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1) 눅9:51-56 2014.3.30(일)
무모한 도전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순절에 예수님을 어떻게 묵상합니까? 지난 금요일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마태복음을 한번 읽었습니다. 성경을 조금씩 깊히 읽는 것도 좋지만 때로 전체를 한번에 읽는 것도 필요합니다. 전체의 내용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예수님을 중심으로 읽었는 데 성경이 참 신비합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이번에도 읽으면서 보니까 예수님은 확실히 우리와 다릅니다. 무엇이 다른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어쨓든 다릅니다.
어떤 분이 만일 예수님이 학생이었다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아마 가정통신문에 이렇게 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수학: 예수는 수학적 감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고 양 한 마리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귀하다고 한다. 운동: 예수는 수영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시간만 나면 물위로 걸어다니기 때문이다. 화학: 예수는 화학 법칙을 자주 무시한다. 잔치집에 가서 물로 포도주로 만들기 때문이다. 글: 예수는 공책이나 필기도구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아무때나 땅에 손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친구관계: 예수의 교우관계는 복잡하고 난처하다. 주로 사귀는 사람이 이방인,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문제아, 타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합평가란에 이렇게 썻습니다. “예수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지도하기 곤란한 학생임. 부모의 특별지도가 요망됨”.
만일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가 이 통신문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예수님의 일생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쉽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중의 하나가 죽음입니다. 보통 사람은 살려고 이 땅에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려고 나온 사람 같습니다. 그의 생애의 첫부분은 그래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고치고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가면 오직 한 가지에 집중됩니다. 죽음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죽음 이야기를 무려 6장이나 씁니다. 전체 16장중에서 1/3이 넘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한 주간밖에 안됩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도 비슷합니다. 사는 이야기보다 죽는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지난 1월부터 현재까지 우리 교인 가정중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가정이 17가정입니다. 모두 안타깝고 슬픈 이별입니다. 이 분들을 제가 보고 이야기 들어보면 죽기 위해 살았다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죽음까지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살았고 죽음까지 미리 알았습니다.
그것의 출발이 오늘 말씀입니다. 51절을 보실까요?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여기서 우리를 당황케 하는 말이 “굳게 결심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굳게 결심한 것일까요? 우리가 보통 굳게 결심했다면 사는 일로 결심합니다. 대학에 진학하기로, 취직시험에 합격하기로, 좋은 아가씨와 결혼하기로, 토플 시험보고 유학가기로 결심합니다. 우리의 결심은 보통 좋은 일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일로 결심합니다. 예루살렘에 향해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있을 것이기에 굳게 결심합니까? 죽는 일입니다. 유대인의 고발로 로마인에게 붙잡혀 죄없이 십자가 지고 죽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결심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죽음이란 결심 안해도 오는 것 아닙니까? 결심한다고 죽고 결심안한다고 안 죽습니까? 어떤 수를 써서 죽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이해가 갑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기로 결심했다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로 결심합니다.
가는 길도 특이합니다. 예루살렘까지 가는 많은 길이 있는 데 하필 사마리아 길로 갑니다. 53절입니다. 눅9: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당시 사마리아는 적의 영토는 아니지만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불화로 인해 유대인들을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즘 팔레스틴 아랍사람들처럼 가끔 폭력도 있고 테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길을 택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험하고 불안하고 환영받지 않는 길을 굳이 택하여 갑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무모한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앞에 당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태도는 담대하고 당당했습니다. 오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보인 모습을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막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 장면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위치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서서 가시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앞에서 저만큼 앞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긴 가지만 왜 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알았다면 아무도 안 따라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향하여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전 한 죄수가 교도소에서 쓴 것입니다. 한번은 이 죄수가 교도소 2층에서 밖을 내다 보고 있는 데 마침 한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비가 와 길을 질척거리는 데 사형수가 걸어가면서 자기 앞에 놓인 웅덩이를 팔짝 뛰어넘고, 비가 고인 곳은 살짝 돌아 가더라는 것입니다. 불과 몇 분있으면 죽을 사람이 발에 진흙 묻히기가 싫어 팔짝 팔짝 뛰어가는 것을 보고 아, 사람속에 있는 생의 애착이 얼마나 큰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앞에 얼마나 담대합니까? 32절 뒷 부분입니다.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 하더라”. 평소의 인자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단호하고 준엄한 얼굴, 무엇인가 중대한 결심을 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서 나가는 모습에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담대함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가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밤늦게 기도하던 예수님을 잡으려고 군병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이 몰라서 물었을까요? 알았습니다. 요18: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저희 가정은 6.25때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할머니가 죽고 큰 아버지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아버지도 인민군에게 붙잡혀 갔다가 탈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마음을 아프게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인민군이 집에 들이 닥쳤습니다. 다짜고짜로 할머니를 체포하더니 끌고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는 면장이었고 믿는 집인데다가 큰 아버지는 경찰이었습니다. 인민군이 볼 때 대표적인 반동집안입니다. 그때 고모 둘이 있었는 데 하는 6살, 하나는 3살이었습니다. 고모들은 어머니가 끌려가니까 울면서 인민군들에게 “우리 엄마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소용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끝내 끌려사 뒷산에 올라 언덕으로 잡혀갔습니다. 인민군들이 고모들을 발로 차 집으로 돌아가게 하자 할머니가 큰 소리로 고모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가. 정자야, 정숙아”.
누구나 죽음앞에서는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알았으면서도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18: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 땅에 엎드려지니라”. 도대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처럼 칼로 위협했습니까? 천사들을 동원해서 군병들을 무찔렀습니까? “누구를 찾느냐?” 물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군병들이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학자들은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한 이 말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낼 때 “나는 나다” 식으로 말하는 데 예수님이 하나님이 쓰시는 그 말투를 써서 ‘아, 예수님이 하나님인가’ 보다 해서 놀라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 군병들은 유대군병들이 아니라 로마군병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문화를 알리도 없었고 알았어도 그것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놀란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입니다. 자기를 잡으러 온 군병들앞에서 조금도 놀라지 않고 ”누구를 찾느냐?“ 소리치신 예수님, ”너희가 나사렛 예수를 찾느냐? 내가 나사렛 예수다. 자, 내가 여기 있다. 나를 잡아가려거든 잡아가라“. 그 당당한 위엄앞에 군병들이 납작 엎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앞에 당당한 모습의 최고봉은 빌라도 앞에 설 때입니다. 빌라도에게 선예수님께 빌라도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놀라운 답변이 나왔습니다. 요18:37, “네가 말한대로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해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해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이 말에 놀란 빌라도가 재차 묻습니다. “네가 정말 유대인의 왕이냐?”. 이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겁없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지금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고발된 죄수입니다. 그래서 살려면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설령 왕이었다고 해도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도대체 살겠다는 것입니까? 죽겠다는 것입니다. 나무섶을 가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겪이요, 기름통을 안고 불난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마나도 한번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두 번 그렇게 말합니다. 요18:33절, 37절입니다.
죄가 있어도 부인하는 세상입니다. 뻔히 남의 아들 유괴해 놓고 나는 안했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물증이 나올 때까지는 일단 버티고 보자는 것이 인간의 약삭빠른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굳이 시인합니다. 시인할 뿐 아니라 선포합니다. 빌라도앞에서 뿐 아니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막14:61,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 대답입니다. “내가 바로 그니라”. 마태복음도 같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 대답입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범죄를 스스로 인정하여 죽은 것입니다. 죽음앞에 담대한 예수님, 죽을 줄 알면서 변명하지 않고 정면돌파한 예수님, 예수님은 그렇게 죽음을 맞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죽었습니다. 당당하다는 것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로마군병에서 죽었습니다. 가롯 유다가 은30이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고, 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여기서 “넘겨주었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역사적으로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지로 죽지 않았습니다. 엡5:2절이 좋은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느니라”. “버리고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따라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셨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억지로 내쫓기거나 강요당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필연적이었지만 예수님은 자발적 순종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형판결하고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이들은 다만 하나님의 큰 구원의 드라마의 단역을 맡은 것 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실 마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땅에 오시지도 않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지도 않았고 군병들에게 체포되지 않았고 체포되었어도 도망치거나 군병들을 제압했을 것입니다.
갈2:20 뒷 부분을 아십니까?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사는 것이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것입니다. 롬8:32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기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억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시편입니다. 시40:7,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시40: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나사사로의 무덤앞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입니다. 요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죽음이 하나님이 주신 잔이라면 피하지 않았던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앞에서 당당했고 잡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었지만 그것을 아는 것과 함께 예수님처럼 우리도 당당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죽음이어야 합니다. “옛날에 예수님이 그랬다”. 그러고 앉아 있어 봐야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당당합니까?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이 찬양처럼 넘어져도 일어서고 실수해도 다시 시작합니까? <하워드의 선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하워드 스티븐슨 교수는 40년 넘게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직한 미국 경영학계의 살아 있는 전설입니다. 그가 어느날 길을 걷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집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깨어납니다. 그때부터 그는 지금까지의 자기만을 위한 학자의 길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따뜻한 멘토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 책은 그가 멘토로서 제자들에게 남긴 10가지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당신의 전환점이다”. 한번은 제자가 와서 미셀이라는 친구 이야기를 했답니다. 미셀이 회사를 운영하다가 어려움을 당했는 데 지금 재기를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워드 교수가 말합니다. “미셀은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구먼.” 제자가 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워드가 말했습니다. “미셀의 문제가 뭔지 모르겠나? 눈앞에 굴러온 최고의 기회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미셀은 누군가 자기 운명을 결정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그러나 그의 실패가 최고의 선물을 위한 전환점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 “최고의 선물이라니요?” “전환점이라는 선물이야. 지금까지 미셀은 해오던 일에 묻혀 자기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어. 이번에 실패함으로 그는 자기를 찾을 수 있는 절호의 챤스를 맞이했지. 그것이 최고의 전환점이라는 말이야. 작고 보잘것없는 씨앗 속에 사과나무가 있듯이 미셀의 실패속에 엄청난 전환점이 있어. 그래서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미셀의 위대한 전환점이야”. 하워드 교수가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실수와 실패를 겪지 않습니까? 그래서 낙심하고 실망하고 절망하다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나의 위대한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지금 넘어진 그 자리에 엄청난 사과나무의 꽃이 필 것이라고 믿으면 어떨까요? 이런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생의 순간을 위대한 전환점으로 인식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3년 사역이 항상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미쳤다는 소문도 나지 않았습니까? 나사렛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낭떨어지로 밀어 하마터면 죽을 뻔 하지 않았습니까? 죄인, 세리들과 먹고 마신다고 왕따 당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제자중 하나는 그를 부인하고, 또 하나는 그를 팔지 않았습니까? 급기야 유대인들이 무고하게 고발하고 빌라도가 잘못 재판해서 십자가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때 그때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지금 넘어진 그 자리가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전환점이다”. 그 믿음으로 매일을 살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은 매일 매일이 십자가와 부활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매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진짜 죽고 진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죽음앞에 당당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수님이 당당했던 것은 그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당당했던 이유는 평생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땅에 나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라고 믿는 사람은 당당합니다. “내가 아니면 이 사명을 이룰 사람이 없다“. 이것이 당당함의 이유입니다. 요12:27,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예수님이 한 기도입니다. “내가 이 때를 위해 왔다. 내가 하는 이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전에 나는 죽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당당합니다.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은 지금 내가 얼마나 어려우냐를 묻지 않고 내가 나중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묻습니다. 지금의 삶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인생의 마지막의 눈으로 오늘을 봅니다. 그래서 하워드 교수의 또 하나 남긴 조언이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의 눈으로 오늘을 보라”. 내가 결국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내가 인생의 마지막에 이룰 꿈은 무엇인가? 그 눈으로 오늘을 보면 오늘이 당당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패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생의 실패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상황이다. 노력하다가 실패한 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시도다. 시도조차 안하는 것이 실패다“.
그래서 제가 가장 슬픈 것은 믿는 사람이 자살한 것입니다. 몇 년 전 한 유명 배우가 인생을 자살로 마쳤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 정말 좋은 배우였다고 애도했지만 제 마음은 매우 무거웠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떤 생각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죽음앞에 당당했던 예수님의 삶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마치지 못한 것일까? 매 순간을 새로운 전환점으로 살다가 최후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의 삶이 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가 믿었다는 것이,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나라는 연간 약 13,000명도가 자살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많은 경우가 우울증 때문입니다. 우울중 증세는 누구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의 71%가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으로 보면 모세도 엘리야도 바울도 우울중 증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증세가 있다고 다 자살합니까? 죽음앞에서 당당했던 예수님처럼 이 땅에 우리가 실천할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습니까? 나만이 해야 할 평생의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음과 쌰워야 하고 담대하고 당당해야 합니다.
몇 년전 한국에 와서 기독교 TV에서 강연한 미국의 조엘 소넨버그라는 26살 된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생후 20개월 때에 가족과 나들이 하다가 전신 88%의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아직 핏덩이가 중한 화상을 입었으니 도무지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50번에 가까운 수술을 받고 생과 사를 넘나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지만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은 거의 형태가 없어져 기형아처럼 되고 손가락, 발가락은 사라지고 괴물같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장애와 싸웠습니다. 진정한 장애는 육신의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장애임을 믿었습니다. 생과 죽음 사이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오른편 강도처럼 십자가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죽음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죽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죽음,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수많은 절망, 고통, 우울, 분노, 상처의 죽음, 그 죽음들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황성주 박사를 만나고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가 쓴 <암은 없다>는 책이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전세계 암환자는 약 3000만명이고 우리 나라에는 약 100만명의 암환자가 있답니다. 그런데 정박아나 정신질환자는 어떤 종류의 암도 걸리지 않는 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신박약아는 거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아예 다른 정신적 시스템으로 살기 때문에 암에 걸리는 일이 없답니다. 암에 걸리지 않으려면 최상의 면역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데 우리 면역력을 깨뜨리는 가장 큰 것이 정신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으면 암 자체의 세력보다 아, 나는 죽었구나 라는 생각부터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암환자는 암 자체때문이 아니라 공포와 절망과 자포자기 등의 이유로 죽는답니다.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미국으로 가는 화물선에서 근무하던 선원 한 명이 냉동실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들어간 줄 모르고 밖에서 문을 잠갔습니다. 냉동실에 갇힌 선원은 죽어가며 벽에 일기를 썼습니다. “손이 얼고.. 온몸에 힘이 없고... 덜덜 떨려오며... 온몸에 마비가 오고... 나는 죽어간다”라고 적었습니다. 뉴욕에 도착해서 냉동실 문을 열어 보니, 그 선원은 죽어 있었고 일기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냉동실은 고장이 나 있었습니다. 실제 냉동실은 춥지 않았는 데 선원은 냉동실이기 때문에 춥다고 생각했고 결국 생각대로 죽었습니다, 기온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생각 때문에 죽었습니다. 가장 큰 면역력은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는 내부의 저항력이랍니다. 단순히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고 막아 내야 한답니다. 암환자는 자기 비하 때문에 죽는답니다. “나는 소중하고 존엄하다” 이 믿음이 그를 살립니다. 그래서 기도가 능력있습니다. 기도의 기적은 기도하는 사람이 인생을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살고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어떻습니까? 어떤 고난앞에서도, 어떤 질병앞에서도, 어떤 불안과 두려움과 우울증 앞에서도 담대하시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죽음앞에서 당당하시겠습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주일날 교회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앞에 당당한 사람입니다. 어떤 종류의 죽음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당하십시오. 인생앞에서 무모하게 도전하고 담대하게 전진하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하시길 바랍니다.
사순절(1) 눅9:51-56 2014.3.30(일)
무모한 도전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9: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예수님은 죽음앞에 당당했습니다.
막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요18: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 땅에 엎드려지니라”.
요18:37, “네가 말한대로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해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해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막14:61,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은 스스로 죽었습니다.
엡5:2,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갈2:20 뒷 부분,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사는 것이라”.
롬8:32, “자기 아들을 아기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시40:7,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시40: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우리도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워드 스티븐슨, <하워드의 선물>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당신의 전환점이다”.
예수님이 죽음앞에 당당한 이유
(1)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2) 평생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요12:27,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인생의 마지막의 눈으로 오늘을 보라”.
”인생의 실패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상황이다. 노력하다가 실패한 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시도다. 시도조차 안하는 것이 실패다“.
조엘 소넨버그
황성주, <암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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