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2) 눅7:36-39, 요12:1-8 2014.4.6(일)
희생적 낭비
사순절의 한 복판에 왔습니다. 저에게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스크랩 하는 습관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볼 때 가위로 스크랩하는 일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합니다만,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거기 있습니다. 200억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건국대 의사 부부 이야기, 자신은 휘귀병에 걸려 두 다리를 절단했으면서도 평소에 푼푼이 모아 저금통을 깨뜨려 이웃을 돕는 장애우 이야기, 정부로부터 적은 보조금을 받으면서도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2천만원을 내놓은 독거노인 할머니 이야기, 불길속에 뛰어들어 80대 노인을 구한 집배원 이야기, 25년간 272번이나 헌혈한 장애인 서정석씨 이야기, 12년간 전신마비로 누어 있는 아버지께 효도하면서 소년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 중3 김원중 군 이야기, 모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병원 정형외과에 모녀인듯한 환자 둘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니인 듯한 할머니가 딸의 손을 꼭잡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애가 제 딸인데요, 애가 초등학교때 외가집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 왼손 손가락이 잘렸거든요. 다행히도 세 손가락은 수술을 받아 회복했지만 넷째 손가락은 그렇지 못했어요. 이제 다음 달에 시집가는 데 사위는 괜찮다고 하지만 어찌 그런가요? 이 못난 에미, 해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반지낄 손가락은 해 주고 싶은 데 혹시 이 늙은이 손가락으로도 수술이 가능한가요?” 그러면서 할머니는 늙고 쭈글쭈글한 손가락을 펴 보였습니다. 순간 의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겨우 참고 말했습니다. “그럼요, 할머니. 제가 예쁘게 수술해 드릴께요”. 그 뒤 의사는 정성껏 수술했고 딸은 어머니의 손가락을 접붙이고 어머니에게는 의수로 만든 손가락을 끼웠습니다. 아, 어머니의 희생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너무 자주 그 희생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희생뿐입니까? 세상은 모두 희생 때문에 삽니다. 작은 희생이 모여 큰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세상을 움직여 갑니다.
오늘도 그 아름다운 희생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향해 올라가실 때 먼저 들른 집이 있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의 집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사랑하신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남매가 살고 있었는 데 예수님이 도착하여 막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가 들어오더니 예수님 발앞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것도 조금 부은 것이 아니라 항아리를 모두 깨뜨려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3절입니다. 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사건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며칠 전에 일어났습니다. 왜 하필 예수님이 죽으신 주간에 이 사건이 일어났을까?혹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무엇인가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희생이 세상을 살립니다
먼저 배우는 것은 희생이 세상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로,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의 삼남매중 막내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 남매에게는 부모가 없습니다. 그나마 오빠 나사로는 최근에 죽었다 살아 났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세상을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다른 여자들처럼 결혼지참금으로 향유를 정성껏 모았습니다. 마26장에 보면 그 값이 무려 300데나리온이나 됩니다.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에 1데나리온 벌었으니 마리아는 300일 노동한 것을 모은 것입니다. 그 많은 것은 마리아는 예수님 발앞에 부었습니다. 누구도 마리아의 결혼을 도울 사람도 고 자기가 노력해서 시집가야 할 사람이 그동안 모은 모든 예수님 발에 부었으니 잘한 일입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닦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간에 머리를 소중히 여깁니다. 평소에 남자들은 머리에 “키파”라는 빵 모자같은 것을 쓰고 다니고 여자는 수건같은 스카프를 씁니다. “내 머리위에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발사를 “도둑”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이발사는 머리를 자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남자들은 머리를 잘 베지 않고 여자들은 머리를 풀지 않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여자가 다른 남자앞에서 머리를 풀기만 해도 이혼사유가 됩니다. 여자는 오로지 자기 남편앞에서만 머리를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앞에 머리를 풉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나는 다른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내 남편입니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정상적인 여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희생을 어떻게 말합니까? “기념하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마리아의 이 일을 기념하라고 말합니다. 기념하라는 말은 기억하고 축하하라는 말입니다. 마리아의 이 일이 사람들 눈으로는 어리석은 일이요 낭비였지만 예수님에게 그 일은 기념될만한 일이었습니다. 기념될만한 일은 곧 희생적인 일입니다. 오직 희생적인 일만 기억되고 기념됩니다.
일제때 평안도 어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하나님을 섬기던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는 데 선교사가 동네에 들어와 어렵게 전도하며 교회짓는 것을 보고 그의 전답 천평을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선교사는 논을 바친 이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 그 집사님을 교회 사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그 아들이 참 영리하고 공부도 잘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미국 자기 고향으로 보내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게 했습니다. 후에 이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한국교회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연세대학교 총장 백낙준박사입니다. 그의 아버지 백사겸 집사가 논 천평을 교회에 바치자 아들이 한국사회에 기념이 될만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역사는 희생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오래전 일본 열도를 울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본 도꾜의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일 취객을 구하려다 다른 일본 사람과 함께 목숨을 잃은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 사건입니다. 고려대에 재학중인 이수현은 푸른 꿈을 안고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사실 일본은 그에게 좋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증조부는 일제때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죽었고 할아버지는 탄광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술취한 승객이 비틀거리며 차창밖으로 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충분히 못본척할 수 있었고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취한 일본인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를 살린 후 자기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본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렇게 뻔뻔하게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의 희생적 죽음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기념됩니까? 타는 불구덩이속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진 홍제동 6명의 소방관들의 희생입니다. 파월장병을 위해 슈류탄에 자기 몸을 던진 강재구 소령의 희생ㅇ입니다. 차거운 연평도 바닷속으로 동료를 구하려고 뛰어든 이주호 소령의 희생입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역사를 바꾼 것은 언제나 희생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 빵이 되듯이, 부드러운 포도가 발에 밟혀 포도주가 되듯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언제나 희생입니다.
희생의 배후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이렇게 보면 잘못 보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린 것은 보니까 마리아가 대단한 사람이다”. “역시 마리아는 달라”. 마리아를 영웅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려 위대한 일을 한 것은 맞지만 마리아가 영웅인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도 마리아가 아닙니다. 마리아로 하여금 향유를 깨뜨려 자기를 희생하게 한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린 전후 배경을 살펴 봅시다.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릴 때 거기 예수님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12제중중 특히 가롯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엄청난 향유을 일시에 쏟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롯 유다는 마리아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상당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적어도 돈의 가치로 볼 때는 그렇습니다. 가롯 유다의 말대로 가난한 처녀가 어렵게 모은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한번에 부은 것은 분명 낭비였습니다.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었다면 더 좋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가롯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렇게 돈을 아끼고 가난한 자를 생각한 사람이 자기 스승을 은30에 팝니까?
가롯 유다의 겉으로 나타난 관심은 돈이었지만 그것의 뿌리는 비은혜였습니다. 언제나 희생의 가치는 물질적 가치를 뛰어 넘습니다. 사람들의 헌신하는 진정한 이유는 돈때문이 아니라 은혜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희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없어서 희생하지 못합니다. 돈이 많아서 희생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많아서 희생합니다. 오늘 말씀 요12장과 비슷한 사건이 눅7장에 나옵니다. 눅7장은 요12장과 비슷한 스토리이지만 등장인물이 다릅니다. 거기 나타난 여인은 마리아가 아니라 동네 죄인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 “죄인”하면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녀를 가리켰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은 부도덕하거나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이미 낙인이 찍힌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스스로 자신을 구별하여 율법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자기 눈으로 향유를 깨뜨린 여인을 보았을 때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바리새인의 눈에 이 이 여인이 먼저 할 일은 향유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쁜 행실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도 이 여인이 죄인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죄인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은 여인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앞에 감히 얼굴도 못 들고 뒤에서 울고 있어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앞에는 두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과 예수님, 요한복음에는 가롯 유다와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 바리새인과 가롯 유다는 율법주의를 대변합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대표합니다. 바리새인과 가롯 유다는 죄인이 먼저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때 받아주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용납하고 다음에 회개하라는 입장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구원했다고 했지 행위가 구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행위로 용납받기는 어차피 틀렸습니다. “네 죄를 회개하고 오라. 그러면 받아주겠다” 했다면 이 여인은 평생 예수님께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친 다음에 용납받은 것이 아니라 용납받은 다음에 고쳤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이나 메시지는 같습니다. 나쁜 행위를 고쳐야 용납하겠다는 입장과 먼저 용납하고 다음에 고치라는 입장입니다. 성경적 용어로 말하면 첫 번째 것을 율법주의적 입장이라면 두 번째 것은 은혜의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서 있습니까?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람과의 관계로 나타납니다. 사람과 잘못 관계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먼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저와 이야기 나눈 분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 다니는 분인데 제가 평소에 잘 알고 믿음도 좋은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남편에게 상처를 받고 잠시 집을 나왔습니다. 아마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일로 가정불화가 난 것 같습니다. 제가 다 듣고 위로하면서 이미 상당히 시간이 지났고 또 믿음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남편을 용서하고 새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남편을 용서할 마음이 없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요? 그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용서는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용서는 회개한 사람이 받는 거 잖아요? 하나님도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시잖아요?” 그에게는 남편을 용서하지 못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을 하나님과 빗대어 말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회개한 사람만 용서한다면 이 세상에 용서받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말한 사람 자체가 용서받지 못합니다. 제가 그 분을 이해는 했지만 그때 발견한 것은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도 얼마나 예수님의 메시지와 동떨어져 사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죄인인 여자가 회개하고 돌아와야 그를 받아들인다고 예수님이 말했나요? 그것은 바리새인의 태도가 아닌가요? 바람핀 남편이 먼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면 호세아서는 어떻게 된 것인가요? 호세아는 바람난 아내를 용서하기 위해 무조건 길을 나서지 않았나요?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면 탕자의 비유는 어떻게 된 것인가요? 아버지는 거지 신세로 돌아온 아들을 그냥 받아주지 않았나요? 교회에서 나에게 잘못한 교인이 찾아와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다면 솔직히 그나 당신이나 제대로 예수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지난 200년동안 가장 뛰어난 기독교 고전을 꼽으라 한다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은 아시다 싶이 감옥에서 19년이나 살다 임시로 석방된 쟝발장입니다. 그가 출소한 후 여러 복지 시설을 전전하지만 전과자란 이유로 매번 거절당합니다. 때마침 친절한 브앵뉘브신부를 만나 그에 집에 거하게 되었는 데 한밤중에 또 도벽이 발동해서 은쟁반을 훔쳐 달아납니다. 경찰에게 잡히자 신부는 장발장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말합니다. 큰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감격해서 소리칩니다. “그가 한마디만 했어도 나는 쇠고랑을 차고 채찍에 맞았을텐데. 아, 날카로운 칼이 나를 찌른다. 나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그가 말하는구나. 나에게 다른 길이 없을까?”.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는 길밖에는. 그가 신부를 통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죄인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은혜, 먼저 용납하시고 다음에 고치시는 은혜입니다.
그때 등장하는 인물이 쟈베르 경감입니다. 그는 장발장이 수감된 감옥의 교도관이었습니다. 그 무렵 장발장은 임시 석방 규정을 어긴 채 어느 소도시의 시장이 됩니다. 쟈배르는 장발장의 과거를 알아내고 그에게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기로 결심합니다. 자베르는 쟝발장위 범죄를 응징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끝까지라도 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쟈베르를 장발장은 여러번 구해줍니다. 한번은 자베르를 단번에 죽여 없앨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줍니다. 그런 장발장의 태도에 쟈베르는 고통을 느끼고 극도의 혼란에 빠집니다. 왜 원수같은 나를 장발장은 살려줄까? 차라리 나를 미워한다면 나도 그를 마음껏 미워할텐데. 쟈베르는 장발장의 뜻밖의 은혜를 입고 완전히 무너집니다. 빅톨 위고는 이 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장발장은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자신의 삶을 지탱했던 모든 원칙은 이 남자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자베르는 장발장의 관용앞에 숨이 막혔다. 그는 정많은 악인이자 자비로운 죄수였다. 친절하게 도와주고, 악을 선으로 갚고, 미움을 용서로 갚고, 보복하기 보다 사랑으로 동정하고, 적을 해치기 보다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구해주고, 미덕앞에 무릎꿇고 인간이기에 천사같은 사람, 자베르는 이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불가능해’. 자베르가 믿었던 모든 것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사실에 물샘틈없이 포위당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잃었다. 그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자베르는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죽는 것은 안되었지만 이 소설이 드러내고자 하는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은혜는 율법을 이긴다”는 성경적 진리입니다.
이 소설은 단지 감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성경적 진리를 담았습니다. 은혜라는 진리입니다. 여기 나타난 쟈베르 경감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타난 바리새인이요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인간을 법의 관점에서 판단합니다. 그는 인간이 잘못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잘못을 찾아내 응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신부를 통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먼저 받아주고 다음에 고치는 은혜, 은혜는 끊임없이 재생산합니다. 은혜는 은혜로밖에는 갚을 수 없습니다. 장발장은 신부에게 받은 은혜를 자베르에게 베풉니다. 결국 은혜가 율법을 이깁니다. 사랑이 정의를 이깁니다. 용서가 복수를 이깁니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발견한 몇 가지 성경적 진리가 있습니다. “은혜는 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존 밀러의 말입니다. 장발장은 신부에게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분명히 물건은 훔쳤는 데 선물로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가지 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받아야 줍니다. “그 사랑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 그래서 조노 라인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주체이기 전에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는 사랑을 실행하는 주체가 되기 전에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대상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으시면 우리는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로 된다”(월터 트로비쉬). 은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있어야 할 존재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스라엘 격언에도 그런 격언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다가가면 아이들은 도망간다. 그러나 부모가 제 자리에 서 있으면 아이들은 돌아온다”. 하나님도 우리를 추격하지 않고 기다렸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롬5장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변화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연약한데도, 여전히 죄인인데도, 여전히 원수같은 데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도 이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은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님께 향유를 드리고 죄인인 여자가 어떻게 예수님앞에서 항아리를 깨뜨려 그 비싼 향유를 부을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답은 딱 하나입니다. “받은 은혜가 많아서”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이어 나온 비유가 탕감의 비유입니다. 탕감의 비유는 한마디로 많이 받으면 많이 주고 적게 받으면 적게 주는 것입니다. 많이 용서받으면 많이 베풀고 적게 용서받으면 적게 베푸는 것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의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직분때문이 아닙니다. 복받으려고 헌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은 이미 받았습니다. 의무감, 사명감때문도 아닙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이 의무감입니다. 의무감이 우리를 율법주의자 되게 합니다. 딱 하나 이유가 있습니다. 은혜 때문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성경을 보실까요? 눅7:38,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밪추고 향유를 부으니”. 왜 이렇게 죄인인 여자는 예수님 뒤에 서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일까요?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쁘게 상처받는 것입니다. C,S.루이스가 <네 가지 사랑>에서 사랑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받은 자앞에 과감하게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킨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라.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분명 아플 것이고 어쩌면 부서져 버릴 수도 있다.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고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면, 누구도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말라”.
희생이 무엇입니까? 내가 해야 할 그 이상을 하는 것입니다. 의무이상을 하는 것입니다. 가령 목사가 주일날 설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마땅히 쉬도록 되어 있는 월요일도 안쉬고 교회에 나와 일하면 그것은 희생입니다. 교회 집사가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 두 시간씩 기도하고 화요일에 전도하고 금요일에도 기도하면 그것은 희생입니다. 돈많은 회장이 매주 10만원씩 감사헌금하면 희생이 아닙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성도가 그렇게 하면 희생입니다. 신자가 십일조 하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의 이조를 하면 그것은 희생입니다. 교사가 주일날 교회 나와 어린이들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매일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심방하고 전도하면 그것은 희생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죄인인 여자처럼 받은 은혜가 많아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용납받는 은혜가 많아야 합니다. 많이 희생하기 위해서는 일을 많이 할 것이 아니라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면 희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제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데 의자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습니다. 누가 물을 엎질렀나 생각했는 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인 한 분이 기도하다가 눈물을 쏟고 돌아갔습니다. 그 눈물을 손을 닦으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것은 성도의 눈물이 아니라 피입니다. 이 피를 받아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피흘리는 것은 우리가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상처받으면서 또한 사랑받는 사람에게 상처를 요구합니다. 받는 상처, 갚는 상처가 있습니다. 받는 상처가 희생이듯이 갚는 상처도 희생입니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여 기쁘게 희생했기 때문에 우리도 부모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희생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서 희생했기 때문에 그 희생을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자식도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상처받고 사랑받으면 희생합니다. 마리아의 향유는 그래서 곧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예고편입니다. 마리아가 희생해서 우리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희생했기 때문에 우리도 희생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우리를 위해 값없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을 값없이 드립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마음과 정성을 쏟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영웅이 아닙니다.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많이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한 것 밖에 없습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그렇습니다. 받은 은혜 때문에 봉사하고 받은 은혜 때문에 기도하고 받은 은혜 때문에 섬깁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 희생할 이유를 아셨습니까? 많이 받았기 때문에 많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평생 그 사랑 넘치게 받아 우리 사는 동안 많은 사랑을 하나님과 세상에 나누어 주기 바랍니다.
사순절(2) 눅7:36-39, 요12:1-8 2014.4.6(일)
희생적 낭비
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희생이 세상을 살립니다
희생의 배후에 은혜가 있습니다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레미제라블(책)
“장발장은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자신의 삶을 지탱했던 모든 원칙은 이 남자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자베르는 장발장의 관용앞에 숨이 막혔다. 그는 정많은 악인이자 자비로운 죄수였다. 친절하게 도와주고, 관대하고, 악을 선으로 갚고, 미움을 용서로 갚고, 보복하기 보다 사랑으로 동정하고, 적을 해치기 보다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구해주고, 미덕앞에 무릎꿇고 인간이기에 천사같은 사람, 자베르는 이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불가능해’. 자베르가 믿었던 모든 것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사실에 물샘틈없이 포위당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잃었다. 그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다”(레미제라블).
“은혜는 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존 밀러)
“우리는 사랑의 주체이기 전에 사랑의 대상이다”(조노 라인보).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으시면 우리는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로 된다”(월터 트로비쉬)
“부모가 자녀에게 다가가면 자녀들은 도망간다. 그러나 부모가 제 자리에 서 있으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돌아온다”(이스라엘 격언)
그래서 우리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눅7:38,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밪추고 향유를 부으니”.
C,S.루이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받은 자앞에 과감하게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킨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라.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분명 아플 것이고 어쩌면 부서져 버릴 수도 있다.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고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면, 누구도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말라”(네가지 사랑).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절(눅24:13-35) 길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 2014.4.20.(일) (0) | 2019.07.04 |
---|---|
사순절(3) 눅22:39-46 겟세마네 기도 2014.4.6(일) (0) | 2019.07.04 |
사순절(1) 눅9:51-56 무모한 도전 2014.3.30(일) (0) | 2019.07.04 |
제자의 삶(11) 롬8:28-30 2014.3.16(일) (0) | 2019.07.04 |
제자의 삶(12) 롬8:31-39 2014.3.23(일) (0) | 2019.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