙입니다. 우울증의 치료는 믿음입니다. 우울증 가진 분중에 훌륭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영국의 유명한 부흥사 챨스 스펄전도 상당한 우울증으로 시달렸다고 합니다. 루터는 말년에 깊은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18세기 미국의 유명한 인디언 선교사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아예 우울증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도 젊은 나이에 우울증을고 세상을 떳고 제들 셋도 30대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우울증을 이겨냈습니다. 요즘처럼 약을 먹고 이겨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누구나 우울증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울증은 싸워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우울증치료의 최고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5) 성적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싸워야 할 가장 큰 것이 성적 욕구입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벧전2:11,“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지금 세상의 가장 큰 질병은 성적 욕망의 질병입니다. 성경은 정당한 성적 욕구는 인정하지만 그 이상의 욕망은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5:19절에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정결치 않고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집트 사막교부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수도자가 사막에서 기도하고 있는 데 행실이 나쁜 어떤 여자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막에서 기도하는 수도자를 유혹해 보겠소. 만일 유혹한다면 무엇을 주겠소?”. 사람들은 그에게 큰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날 밤에 그녀는 길을 잃은 것처럼 해서 수도자의 방을 찾았습니다. 수도자는 여인을 방으로 들어오게 하고, 자신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여인이 유혹했습니다. “수도자님, 여기에 있으면 들짐승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아요. 무서워요”.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귀가 수도자의 마음에 불화살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주여, 나를 도우소서기도하면서 등불을 켰습니다. 밖에서 안에서 유혹이 계속되자 그는 내가 지옥에 갈망정 죄를 지을 수 없다며 자기 손가락 하나를 불에 대었습니다. 그는 욕망이 너무 뜨거워 자기 손이 데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침까지 열 손가락을 모두 불에 데었습니다. 그 다음 아침, 그는 여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불에 탄 열 손가락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인은 그 손가락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주 옛날 이야기지만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목회자가, 교인이 이런 정도의 믿음을 세상에 보여주면 세상은 교회를, 믿는 자를 두려워 할 것입니다. 성적 욕구는 가정의 울타리안에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합니다. 그래서 늘 싸워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죄와 맞서서 싸우며 살겠습니까? 다시 롬6:14절을 보십시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은혜가 값싼 은혜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싸워 이기는 은헤가 가장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싸움에서 이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싸움은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다섯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31절입니다. 8: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죄는 우리를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32절입니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습니다. 아들까지 버리신 분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더 아끼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33,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했으면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회사원을 뽑고 월급 안 줄 사장님이 있습니까? 장학생을 뽑아놓고 장학금 안주는 교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선택했다면 책임도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34,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이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우리가 믿는 분은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죽고 없어진 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다섯째, 35,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무엇보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내 이길 것입니다. 그래서 37, 8:37,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넉넉히 이긴다는 이 말은 헬라어로 휘페르니코멘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정복자 이상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승리할 수 있는가 하면 정복자 이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은혜로 구원받으누 여러분, 은혜받았으니 이제 싸우겠습니까? 염려와 조급함과 탐심과 낙심과 성적 욕망과 죄와 싸우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싸움을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까? 그 결과 여러분의 싸움은 반드시 이기게 될 것을 믿습니까? 우리의 싸움은 처음부터 이길 싸움이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34:19절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우리의 일생 다 가도록 성령으로 싸워 최후 승리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제자의 삶(12) 8:31-39 2014.3.23()

 

제자의 싸움, 맞서라. 반드시 이긴다

산수유(사진).

 

구원은 싸움의 시작입니다.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6-8장의 구조

678

우리가 죽었다 아직도 내안에 죄가 있다 영으로 죽이라

 

6: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7:19-20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죄에 대하여 죽었다(6) (1) 주인이 바뀌었다(마귀에서 하나님으로)

(2) 지배권이 바뀌었다(죄에서 예수님으로)

(3) 소속이 바뀌었다(흑암의 권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아

들의 자녀로)

(4) 그러나 우리 안에 죄가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6-8장의 구조

678

우리가 죽었다 아직도 내안에 죄가 있다 넉넉히 이기리라

예수님 은혜 + 싸움 = 최후승리

성령님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은혜 + 싸움 = 최후승리

성령님

 

우리는 죄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1) 염려와의 싸움.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16:8, “내가 여호아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라리로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C. S. Lewis, “교만한 사람은 사물들과 사람들을 언제나 경멸하고 낮추어본다. 항상 아래만 보고 살기 때문에 위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다.”

 

2) 조급함과 싸워야 합니다.

37:23, “여호아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3) 탐심과 싸워야 합니다.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4) 낙심과 싸워야 합니다.

 

5) 성적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벧전2:11,“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는 반드시 싸움에서 이깁니다.

8: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이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8:37,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