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5:21-28 2014.5.4(일)
내 딸을 살려주세요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자녀입니다. 시127:3, “보라. 자식들은 여호아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녀는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성경의 기업은 “선물”입니다. 노력하지 않았는 데도 공짜로 받은 선물이 “기업”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이유없이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도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들입니다. 며칠전 T.V에 나온 내용입니다(영상).
어떻습니까? 내 아들, 내 딸을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부모들의 절규가 들립니까? 고통없이는 들을 수 없는 절규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백지장 한 장 차이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고통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당하면 누구도 똑같이 탄식하고 똑같이 울게 됩니다. “고통은 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까?” 지난 주에 이어 또 다시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쉬운 질문이었다면 지난 주 한 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또 질문합니다. “왜 우리에게 고통은 오며 고통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통을 안고 울부짖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입니다. 21-22절 말씀입니다. 마15:21-22,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두로와 시돈은 지금 레바논에 속한 땅이지만 성경시대에는 “페니키아”라고 불렀습니다(지도). 페니키아는 인류 역사에 두 가지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나는 좋은 기여고 하나는 나쁜 기여입니다. 좋은 기여는 인류 최초의 알파벳이 여기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페니키아의 알파벳은 모든 언어의 모국어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어가 거기서 나왔고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불어가 그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나쁜 기여도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바알종교가 태어난 것입니다. “바알”이란 “주인, 주님”이란 뜻입니다. 농사를 짓던 그들에게 “바알”이 하늘에서 비와 풍요를 내려준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바알 종교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종교였습니다. 이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 누구도 좋아할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더구나 가나안은 노아의 아들인 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거기 사는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도 상종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그곳으로 들어가십니다. 다시 21절을 볼까요? 마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1절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이곳에 들어가신 것은 우연이거나 어쩔 수 없이 가신 것이 아닙니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안 가고 싶은 데 억지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싫어하는 땅, 성경이 저주하라고 명령한 땅, 하나님의 자리에 물질을 그 자리에 놓은 우상의 땅, 그 땅으로 오늘 주님은 들어가십니다. 왜 예수님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싫어하는 땅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까? 자기 딸 때문에 고통하고 있을 여인이 거기 있는 것을 아시기라도 한 것일까요? 과연 그 땅에 들어가자 마자 한 여인이 뛰어나오면서 이렇게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이 여인의 딸이 어떤 귀신에 들렸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병이 있었고 한번 병에 걸리면 대부분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평균 수명이 30세 전후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100년전까지만 해도 50세를 살았습니다. 60세만 살아도 장수한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예수님이 삶의 방식은 항상 이러했습니다. 그곳에 고통이 있는 줄 알면서도 들어갑니다. 고통의 현장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가지 않았던 소외된 땅 사마리아에 스스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을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올라갑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무신론적인 땅에 스스로 사람의 종이 되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고통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는 데 예수님은 고통의 현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고통의 현장을 피하지 않으신 주님, 그래서 고통은 일생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고통이 있습니까? 우리는 솔직히 우리에게 왜 고통이 있습니까 라고 물을 겨를도 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왜 고통이 옵니까 하고 물을 정도면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왜?”하고 차분히 묻기 전에 “어떻게?” 라고 다급하게 질문합니다.
감사하게도 어떤 학자가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수치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은 아내, 남편, 배우자의 죽음이랍니다. 그것을 100이라고 한다면 다른 고통은 그것과 비교하면 됩니다. 배우자와의 결별이 73으로 두 번째입니다. 자녀나 부모, 형제의 죽음이 63으로 세 번째입니다. 재미있게는 결혼이 50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좋아보여도 결혼은 당사자에게 스트레스와 고통이 요구합니다. 결혼의 고통은 고3수험생의 고통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출산했거나 입양했거나 부모를 모시게 될 때, 새로운 가족과 함께 살게 될 때 고통지수가 39입니다. 직장이나 돈벌이, 일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30점대입니다. 직장에 들어가고 그만 두고 학업을 시작하고 마치는 데 따른 고통이 20점대입니다. 그리고 여가, 취미생활, 자고, 입고, 먹고하는 일등으로 생긴 고통이 10점대입니다.
문제는 이 고통들이 하나씩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피의 법칙처럼 한번 나쁜 일이 생기면 계속 생깁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욥은 어느날 갑자기 스바족속이 쳐들어와 모든 재산을 빼앗아 갑니다. 생일날 잔치하고 있는 데 갑자기 태풍이 불어 10 아들, 딸이 다 몰살합니다. 갑작스럽게 몸에 악창이 나더니 급히 썩어들어갑니다. 그렇게 믿었던 아내마저 욥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어떤 학자가 욥이 당한 고통을 합계해 보니1000점이 넘습니다. 고통의 합계가 200을 넘으면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200, 300을 넘으면 큰 병에 걸리든지, 자살하든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1000점이 넘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고통의 합계가 300을 넘은 사람의 49%가 1년안에 병이 걸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런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Why me?”, “왜 나입니까?” 이것이 모든 사람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믿는 사람이 하는 가장 많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성경은 이 질문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고통당할 때 예외없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먼저 기드온입니다. 갑자기 미디안이 모래알처럼 이스라엘에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무 방어태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 기드온이 소리칩니다. 사6:13,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욥이 갑작스런 고통을 연이어 당할 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욥19: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다윗이 사울로부터 여러번 고통당할 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시44: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소서”. 시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하박국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소리쳤습니다. 합1:2-3,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소리쳤습니다. 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외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첫째 누구나 고통당한다. 둘째 누구나 고통당할 때 소리친다.
고통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올 때 소리치는 것이 고통에 대한 성경의 유일한 해답은 아닙니다. 고통이 주는 성경적 처방은 고통이 올 때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보시겠습니까? 아마도 이 여인은 딸이 아프기 전에는 하나님을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딸이 아프기 전에는 인생의 아픔도 고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때마침 마을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마15:22,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이 여인이 결국 예수님께 나온 것은 그녀가 겪는 고통때문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만일 그에게 고통이 없었는데도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바알이 제공한 풍부한 비와 풍성한 곡식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오자 이 인생 철학에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인생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존재의 문제입니다. 존재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나 하다가 고통이 생기면 질문이 바뀝니다. 왜 사나? 무엇을 위해 사나? 소유적 관점에서 존재적 관점으로 질문이 바뀝니다. 그 중심에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은 지고의 선은 아니지만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고난을 차선의 선이 됩니다.
고난이 항상 유익은 아니지만 가장 좋은 유익은 우리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가 <고통의 영성>에서 말했습니다. “고통의 가장 큰 유익은 고난이 올 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히5:8절도 영어 성경 NIV에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히5:8, “Although he was a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what he suffered”. (그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당하신 고통으로부터 순종을 배우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고통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하물며 피조물인 우리는 오죽 하겠습니까? 고통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그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통 사람을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게 합니다. 그래서 일생을 5만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은 영국의 죠지 뮬러가 말했습니다. “고통은 사람을 기도로 내몰고 기도는 사람에게서 고통을 내몬다”. C.S.루이스도 그의 <고통의 문제>에서 말했습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확성기이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통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잘 안들립니다. 그러다가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고통당할 때 사람의 소리가 작아지고 하나님의 소리가 커지지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도 그런 분이었습니다. 본래 불교 집에서 태어나기도 했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무관심할 뿐아니라 교회를 싫어하고 미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위 공무원으로 높은 직책에서 일하고 돈도 많기 때문에 굳이 청승맞게 교회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하나 있는 아들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이상한 말을 하고 헛것이 보인다고 합니다. 백방으로 다녀봐도 낫지를 않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교회를 가면 좋아진다” 하니까 아들과 함께 교회를 나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제 방으로 오더니 넙죽 절을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목사님, 제 아들을 좀 고쳐주세요”. 자기 잘난 맛으로 똘똘 뭉친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고쳐주옵소서. 저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이럴 때 잘 고쳐줍니다. 결국 아들이 고침받고 교회나왔습니다. 지금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주 불러 내는 방식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아내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동안 아내따라 겨우 교회 나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아주 잘 나옵니다. 고통이 그를 하나님께 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많이 울고 가슴아파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잘 나옵니다. 고통을 통해 순종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아픕니다. 딸이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옵니다. 고통이 그를 기도로 내몬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 가나안 여인이 결국 예수님께 받은 응답이 있었습니다. 28절, 마15:2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결국 고통은 그녀를 기도로 내몰고 기도는 그녀에게서 고통을 내몰았습니다. 그렇게 귀신들려 괴로워하던 딸이 깨끗이 고침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주님은 여인의 믿음에게서 찾았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과연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서 보았던 믿음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어떤 믿음을 기대하실까? 저는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네 가지 믿음을 보았다고 믿습니다.
1) “우리가 세상에 사는 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고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첫 번째 성경적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주인공은 이방인입니다. 성경에는 이방인이든 유대인들이든 동일하게 고통을 당합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언뜻보면 우리에게 오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운명주의의 오해입니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듯이 “인생은 고해야. 태아날 때부터 생노병사의 고통을 안고 태어나. 그러니 고통은 피할 수 없어.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여. 조금 네가 노력할 수 있다면 욕심을 버려. 고통은 타고 나지만 네 안에 있는 욕심으로 더 커지거든. 그러니 욕심을 버려. 일체중생 탈고집이야. 모든 중생이 고집을 버리면 그때부터 행복해”. 이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입장은 다릅니다. 결과는 비슷하지만 이유가 전혀 다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 성경의 고통은 밖에서 옵니다. 우리 죄에 대한 대가로 사탄이 밖에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선하게 창조했지만 죄로 인해 이 땅은 사탄이 지배하는 적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고통은 끊이지 않습니다. 고통은 내 안에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존재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이 사라지지 않은 한 이 땅에 악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번에 진도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안전에 대한 많은 노력과 정책이 있을 것입니다. “국가안전처”를 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좋아지겠지만 개인적인, 집단적인 고난은 앞으로도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선장의 부도덕이나 정부의 무대책, 선주의 탈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죄와 실수를 통해 일어나겠지만 반드시 일어납니다. 고통이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창9:22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노아 홍수가 마친 후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노아홍수가 마칠 때 하나님은 무지개를 통해 다시는 이 땅에 홍수가 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과 함께 또 하나의 선언이 주어졌습니다. “앞으로 너희가 땅에 사는 동안에는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하리라”. 이 둘은 서로 다릅니다. 홍수가 없으리라 했다면 밤은 없고 낮만 있어야 합니다. 추위는 없고 더위만 있어야 합니다. 겨울은 없고 여름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이고 또 하나는 죄로 인해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땅의 현실에 관한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이 있지만 그렇다고 땅에서 우리가 당하는 여러 종류의 고통도 함께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마13장 밀과 가라지 비유에서 주님이 농부에게 가라지를 뽑으라고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 농부가 가라지를 뽑는 것을 주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밀밭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늘 함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최종적으로 완전히 뽑을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30절입니다. 마13:30, “둘 다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과도기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말하자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에 사는 것입니다. 광야에 있으면 광야의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습니다. 가나안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우리는 광야의 현실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고통이 있을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믿음입니다.
2)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계신다”
두 번째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고통을 그대로 두신다 해서 우리가 고통당할 때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제 인생에서 제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2000년 1월, 교통사고로 병원에 누어 있을 때입니다. 그때 교인들이 찾아와 “목사님, 일어나세요. 우리가 기도하고 있어요” 카드로, 음식으로, 심방으로 얼마나 저를 많이 찾아왔든지 제가 지금 솔직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몇 달 있다가 의사가 퇴원하라고 하는 데 저는 정말 안 나가고 싶었습니다. 퇴원하라 하는 데 별로 기쁘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러겠습니까? 그렇게 애지 중지 사랑받던 것을 못 받을 생각하니 세상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어릴 때 엄마의 손이 가장 가까이 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어릴 때 사과 먹고 누어서 엄마에게 “엄마, 아파” 하면서 응석부릴 때가 언제입니까? 아플 때입니다. 그래서 사과먹고 사랑받고 싶어 가끔 우리가 꾀병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손이 사람에게 직접 닿을 때가 언제입니까? 아플 때입니다. 실로암 못가에서 고침받은 맹인 보세요. 예수님이 진흙에 침을 밷어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피조물의 몸에 닿는 순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왜 침을 발랐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는 침을 교환합니다. 가족끼리 찌개를 가운데 놓고 네 침, 내 침 섞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자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오늘 주인공 이방인 여자를 유대인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 일지라도 그에게 찾아갑니다. 어떻게 이방신을 섬기는 여자가 평생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고통당하자 예수님과 만난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매개가 그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불러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월트 휘트먼이 이렇게 시를 썻습니다. “나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느낌이 어떠냐고 묻지 않는다. 내 스스로 상처 입은 사람이 된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4세기의 교부 예루살렘 시릴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당하는 자를 안으려고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렸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3)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신다”
고통당할 때 우리가 믿을 세 번째 믿음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요?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요9장에 실로암 장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그가 장님이 된 것은 누구의 죄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대답했습니다. 요9: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우리는 고통당할 때 누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느냐고 묻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통해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 가실까를 생각합니다. 가나안여인이 예수님께 나올 때 그는 단지 딸의 치료를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계획일까요? 제가 오래전에 이스라엘에 있을 때 두로와 시돈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과거 비잔틴, 십자군시대에 많은 기독교인이 살았슴을 알았습니다. 2세기 유명한 교부 오리겐도 거기 묻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을 고쳐주신 사건, 그 사건이 우리가 볼때는 작은 사건이었지만 하나님이 가나안을 구원하려는 거대한 계획의 한 부분이었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땅, 바알과 물질을 섬기는 우상의 땅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때 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무엇을 하시나요? 고통을 재사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만드십니다. 구약성경은 이것은 “속량한다”고 하고 신약성경은 이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recycle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재사용”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더 쉽게 말하면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모세가 사람 둘을 죽이고 광야로 쫓기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그가 호렙산 불꽃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8번 죽을 뻔 했습니다. 그 일로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시편 150편을 썻습니다. 만델라와 김대중이 인권운동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일로 그들은 노벨상을 타고 대통령 되었습니다. 어린 강영우가 중학교 2학년 축구하다 실명되었습니다. 그 일로 그가 맹아원에 들어가 천사같은 아내를 만나고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가 되고 한국인 최초로 백악관에서 일했습니다. 무신론자 이어령의 딸이 암에 걸리고 손자가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로 인해 그가 영혼의 문지방을 넘어 지금 가장 강력한 영혼의 변증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고3때 연탄까스로 대학진학이 막히자 신학교에 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도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일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재사용하시고 고통을 바꿔 선이 되게 하십니다. 시30:11절과 같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고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띄 띄우셨나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4) “우리는 결국 고통을 이기고 최후 승리할 것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마지막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최후 승리한다”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증거라는 위대한 믿음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한다”. 고난에 대한 성경적 믿음을 다른 종교와 간단히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불교-고통은 네 안에서 온다. 마음의 욕심을 버려라.
이슬람교-고통은 알라에게서 온다. 모든 것이 그의 뜻이다.
힌두교-고통은 전생의 업보에서 온다. 달게 받아라. 그러면 다음 세상에서 좋게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통은 죄에서 온다.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셨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그때 너희는 최후 승리할 것이다. 그때까지 너희는 죄와 싸워라. 그리고 부지런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너희는 이미 이겼고 또 이길 것이다. 세상 끝날 때까지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이미 이겼고 앞으로도 이길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로 이겼고 최후에도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부스러기“란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은혜는 부스러기 은혜입니다. 부스러기는 빵의 일부분, 전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체를 다 모르는 채 이 땅에서 부스러기 은혜를 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가끔은 지고 가끔은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에 이길 것이고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 목회자들과 함께 안산 합동분향소에 갔습니다. 거기서 안타깝게 죽은 사람들 보며 눈물과 함께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에게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한 고통을 안겨준 비겁하면서도 잔인한 죽음의 세력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그때 마음으로 소리쳤습니다. ”죽음아, 지금은 너희가 득세하고 있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예수께서 이기셨고 또 이기실 것이니,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한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로 고통을 이기신 주님 때문에, 너 죽음은 반드시 정복될 것이니, 너 죽음아, 물러서라. 너는 곧 망할 것이니. 명을 죽음으로 몰고간 너 죽음아, 내가 너는 정죄하노라. 주님이 너를 이겼고 또 이기리니 우리도 모두 너를 정복하고 이기리라“. 아멘. 이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15:21-28 2014.5.4(일)
내 딸을 살려주세요
시127:3, “보라. 자식들은 여호아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마15:21-22,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두로와 시돈(지도).
마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고통의 지수
배우자의 죽음=100
배우자와의 결별=73
자녀나 부모, 형제의 죽음=63
결혼=50
출산했거나 입양했거나 부모를 모시게 될 때=39
직장이나 돈벌이, 일 때문에 생기는 고통=30점대
직장에 들어가고 그만 두고 학업을 시작하고 마치는 데 따른 고통=20점대
여가, 취미생활, 자고, 입고, 먹고하는 일등으로 생긴 고통=10점대
사6:13,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욥19: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시44: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소서”.
시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합1:2-3,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마15:22,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필립 얀시, “고통의 가장 큰 유익은 고난이 올 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히5:8, “Although he was a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what he suffered”. (그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당하신 고통으로부터 순종을 배우셨다).
죠지 뮬러, “고통은 사람을 기도로 내몰고 기도는 사람에게서 고통을 내몬다”.
C.S.루이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확성기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마15:2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1) “우리가 세상에 사는 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창9: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마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13:30, “둘 다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시니라”.
2)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계신다”
월트 휘트먼, “나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느낌이 어떠냐고 묻지 않는다. 내 스스로 상처 입은 사람이 된다”.
예루살렘 시릴,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당하는 자를 안으려고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렸다”.
3)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신다”
요9: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시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고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띄 띄우셨나이다”.
4) “우리는 결국 고통을 이기고 최후 승리할 것이다”.
불교=고통은 네 안에서 온다. 마음의 욕심을 버려라.
이슬람교=고통은 알라에게서 온다.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다.
힌두교=고통은 전생의 업보에서 온다. 달게 받아라. 그러면 다음 세상에서 좋게 태어날 것이다.
성경=고통은 죄에서 온다.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셨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그때 너희는 완전히 승리할 것이다. 그때까지 너희는 죄와 싸워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너희는 이미 이겼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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