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삶(10) 롬8:9-13,26-27 2014.3.9(일)
제자의 거룩, 성령으로 기도하라
3월 둘째 주일입니다. 3월은 “마취”, 희망의 행진이 시작되는 달입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을 빌고 싶은 계절입니다. 저는 카톡이나 허훼이북, 트위터등 소셜 네트워킹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받는 것은 받습니다. 며칠전에 한 분이 저에게 문자로 시 하나를 보냈습니다. 제목은 “축복을 비는 기도”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가까이 계셔/당신을 지켜 주시기를
당신 안에 계셔/당신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당신 옆에 계셔/ 당신을 보호해주시기를
당신 앞에 계셔/ 당신을 인도해주시기를
당신 뒤에 계셔/ 당신을 변호해주시기를
당신 위에 계셔/ 당신을 축복해주시기를
짧지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자주 듣는 말인데도 들을 때마다 힘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옆에, 우리 앞에, 우리 뒤에, 그리고 우리 위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이것이 다만 사람의 말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직접 ㅇ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가까이 있다. 네 안에 있다. 네 옆에 있다. 네 앞에 있다. 네 뒤에 있다. 그리고 위에 있다”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그것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영으로 너희안에 있다”.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롬8:9,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롬8:11 앞 부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롬11절 뒷 부분,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라“. 성경 최고의 신비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이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표현을 잘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십니다. 구약의 하나님입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4복음서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입니다.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다가 서신서로 오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안에 계십니다. 우리 위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이제는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안에 계십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 하나님을 다 믿습니까? 우리 위에 계신 성부 하나님, 그는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우리 곁에 오신 성자 예수님, 그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친구입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 그는 우리와 동행하는 영이신 하나님입니다.
구약 -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 - 거룩하신 하나님(아버지)
복음서 -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친구)
서신서 -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 능력의 하나님 (어머니)
제가 오래전 미국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설교하다 보니까 맨 앞자리에 믿음 좋은 남자 집사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그랬더니 “예”합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성령도 받았습니까?” 그랬더니 “아니요. 성령은 아직”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영접했다면서요?” 예“. ”그러면 예수님과 성령님이 다른 분입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한참 생각하더니 ”같은 분이지요“ 그럽니다. ”그러면 예수님 영접할 때 예수님과 동일한 성령님도 오시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그렇겠네요“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잘못 이해합니다. 성령이 우리안에 계신다는 말이 무엇일까? 우리안에 계시다면 언제 오셨을까? 그리고 왜 오셨을까? 우리가 먼저 확인할 것은 예수님과 성령님은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영으로 우리안에 오시지 않겠습니까? 성령은 우리가 방언받을 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셨으니까 우리가 방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할 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 우리안에 오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유일한 조건은 믿음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성령이 임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이 여러분안에 계십니다. 안 보인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 아멘.
성령님은 우리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경은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말씀했습니다. 눅24:49,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난 후에 오게 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면서 성령은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행1:8절에서도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능력입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두 가지 특징을 가진 능력입니다. 먼저 크신 능력입니다. 얼마나 크신 능력인가 하면 ”다이나마이트“같은 능력입니다. ”능력“이라고 된 그리스어 ”두나미스“에서 영어 ”다이나마이트“가 나왔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다이나마이트, 모든 것을 폭파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초자연적인 능력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 저 넘어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곁에 계십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은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 ”파라“, 옆에서”, “클레토스”, “돕다, 부르다”, “옆에서 돕는 능력”입니다. 초자연적이면서도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곁에 계신 능력, 다이나마이트같은 폭발력을 가졌으면서도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능력, 그 분이 성령님입니다.
능력이신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의 무엇을 도우실까요? 요16:8-11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여기에 성령님이 도우시는 세 가지 큰 일에 대하여 말합니다. 도표를 보시겠습니다.
죄 의 심판
믿음으로 죄사함받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해짐 하나님앞에 영광스러운 자로 섬
구원 성화 영화
성령님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세 가지를 돕습니다. 먼저 죄를 해결해 줍니다. 그래서 얻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죄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안에서 의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실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닮도록 이 일을 도우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앞에 영광스러운 자녀로 서도록 끝까지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한번 받은 은혜가 끝까지 지속하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최후 승리하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이 천국에서 완성되도록 끝까지 우리안에서 우리를 돕습니다.
제 삶을 생각해 볼 때 저를 여기까지 있게 한 것은 성령의 은혜였습니다. 제 일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성령님은 저를 찾아 주셨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성령을 체험한 것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입학하는 겨울방학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시골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 데 저녁에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했습니다. 온 몸이 뜨거워 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는 데 그렇게 많은 눈물이 제 속에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13살 먹은 아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죄가 다 생각나고 회개가 튀어나왔습니다. 울고 불고 기도하는 데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언이었습니다. 뜻도 모르는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는 데 제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받은 성령으로 저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확증을 주신 성령의 은혜였습니다.
두 번째 성령체험은 25살 때 기도원에서 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다 몸이 약해져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동안 신앙생활도 잘 못하고 하나님도 멀리 지냈습니다. 몸도 약해지고 해서 요양도 할 겸 친척이 소개해준 충남 논산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제 진로에 대하여 확신이 없었습니다. 목회자가 된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했지만 확신은 없었습니다. 낮에는 기도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기도하고 자는 데 어느날 밤에 성경을 읽다가 성령이 임했습니다. 무슨 시원한 물줄기같은 것이 제 머리에 부어지더니 온 몸을 적셨습니다. 순식간에 온 몸이 시원해지면서 방언이 터져나왔습니다. 또한 죄가 떠오르면서 회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데굴 데굴 구르면서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 데 그 순간 제 마음에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한동안 세상 일에서 실패를 거듭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선명히 떠오른 성경귀절이 렘33:3절이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이 보여주실 크고 비밀한 일이 무엇인지 몰라도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때 임하신 성령님은 저에게 사명의 길을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 해 가을에 저는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왔고 지금까지 한번도 옛날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 번째 미국에서 임했습니다. 2002년, 제가 전주에서 6년 목회하고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습니다. 두 동안 쉬면서 LA의 약한 교회, 세 군데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세 번째 집회를 마치고 숙소에 갔는 데 갑자기 허리가 삐끗하더니 움직일 수 없습니다. 꼼짝없이 세 주를 그냥 누어 지냈는 데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습니다. 갈할 곳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 데 남의 나라에서 꼼짝없이 누어지내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며칠을 꼼짝없이 누어 있는 데 제가 머문 집 서재에 원서 한 권이 눈에 띄였습니다. 피터 왜그너라는 쓴 “치유하는 은혜”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누어서 읽는 데 갑자기 성령이 임했습니다. 온 몸이 뜨거워 지면서 은혜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습니다. 무슨 눈물이 그렇게 나오는지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목회하면서 저도 모르게 힘들고 외롭고 지쳐 있었습니다. 남들 볼 때는 그럴사 했지만 저는 늘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 하듯 하나님의 위로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임한 성령님은 위로의 성령이었습니다. 성령님은 그날 제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성령님, 나보다 내 고통을 더 아프게 느끼시는 분, 저는 그 어머니 성령님 품에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자 몸이 회복되어 일어났습니다. 제 일생과 함께 하신 성령님이 여러분의 일생에도 함께 하신 줄 믿습니다.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 때로는 죄를 회개케 하시는 영으로, 때로는 거룩하게 하시는 영으로, 때로는 위로의 영으로, 때로는 사명의 영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님, 그 좋으신 성령님이 여러분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죄를 이기게 합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의 일중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를 거룩케 하기 위해 성령님이 하신 일중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의 죄를 죽이는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 13절입니다. 보실까요?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영“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몸“은 눈에 보이는 몸이 아닙니다. 영어로 하면 body가 아니라 flesh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속성입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또 하나의 육이 있다고 말합니다. ”죄를 짓게 하는 본성적 욕구“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지체“, ”육신의 소욕“, ”몸“, ”몸의 행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육신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육신의 소욕, 지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육체성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모든 죄가 거기서 나옵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으니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못합니다. 그래서 누가 합니까? 성령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말입니다.
자, 우리안에 죄가 있고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이길 수 있다는 진리를 성경 로마서, 특히 롬6-8장의 구조에서 보시면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도표를 보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8장의 구조
롬1-3장 3-5장 6장 7장 8장
인간은 죄인 예수님피로 의로워짐 우리가 죽었다 아직도 죄가 있다 성령의 다스림
로마서 1-8장의 요약입니다. 롬1-3장은 우리의 죄를 이야기합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우리 모두도 다 죄인이다. 3장 19절부터 내용이 바뀝니다. 그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의 피로 값없이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6장부터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6장, 우리가 죽었습니다. 6:2,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6장은 우리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죽음의 표시로 우리가 교회안에서 세례받습니다. 그런데 7장이 문제입니다. 6장에서 죽었는데 7장에 오면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아직도 죄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지 않지만 우리는 또 죄를 짓습니다. 내 속에 죄가 거합니다. 그래서 나는 괴롭습니다. 그래서 8장으로 오면 별 수 없이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8장에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왜 8장에서 성령이 등장하고 왜 성령이 아니면 죄를 이길 수 없는지 그 흐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6-8장을 조금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롬6-8장의 구조
6장 7장 8장
우리가 죽었다 아직도 내안에 죄가 있다 영으로 죽이라
6장에서 죄에 죽었다는 데 또 7장에서 아직도 죄가 있다는 이 말을 이해해야 8장이이해됩니다. 6장에서 죽었다는 죄가 왜 7장에서 또 나옵니까? 6장과 7장의 “죄”의 성격이 각각 다릅니다. 6장에서 죄에 죽었다는 말은 죄의 지배로 부터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죄를 다스리던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심으로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피를 대가로 우리를 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치권이 예수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이 골1:13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저내사 그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옮겨졌습니다.
구원은 다스리는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통치의 영역이 옮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죄에 속하지도, 죄의 지배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6장입니다. 그런데 7장의 죄는 본성적 죄입니다. 통치를 받지는 않지만 우리안에 죄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잘 설명한 것이 16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입니다. 그는 “죄죽이기”라는 책에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 무엇이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를 완전히 도말하거나 몰아냈다는 말이 아니다. 죄를 완전히 근절시키는 것은 세상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를 속에 꽁꽁 숨기는 것이 아니다. 죄는 숨겨지지 않는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겉모습일 뿐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를 한 두 번 짓지 않았다거나 순간적으로 몇 번 죄를 이겼다는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이 우리를 다스릴 권한을 잃었다는 것이다. 곧 지배권을 상실한 것이다. 더 이상 나는 죄와 마귀의 세력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안에 죄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는 내가 원치 않는 죄가 있다. 이것이 7장입니다. 그래서 나는 괴롭다. 예수님의 지배안에 있는 내 안에 여전히 죄가 있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오직 성령님만이 내 죄를 죽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롬1-3장 3-5장 6장 7장 8장
나는 죄인이다 예수님이 나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내안에는 그 죄는 성령의
그의 다스림을 여전히 죄가 능력으로 이긴다
받는다. 있다
이제 성령의 도움의 필요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으나 죄의 본성으로부터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아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13절입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님은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죄를 죽여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가장 큰 사역은 무엇입니까?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롬8:26-27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기서 “돕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령이 기도를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돕는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순안티람바노마이”입니다. 이 말은 “함께 일으켜 세운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 일으켜 세우는 방법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죤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크리스쳔“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기도외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기도후에 우리는 기도외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대하여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님은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주체는 성령님입니다. 기도는 성령님이 감동해야 합니다. 엡6:18절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여기에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은 “성령께서 시키는 기도를 하고”입니다. 기도는 성령님이 시키시는 것입니다. 유다서 20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성령으로 기도하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성령께서 시키는 기도를 하라”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님이 시킵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속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롬8:27,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처음에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시킵니다. 기도하라는 감동을 줍니다. 그렇게 해서 기도가 시작되면 그 분이 직접 기도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능력은 우리 안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또 기도하시는 성령의 능력에서 옵니다.
가끔 자동차를 타다가 어떻게 자동차가 가는가? 그 원리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힘으로 자동차가 갑니다. 첫째는 열쇠입니다. 열쇠는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출발입니다. 열쇠는 눈에 보입니다. 밖에 있습니다. 영적 삶에 있어서 열쇠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을 끌어들이는 능력입니다. 요일5:12처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나 열쇠만 가지고 안됩니다. 지동차를 움직이는 내면의 힘은 연료입니다. 열쇠없이도 차가 안 움직이지만 열쇠가 있어도 기름이 없으면 차는 꼼짝하지 않습니다. 연료는 속에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 삶에 연료는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자동차에 물을 넣고는 달릴 수 없습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우리 영적 삶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골2:6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어느 안입니까? 영적 연료인 성령님이 계시는 안입니다. 다시 롬8:9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믿습니까? 목욕탕에 가면 이런 글을 봅니다. “맡기지 않은 물건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주인에게 맡긴 물건은 무엇이든 책임짓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맡겨 그 분이 책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라. 제자의 삶에 열매맺기 위해 할 일은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10) 롬8:9-13,26-27 2014.3.9.(일)
제자의 거룩, 성령으로 기도하라
축복을 비는 기도
주님께서 당신 가까이 계셔/당신을 지켜 주시기를
당신 안에 계셔/당신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당신 옆에 계셔/ 당신을 보호해주시기를
당신 앞에 계셔/ 당신을 인도해주시기를
당신 뒤에 계셔/ 당신을 변호해주시기를
당신 위에 계셔/ 당신을 축복해주시기를
롬8:9,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롬8:11,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라“.
구약 -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 - 거룩하신 하나님
복음서 -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서신서 -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 능력의 하나님
성령님은 우리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눅24:49,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보혜사”=“파라클레토스”=“옆에서 돕는 자”
요16:8-11,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죄 의 심판
믿음으로 죄사함받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해짐 하나님앞에 영광스러운 자로 섬
구원 성화 영화
성령님
성령님은 죄를 이기게 합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1-8장의 구조
롬1-3장 3-5장 6장 7장 8장
인간은 죄인 예수님피로 의로워짐 우리가 죽었다 아직도 죄가 있다 성령의 다스림
롬6:2,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6-8장의 구조
6장 7장 8장
우리가 죽었다 아직도 내안에 죄가 있다 영으로 죽이라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저내사 그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존 오웬, “죄죽이기”(책)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 죄를 완전히 도말하거나 몰아냈다는 말이 아니다.
- 죄를 속에 꽁꽁 숨기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변화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 우리가 한 두 번 짓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죄의 세력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롬1-3장 3-5장 6장 7장 8장
나는 죄인이다 예수님이 나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내안에는 그 죄는 성령의
그의 다스림을 여전히 죄가 능력으로 이긴다
받는다. 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님은 기도하게 하십니다.
롬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돕는다”=“순안티람바노마이”=함께 일으켜 세운다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유20, “사랑하는 자들아, 성령으로 기도하라”
롬8:27,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자동차가 움직이는 원리
(1) 열쇠-믿음(구원)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2) 연료-성령(능력)
골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롬8:9,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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