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삶(9) 요15:1-3, 시139:23-24 2014.3.2(일)
제자의 점검, 자신을 성찰하라
3월입니다. 3월은 영어로 “마취”, 군대가 행진하는 것처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달입니다. 3월은 희망의 달,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달입니다. 2월에서 3월로 넘어가는 이때 좋은 시가 있습니다. 박목월이 쓴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입니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스러운 미나리냄새가 난다. 2월에서 3월로 넘어가는 골목길에는 오래 잊었던 옛 친구를 만날 것만 같다. 2월에서 3월로 넘어가는 바람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들려오고 겨드랑이에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돋아날 것만 같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려분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높은 하늘을 날고 싶습니까? 봄은 행진의 계절이요 높이 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멀리 가려면 잘 준비해야 합니다. 며칠전에도 비행기 한대가 충분한 준비없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나는 멀리 가기 위해 충분히 준비하는가? 나는 행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가? 자기를 점검하는 것은 멀리 가는 사람의 필수적인 준비사항입니다. 지난 주에 어느 가정에 심방했는 데 실내에 화사한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권사님이 매일 애지 중지 키우다가 목사님 심방 오신날 피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했답니다. 꽃 한송이, 화초 하나, 그냥 되는 것이 없습니다.
가끔 교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연히 병원에 검진받으러 갔는 데 암이 발견되어 지금 치료받고 좋아지고 있다”. 그때 검진 받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암세포가 없는 사람이 없답니다. 조기진단이 최선의 대책입니다. 영적점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점검은 조기진단과 같습니다. 가능한한 빨리 그리고 지속적으로 진단받아야 큰 병이 안 생깁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이 영적 점검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2절을 보실까요? 요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여기서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다른 가지의 영양분을 뺏는 잔 가지입니다. 포도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넝쿨이기 때문에 거기에 많은 가지들이 생겨납니다. 줄기는 항상 있지만 가지는 해마다 돋아납니다. 그런데 모든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지도 적당히 있어야지 너무 많이 있으면 영양분을 분산시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봄이 되면 부지런히 가지를 쳐줍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은 “제해 버린다” 고 말합니다. 성경 사18:5절에도 나옵니다. “추수하기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 여기에 “퍼진 가지”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포도나무를 잘 아는 성경기자가 쓴 것입니다. 퍼진 가지는 열매에 도움이 되지 않은 잡다한 잔가지입니다. 이 잔가지들을 쳐 주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한 해동안 많은 열매맺기 위해 매일 쓸데없는 잔가지들을 칩니까? 그 잔가지들을 치고 집중해서 매일 주님이 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열매맺기 위해 잔가지들을 쳐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열매맺기 위해 집중의 필요성을 말씀한 것입니다. 뭔가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는 단순해져야 합니다. 가지가 많으면 보기는 좋아도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예수믿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근본적인 차이는 집중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모든 생의 목표가 예수님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다른 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예수믿기 전에는 이것 저것 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믿고 나서는 하나의 목표로 모아져야 합니다. 이것 저것 다 해서는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열매맺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씩 둘씩 정리해야 합니다.
5절 보시겠습니까?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중심이며 핵입니다. 그것 외에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어떤 것이든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중심인 한에서만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데 불필요하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의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의 줄리안입니다. 이 여성은 십자군 전쟁으로 폐허가 된 1342년, 영국 노리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백년전쟁, 페스트병등으로 무너진 세상을 위해 평생 줄리안 교회에서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나로 만족하니?” 줄리안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예수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 하나로 만족하니?”. 이때 줄리안이 엎드려 말했습니다. “예, 주님, 주님 한분으로 만족합니다”. 그때 그가 쓴 시가 “당신으로 족합니다”입니다.
당신으로 저는 족합니다(노리치의 줄리안)
당신의 선함을 따라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소서
저에게는 당신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당신이 아닌 다른 것을
값지다고 생각하고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구한다면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직 당신 안에 있을 때
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초점으로 모든 것을 그 아래 정돈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옆에 나란히 두었던 것들을 예수님 밑으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모든 것은 그 밑으로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순하면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의 눈으로 창구를 단순화시키면 행복해집니다. 단순하면 문제가 풀리고 마음도 행복해집니다.
지난 주에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칭의”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통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믿을 때 우리 자신에게는 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의를 빌려줍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의를 전가시킨다”라고 말합니다. 의가 우리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말입니다. “칭의”가 우리가 예수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것이라면 “성화”는 실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속사람이 달라짐으로써 실제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순간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자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씨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씨가 우리 속에 떨어져 자랍니다. 이것을 “성화”, “거룩”이라 합니다. 그래서 거룩은 자라는 것입니다. 성화는 자랍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생명의 씨가 우리안에 떨어지는 것이고 성화는 그 씨가 자라 우리안에서 예수님의 형상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자라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집중해야 합니다. 자라는 데 불필요한 것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잘 자라는 데 필요한 것만 공급해야 합니다. 잔가지는 쳐줘야 합니다. 썩은 뿌리는 갈아야 합니다. 벌레는 잡아줘야 합니다. 비틀어진 나무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점검이요 성찰입니다.
성경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계2:4-5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령은 에배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면서 그 처음 사랑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살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찰입니다. 고후13:3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니라”. 자기를 돌아보아 계속 자신을 시험하라. 이것이 자기성찰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성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성찰은 자기 약점을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기 성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약점을 아는 것입니다. 약점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평소에 자주 넘어지는 곳이 어딘가를 아는 것입니다. 약점은 우리가 자주 넘어지는 것입니다. 자, 삼손의 경우를 봅시다. 삼손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이 아이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하리이까?”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어려서부터 나실인이 되어 믿음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성문제입니다. 삼손은 다 좋은 데 여자들만 보면 사죽을 못 씁니다. 결국 삼손은 그것 때문에 망했습니다. 삼손이 여자 때문에 망했다고 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점검하고 성찰하지 못해서 결국 망했습니다.
가롯 유다를 보십시오. 가롯유가가 다 나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게 나쁜 사람을 왜 예수님이 제자로 선택했겠습니까? 다 좋은 데 돈에 약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은30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적 야망 때문에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도 망칠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셨더라면 큰 일 날뻔 했습니다. 사울은 질투심 때문에 자신을 망쳤습니다. 압살롬은 자기 여동생 다말을 범한 배다른 형 암논에 대한 평생의 미움 때문에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마가는 인내심이 없어서 선교의 현장에서 도망쳤습니다. 데마는 세상유혹 때문에 바울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자주 넘어지지만 넘어지는 이유는 대개 한 두 가지입니다. 약점때문입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약점을 알아야 하고 그 약점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을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한 시간만 묵상하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주후 4세기 에바그리우스라는 수도자가 인간의 치명적인 일곱가지 죄를 말했습니다. 탐식, 음욕, 욕심, 불만감, 분노, 허영심 그리고 교만입니다. 이 7가지를 놓고 자신을 비교해 보면 압니다. 내가 무엇에 약한지. 무엇 때문에 자주 넘어지는지. 탐식, 음식에 대한 욕심입니다. 먹는 데 돈쓰고 맛있는 것 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 이 사람은 음식을 멀리해야 합니다. 금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음욕, 이성에 대한 욕구입니다. 누구나 이성에 대한 관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관심과 욕구는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제때 제때 결혼해야 합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성이 있는 곳에는 가능한 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처럼 자기를 유혹하는 보디발이 있으면 도망쳐서라도 그 집을 빠져와야야 합니다. 삼손처럼 들릴라에 죽지 않으려면 불레셋에 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유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자신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 사귀었던 이성도 잊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출타도 여행도 부부가 함께 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이 욕심인 사람은 먹음직하고 보압직한 선악과 옆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돈쓰는 재미로 사는 사람은 백화점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돈에 약한 사람은 호주머니에 돈넣고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자주 분노하는 사람은 다툼에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감투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들앞에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곱가지를 어떤 사람은 세 가지 g로 요약했습니다. 첫째가 gold, 돈, 둘째가 girl, 이성, 셋째가 glory, 명예욕. 돈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면 돈 잃고 사람 잃습니다. 돈에 약한 사람이 교회 재정에 관여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안에서는 아예 돈거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성에 약한 사람은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이성과 단둘이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 여자분이 제 방에 들어올 때는 문열어 놓고 들어오십시오. 만일 문닫고 들어오는 여성이 있으면 제가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칠 것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명예욕에 빠집니다. 저에게도 노회장, 총회장에 출마하고 속삭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방의 어느 목사님이 총회장 출마 세 번만에 총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총회장에 당선된지 얼마안되어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너무 총회만 다닌다고 교인들이 불신임한 것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외에도 분노심이 문제입니다. 물론 의로운 분노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분노는 분노입니다. 분노심이 생길 때마다 숨을 한번 크게 쉬고 속으로 수를 세십시오. 10, 20, 30을 세면 가라앉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합니다. 저에게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도 있습니다. 남보다 의롭다는 교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저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늘 조심합니다.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자기 약점을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약점을 날마다 성찰하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결국 같은 실수 때문에 결국 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항상 넘어진 자리가 전환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하는 것은 안된 이야기지만 넘어지는 것을 전환점으로 삼는 사람에게 위기는 기회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물이 전환점입니다. 씨속에 사과나무가 있듯이 우리가 넘어지는 실수속에 전환점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인정한 베드로에게 그것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같은 실수는 가롯 유다도 범했지만 그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 의 실수는 인생의 종착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 실수를 통해 배우느냐 안 배우느냐가 문제입니다. 신앙생활도 언제나 실수할 수 있지만 그 실수를 통해 배우고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좋은 것은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죽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죄를 몰아내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완전히 죽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를 숨기려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숨어 있을 뿐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잠시 안정시켜 평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몇 번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죄를 이긴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죄의 습관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벧전2: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제어한다는 것은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아 있습니다. 다만 통제하고 지배해서 힘을 못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의 습관을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수가 실패가 아니라 실수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실패입니다. 실패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중요한 비결은 “한번 이기면 또 한번 이긴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16세기 영국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말입니다. 처음부터 다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이기면 그 다음에 또 이깁니다. 우선 처음에 한번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이깁니다. 그러면 이기는 습관이 됩니다. 저희 친척 아저씨중의 서울 근교에 땅을 사고 집을 지은 분이 있습니다. 한번 방문했더니 기계로 잔디를 깍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이 목사, 옛날에는 풀뽑는 것이 힘들었는 데 지금은 즐거워” 제가 물었습니다. “왜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매일 기계로 풀을 뽑거든”. 그는 매일 기계로 잔디깍고 있었습니다. 풀도 며칠 안깍고 두면 깍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깍으니까 깍기도 쉽고 깍는 재미거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아, 죄도 매일 죽이면 쉬어지는구나. 매일 한번 이기고 또 이기고, 그러다가 실수하면 또 일어나 이기고, 그러다 보면 이기는 습관이 생기고 그래서 결국 죄를 이기는구나”. 어떻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가끔 같은 죄에 빠지고 또 실수해서 아예 믿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그렇습니다. 다만 세 가지를 기억하면 됩니다. 첫째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써 보십시오. 둘째 한번에 한가지에 도전해서 한번만 이겨보십시오. 셋째 혹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 싸우십시오. 다시 반복하지만 실수는 실패와 다릅니다. 실수는 넘어지는 것이고 실패는 넘어져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을 반복하십시오. 지는 것도 습관이요 이기는 것도 습관입니다. 성화는 거룩의 습관이 만들어 낸 믿음의 열매입니다.
자기를 성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룩에 이르는 자기 성찰을 어떻게 합니까?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멘토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멘토입니다. 좋은 멘토는 좋은 스승입니다. “멘토”는 그리스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왕이 트로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자기 어린 아들을 맡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왕의 아들을 지도하고 보살펴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멘토”였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성찰할 때 꼭 필요한 사람이 멘토입니다. 자신을 삶의 경험과 지혜로 조언하고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멘토와 비슷한 것으로 롤모델이 있습니다. 그런데 멘토와 롤모델은 다릅니다. 롤모델은 다만 내가 모방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내 쪽에서만 흠모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멘토는 서로 만나서 돕고 도움받습니다. 상호적입니다. 저에게도 멘토가 있습니다. 한 분은 지방에 있고 다른 한 분은 서울에 있는 목사님입니다. 저는 정기적으로 그 분들에게 제 상황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합니다. 멘토를 대할 때 가질 기본적인 태도는 부끄러워 하거나 숨겨서는 안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실수한 것, 잘못한 것, 심지어 죄지은 것까지 내 놓습니다. 그러면 멘토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삶의 경험과 지혜로 조언해 줍니다. 가끔 혼나기도 합니다. 대부분 격려를 받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성찰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멘토가 있습니까?
2) 소그룹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소그룹입니다. 셀, 구역, 목장이 그래서 생겼습니다. 목장의 시작은 18세기 영국의 요한 웨슬리입니다. 웨슬리가 전도해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을 웨슬리는 둘씩 넷씩 소그룹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것을 그는 “밴드”란 불렀습니다. 그 밴드에서 웨슬리는 매일 밤, 자신이 했던 일을 서로 고백하게 했습니다. 하루동안 내가 지은 죄,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신 일, 내가 발견한 은혜, 그것들을 나누게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기도하며 격려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목장의 시작입니다. 좋은 목장은 자신을 잘 드러내게 합니다. 좋은 목장은 서로 용납합니다. 좋은 목장은 서로 격려하며 자신을 성찰하게 합니다. 듣고 배우고 보고 배우게 합니다.
3) 일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3대 고전이 일기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거스틴의 “참회록”, 존 번연의 “천로역정”,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두 일기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매일 자신의 삶을 일기형태로 쓰다 위대한 고전을 남긴 것입니다. 교회사를 빛낸 인물들,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휫필드, 존 울만, 토머스 머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등은 모두 일기로 자신의 영성의 기록를 남겼습니다. 일기가 좋은 것은 아무도 모르게 쓰기 때문에 진솔하고 매일 쓰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글로 남기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쓴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도 유럽 영성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쓴 일기였습니다. 저를 돌아보는 기회가 이 일기에서 나옵니다. 매주 저는 3-4일 정도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소담스러운 일기에 담아 자신을 성찰하지 않겠습니까?
4)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기를 성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기도입니다. 멘토가 일대일로, 목장이 소그룹으로, 일기가 개인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방법이라면 기도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합니다. 누가 내 마음을 잘 알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16:8절입니다. “내가 여호아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심으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나는 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습니다. 내 앞에 있을 뿐 아니라 내 옆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도는 내 앞에 계신 하나님앞에 내 마음을 토하는 것입니다. 내 옆에 계신 하나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시139:23-24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그래서 기도는 가장 좋은 성찰의 방법입니다. 분수옆에 있으면 물보라가 튀기듯이, 향나무 곁에 있으면 향이 묻어 오듯이, 하나님앞에 있으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노출, 나의 잘못은 드러나고, 둘째 동화,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고, 셋째 반사,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평생 자신을 성찰하며 살겠습니까? 제자의 삶은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기 성찰의 삶입니다.
제자의 삶(9) 요15:1-3, 시139:23-24 2014.3.2(일)
제자의 점검, 자신을 성찰하라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스러운 미나리냄새가 난다.
2월에서 3월로 넘어가는 골목길에는
오래 잊었던 옛 친구를 만날 것만 같다.
2월에서 3월로 넘어가는 바람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들려오고
겨드랑이에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돋아날 것만 같다.
요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사18:5, “추수하기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
우리는 열매맺기 위해 잔가지들을 쳐야 합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당신으로 저는 족합니다(노리치의 줄리안)
당신의 선함을 따라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소서
저에게는 당신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당신이 아닌 다른 것을
값지다고 생각하고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구한다면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직 당신 안에 있을 때
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2:4-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고후13:3,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니라”.
자기 성찰은 자기 약점을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기 약점을 알아야 한다
에바그리우스, 일곱가지 죄
탐식
음욕
욕심
불만감
분노
허영심
교만
3G
Gold
Girl
Glory
넘어진 자리가 전환점이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죄의 습관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이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한번 이기면 또 한번 이긴다(존 오웬)
자기를 성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1) 멘토
롤모델-내가 모방하고 싶은 사람
멘토-만나서 돕고 도움받는 사람
2) 소그룹
좋은 목장은 자신을 잘 드러내게 한다.
좋은 목장은 서로 용납한다.
좋은 목장은 서로 격려하며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3) 일기
4) 기도
시16:8, “내가 여호아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심으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앞에 기도하면
노출-나의 잘못이 드러나고
동화-내가 하나님을 닮아가고
반사-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자의 삶(12) 롬8:31-39 2014.3.23(일) (0) | 2019.07.04 |
---|---|
제자의 삶(10) 롬8:9-13,26-27 2014.3.9(일) (0) | 2019.07.04 |
제자의 삶(8) 요15:7,14-15 2014.2.23(일) (0) | 2019.07.04 |
제자의 삶(7) 시1:1-8 2014.2.16(일) (0) | 2019.07.04 |
제자의 삶(6) 눅9:28-36 2014.2.9(일) (0) | 2019.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