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3) 눅22:39-46 2014.4.6(일)
겟세마네 기도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계절입니다. 이 거룩한 계절에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일 당신의 삶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누구나 이런 질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토퍼 몰리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묻고 스스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우리가 사랑한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랑한다고”.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하겠습니까? 아마 죽음앞에 넋을 놓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조금 정신이 든 후에 주섬 주섬 핸드폰을 꺼내 정신없이 전화번호를 찾을지 모릅니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그리고 남편, 아내, 친구...그리고 떨리듯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엄마? 사랑해. 그리고 감사해”. “아들아, 사랑해. 그리고 고마웠다”. “여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그런데 만일 우리의 삶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하루란 시간이 그렇게 짧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내가 가진 인생의 고민이란 것이 죽음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구나. 왜 내가 이런 쓸데없는 문제로 고민하고 살았는가?” 또 “아, 내가 미워하고 갈등하고 살았던 그것이 죽음을 앞에 두고 보니 아무 짝이 쓸데 없는 것이구나. 왜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살았지?” 그리고 뒤늦게 자신을 되돌아 볼 것입니다. “아, 나는 내 일생을 최선을 다해 살았나? 나는 땅에 할 일을 다한 것인가?”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갑자기 길을 나설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남은 미련을 털어버리기 위해 혹시 여행을 떠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죽음을 하루 앞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선택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믿는 사람은 물론 안 믿는 사람도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기도를 선택할까요? 기도밖에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능자앞에 무력자로 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모두 기도의 일생이었지만 특히 그의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은 모두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마쳐졌습니다. 그의 삶의 첫 장면에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공생애 시작을 광야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마칩니다. 39절을 보실까요? 눅22:39, “예수께서 나가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인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입니까?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은 늘 입버릇처럼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가 죽을 때 기도하다 죽게 하옵소서”. 드디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자 그는 자신을 교회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앉았던 자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뒤에서 그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밤이 깊어 권사님의 숨소리가 잦아 들었습니다. 가족이 가까이 와서 보니 숨을 거두었습니다. 평소에 그가 기도한대로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간 것입니다.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기도하다 하나님께 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기도했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예루살렘 감람산 발치에 올리브 나무 숲이 있고 거기에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바위가 있습니다(그림1).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바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수님이 기도하신 동산이 있습니(그림2). 오래된 감람나무들이 지금도 서 있습니다(그림3). 그가 기도하신 자리에는 이런 작은 조작이 있습니다(그림4). 예수님이 온 몸을 던져 기도하시는 감동적인 조각입니다. 제가 이것을 사진을 찍어 저희 집에 걸어놓고 저도 예수님처럼 기도하고자 늘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가장 모범적인 기도, 죽음을 하루 앞둔 간절한 기도,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어떤 원리를 배우며 우리도 그 기도를 통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겟세마네 기도의 하이라이트는 42절입니다. 눅22:42,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예수님의 기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42절, “네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지지난 주에 설교한 대로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강제로 내쫓거나 억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필연적이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자발적 순종으로 그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기도는 자발적 순종의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인류를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계획되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운명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중의 하나가 운명주의입니다. 운명주의란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을 누구도 어거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정해진 운명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철학이 그렇게 생각하고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등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자유의지란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인격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우리에게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우리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강요함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순종하고 따르게 함으로서 이루어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가야 하는 일이 있고 우리가 노력해서 이루어가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평안을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둘 사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 내 의지를 꺽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용기를 갖게 하고 또 하나는 그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때는 내 의지가 하나님의 뜻가운데 사용되도록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국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용기요 순종입니다. 자. 하나님의뜻이 예수님이 죽어 인류를 살리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뜻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종시키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 기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이 예수님의 기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안으로 들어가시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죽음이 부활이 되게 하셨다”. 기도가 왜 중요합니까? 기도하는 것과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내 속에 있는 내 뜻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용기를 갖게 하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는 내 뜻을 겸손하고 성실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하나는 순종이고 또 하나는 용기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어려운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이 어려운 것은 내 안에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과 내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과 생각이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 그것은 선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내 뜻과 내 생각은 자주 하나님의 뜻에 반항합니다. 여기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케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가 늘 순종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다시 42절입니다. “주여,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도 자신안에 자기의 뜻을 복종시키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안에 있는 자아를 깨뜨려 하나님 뜻에 복종케 합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는 자기의 의를 깨뜨려 하나님앞에 복종시킨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더큐 에스트라는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기도란 나의 의를 하나님의 의와 바꾸는 영적 과정이다”. 자기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과정이 기도입니다.
지금도 겟세마네 동산에 가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자리에 이런 시가 영어로 쓰여 있습니다. "Father, I do not understand you, but I still trust you". "아버지, 내가 당신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신뢰합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도 하나님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능력이 많으신데 굳이 당신의 아들을 죽이지 않고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는 것은 너무 힘든 일입니다. 아버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다가 예수님이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의 뜻은 understand,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trust,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마음으로 신뢰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신뢰하려고 하면 쉽습니다.
오래전에 유치원에 다니던 제 아들이 난로 뚜껑에 넘어져 눈이 찢어졌습니다. 급히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간호사들이 아들을 이동용 침대에 눕히더니 양손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아들의 눈을 꿰매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너무 아파 소리칩니다. “아빠, 아파, 저 아저씨가 날 아프게 해. 못하게 해 줘. 못하게 해 줘” 가슴이 찢어졌지만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안절 부절 의사 한 번 보고 아들 한 번 보고. 그 현장에서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이를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의사의 수술을 못하게 할 수도 없고, 아픈 아이보고 무조건 참으라고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들에게 설명한다고 아들이 이해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아들은 제가 자기를 죽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아빠로서는 기대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아들이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신뢰하기를. 그 상황에서 아들이 아빠를 마음으로 믿어주기를.
그런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렇게 기도많이 하는 분이 새벽기도에 나오다가 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주님을 위해 열심히 목회하시던 분이 불치병에 걸려 고통을 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쉬지 않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준다고 하더니 몇 달 기도해도 안되는 일만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We do not understand”, 우리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I still trust you".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해 기도했는 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예수님처럼 기도를 통해 자신을 복종시키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더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예수님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온 몸을 쥐어짜 마지막 한 방울 진액이 나오는 것 같은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동산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하는데 “겟세마네”란 “기름을 짠다”는 뜻입니다. 감람산은 감람나무, 즉 올리브가 많은 동산입니다. 올리브는 지금도 이스라엘 농촌의 주요 식량이요 기름입니다. 식용으로, 미용으로, 치료제로, 등불로, 성경시대에는 왕이나 제사장 머리에 붓는 기름으로, 지성소를 밝히는 등대 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으면서 여러번 이 올리브 기름 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리브 기름을 짜는 기계입니다(그림4,5,6). 커다란 돌에 올리고 그 돌로 올리브를 누르면 연하고 순한 물이 나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기름을 네 번 이상 짯다고 합니다. 작고 부드러운 올리브가 돌 밑으로 놓이면 무거운 맷돌이 돌아가면서 올리브는 부숴집니다. 껍질은 다 깨지고 속에 있는 씨도 잘게 부숴집니다. 그러면 살점이 으깨지면서 연한 물이 나옵니다. 첫 번째 짠 것으로 제사장이나 왕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두 번째 짜서 성전에 있는 등대 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세번째 짜서 가정용 식용유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짜서 가정의 등불로 사용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처녀 비유에 나오는 기름은 이 올리브 기름입니다. 우리는 올리브 기름이 “연하다”. “부드럽다”, “몸에 좋다” 쉽게 말하지만 그 기름이 나오기까지 올리브는 얼마나 많이 자기를 깨뜨려야 합니까? 그것이 부숴지는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지 않고는 좋은 기름을 얻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다시 44절을 볼까요?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이것이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자신의 몸을 무거운 돌로 눌러 짜는 기도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는 그냥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까 힘들지 않고 쉽게 기도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날 밤 예수님을 무거운 돌로 짓눌렸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힘들게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했는지 보여줍니다. 마26:37-38,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이 이렇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신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마가복음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막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가실 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여러분, 예수님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죽게 되었다고까지 말합니까? 제기 어렸을 때 이런 구절을 보면서 시험까지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죽고 싶다고까지 말할까? 그것은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어떻게 예수님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싶은 때가 있습니까? “하늘아래 땅위에 아무도 나를 몰라주고 오직 세상에 나밖에 없구나” 하는 깊은 절망감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아,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구나”. 이렇게 느낀 적은 없습니까? 이것이 겟세마네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름을 짜듯이 기도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고통없이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무런 고통없이 저녁에 커피 한 잔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언제나 하는 일이 잘 되어 숲속의 새처럼 노래하면서 기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제 우리가 기도하는 상황은 무거운 돌들이 우리를 짓눌려 우리의 진액을 짜내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은 인생의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던 어느날 자기 집이 다른 사람에게 보증잡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친척중의 한 사람이 아무 상의도 없이 집사님의 도장을 위조하여 보증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시한이 넘어 아무런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거기다가 장모님이 갑자기 중풍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너무 어려워 입원비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교감이었던 이 분이 교장 승진에 또 떨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막막한 일이 없습니다. 일이 안될 때는 한꺼번에 안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이것을 “머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안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하고 방황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결심하고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제가 들으니까 한 분이 큰 소리로 웁니다. 누가 우나 보니까 그 집사님입니다. 마치 무슨 큰 돌이 누르듯이 그는 힘들게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온 몸의 기름을 짜듯이 몸을 비틀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가서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시25:16-17,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에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그가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곧 그를 도우셨고 그는 회복했습니다. 집 문제도 해결되어 집을 다시 찾았고 얼마 안되어 교장승진도 했습니다. 어머니도 많이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냥 장로가 아닙니다. 그 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했던 전주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안고 어디로 가느냐입니다. 고통을 안고 교회 기도실로 오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고통은 그를 기도로 내몰고 기도는 그에게서 고통을 내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셨고 또한 높이셨습니다. 고통이 그를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기 몸을 부숴 진액을 짜내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마지막은 45-46절입니다. 눅22:45-46, “기도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겟세마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고 오자 아직도 제자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여러분, 믿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시험이 몰려오는 것을 아십니까? 시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약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에 시험의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여러 가지 시험”입니다. 시험의 종류입니다. 다양합니다. “당합니다”. 헬라어로 이 말은 “페리패세테”, “가운데로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 인생의 한 복판에 어느날 뚝 떨어집니다. 갑자기 떨어지기 때문에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 당합니다. 누구나 당합니다. 3인칭 복수입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이 옵니다. 우리는 이 시험을 막을 수도 없앨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갑자기 이상한 환경이 조성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기도해서 달라지는 첫 번째는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기도가 상황을 바꾼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성경적인 말은 “기도는 먼저 나를 바꿉니다”. 그리고 바꿔진 나를 통해 상황이 바뀝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한다고 해도 이 세상의 시험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모든 시험을 이깁니다. 시험을 없애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라 시험을 이기는 것이 우리 일입니다. 기도하면 이깁니다.
저는 재작년에 영국 콜체스터(Colchester)를 방문했습니다. 런던에서 한 두 시간 정도거리에 있는 콜체스터는 160년전에 살았던 유명한 목사님 스펄전의 고향입니다(사진). 이곳에 스펄전이 16살 때 하나님 만난 교회가 있습니다. 스펄전은 믿음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믿음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싸 하게 살았지만 기쁨이 없는 채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16살 때 그 마을에 엄청난 눈이 왔습니다. 그때 마침 그 마을에 있는 알티머리 스트리트 초대감리교회(Primitive Methodist Caple)도 눈이 많이 와 멀리 사는 담임목사님도 못 오게 되자 갑자기 평신도가 설교해야만 했습니다. 그 날 교회 나온 사람중에 직분이 제일 높은 사람은 구두 수선공하는 남자 집사였습니다. 그가 어떨결에 단상에 올라갔는 데 그는 사실 아무 준비도 없었습니다. 한편 어린 스펄전은 너무 눈이 많이 와서 갈데가 없어서 교회로 피했습니다. 그때 구두 수선공 집사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은 사45:22절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이 집사가 설교를 시작했는 데 설교는 어눌했고 회성수설했지만 그날 했던 설교가 스펄전으로 하여금 하나님 만나게 했습니다. 그때 설교를 스펄전은 훗날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여러분, 보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손과 발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지금 현재 주 예수님께서는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수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일어났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하늘로 들리움을 받았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있노라. 오! 불쌍한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이렇게 외치고 나서 설교자는 어린 스펄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여, 젊은이는 너무 비참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할 일은 바라보며 사는 것뿐입니다!”. 구두 수선공 집사는 설교 준비를 못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는 데 하나님은 그 설교를 통해 스펄전을 회심하게 했습니다. 설교자가 “바라보라. 바라 보라. 예수님을 바라보라” 할 때 갑자기 스펄전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가 구원받았음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속으로 외쳤습니다. “아, 나는 용서를 받았다! 한량없는 은총이여! 죄인이 주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 어둠은 물러갔고 태양을 보았다. 내 영혼의 쇠사슬이 끊겼다”. 그 날이 1850년 1월 6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스펄전이 세계적인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로 세게에서 가장 큰 15000명 들어가는 교회를 짓고 100만명 이상의 영국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구원의 확신도 믿음의 능력도 그에게 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임을 믿습니까?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예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스펄전을 살리고 우리를 살렸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 후 제자들은 많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한 제자만 살아 남았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베드로도 예수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자살하고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가롯 유다는 죄지은 자신을 바라보고 베드로는 의로우신 예수님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죄짓고 기도하지 않았고 베드로는 죄짓고 기도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기도하겠습니까? 인생의 무거운 고통이 여러분을 덮을 때 예수님께 나아와 기도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바라보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에 여러분의 뜻을 복종시키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올리브 기름짜듯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겠습니까?
사순절(3) 눅22:39-46 2014.4.6(일)
겟세마네 기도
눅22:39, “예수께서 나가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바위(그림1).
예수님이 기도하신 동산(그림2).
오래된 감람나무(그림3)
기도의 조각(그림4).
눅22:42,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주여,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평안을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둘 사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라인홀드 니이버)
기도는 내 의지를 꺽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순종하게 하고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용기를 갖게 한다.
“기도란 나의 의를 하나님의 의와 바꾸는 영적 과정이다”(더큐 에스트)
"Father, I do not understand you, but I still trust you" (아버지, 내가 당신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신뢰합니다)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더니
올리브 기름을 짜는 기계(그림4, 5, 6).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마26:37-38,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막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가실 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시25:16-17,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에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눅22:45-46, “기도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의 세 가지 특징
- 여러 가지다
- 당한다(페리페세테)=“가운데로 뚝 떨어진다”
누구에게나 온다
챨스 스펄전(사진)
사45: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여러분, 보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손과 발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지금 현재 주 예수님께서는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수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일어났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하늘로 들리움을 받았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있노라. 오! 불쌍한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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