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눅24:13-35) 2014.4.20.(일)
길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주일은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기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주에 우리 모두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좌초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실종되었습니다(사진1). 그 속에는 아직 채 피어나지도 않은 어린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직도 사랑하는 자식을 깊은 바다에 두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채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하는 부모의 아픈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입니다.
저도 며칠동안 정신차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살았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죽어간 사람들, 특히 자라나는 자녀들 때문에 속상한 데다가 죽음의 세력이 잔인하고 야비하다는 생각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한자 죽을 “사”자가 꼭 그런 뜻입니다. 죽을 “사(死)”자는 한 “일”자 밑에 저녁 “석”, 칼 “비”로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어느날 저녁 갑자기 비수처럼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낮에 오면 혹 막을 수도 있습니다. 예고하고 오면 혹 대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저녁에 옵니다. 예고없이 옵니다. 그래서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전8:8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죽는 날을 주장할 자가 없나니 지진처럼 흔들림이라”. 전도서는 죽음이 마치 지진과 같다고 말합니다. 지진을 예측할 사람도 없고 피할 사람도 없는 것처럼 죽음을 예측하거나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이 사건 때문에 속상했던 것은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실재성과 일상성입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고 우리 옆에 있습니다. 죽음은 또한 잔혹합니다. 한번 움킨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고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왜 부활을 앞둔 고난주간에 일어났느냐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절기에 예수님을 죽인 동일한 죽음이 우리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 사건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천년전에 죽고 다시 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줄까? 2천년전의 부활과 오늘의 죽음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길에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 부활후 길에서 일어난 시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며칠전 예루살렘에서 죽은 예수님을 뒤로 하고 힘없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눅24:13-14, “그 날에 그들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이야기하더라”. 오늘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그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글로바입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제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알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표정이 어둡습니다. 17절 중간을 보면 눅24:17,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왜 이들이 슬펏을까? 다른 성경에 보면 이들이 침통한 얼굴로 멈춰 섰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왜 침통했을까? 아마도 사랑하던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슬픕니다. 누구나 가족을 잃으면 침통합니다. 제자들은 그 마음으로 지금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과 비슷할까요? 사랑하는 주님을 잃은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사랑하는 자녀를 잃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슬픈 마음으로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때 한 사람이 이들속에 끼어 들었습니다. 15절입니다. 눅24: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인 것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설마 그 사람이 엊그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예수님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 끼어 들었고 그는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엠마오 제자가 걸었던 이 길을 많이 걸었습니다(사진2). 여러 사람과 함께 걷기도 했고 혼자서도 걸었습니다. 길은 비포장도로이고 길 좌우에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길은 조용한 길이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자주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그 옛날 엠마오와 제자와 함께 걸었던 것처럼 저와도 동행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가끔은 예수님이 저와 함께 걷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몇 번을 걸으면서 그 길은 다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걷는 인생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갑니다. 인생은 마치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길에 대한 얘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에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곧 길의 이야기입니다. 그 길은 우리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셨고 우리는 길을 갈 뿐입니다. 시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앞에는 좁은 길, 넓은 길, 옳은 길, 의의 길, 생명의 길, 멸망의 길이 펼쳐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인생 길을 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언제나 평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여호아께 맡겨야 합니다. 시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과 같이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말할 때 성경이 쓰는 표현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365년을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앉아서 제자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마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를 보시니”. 예수님은 걸으면서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걸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부분의 말씀은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걸으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눅8장에서 19장까지는 갈릴리를 떠나 사마리아를 걸어가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사마리아 이야기”라고 합니다. 모두 12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눅19장에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평생 걸으셨고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걸으면서 가르치려 한 것은 “많이 걸어라. 걷는 것이 건강이 좋다”가 아니라 걷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믿음은 주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동행했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실까요? 눅24:15-16,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길에 부활하신 주님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정말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맥스 루케이도가 말한대로 “부활의 주님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를 믿으라. 그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신다. 그나마 항상 가까이 계신다”. (아멘). 정말 믿읍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말합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모든 문제는 내가 혼자라고 생각할 때 옵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혼자다”. 이런 생각때문에 우리는 외로워지고, 고독해집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혼자여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부활한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외롭다는 것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일상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부활했다고 믿는 것은 누구나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려고 비행기타고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그라나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갈릴리로 떠나셨습니다. 갈릴리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일하는 일상의 현장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타나신 곳이 어디인지.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셨습니다. 거기는 제자들이 고기잡는 일터입니다. 아침 먹을 때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식탁입니다. 오늘 엠마오도 길을 걷는 데 나타났습니다. 식당에 가서 식사하는 데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 무덤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속에 계신 주님, 그래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시116:9절이 중요합니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아앞에 행하리로다”. 이 말씀을 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자의 땅에서 주 앞에 살아가겠나이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경을 풀어 주시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자신들과 지금 함께 계신다는 것을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몰랐을 뿐 아니라 의심까지 했습니다. 13절부터 동행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주님이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걷는 것도 몰랐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300명 가까이 실종된 이번 사건을 보면서 과연 예수님이 우리가운데 살아 계시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다 말할 수 있습니까? 안산이라는 도시는 신자의 퍼센티지가 매우 높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희생자와 그 가족중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움을 당하면 부활의 주님은 잘 안 보입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고백이 잘 안나옵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그렇게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도 따졌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왜 우리에게 이런 혹독한 시련이 와야 합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몇 가지가 분명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많은 사람에게 나타난 가운데 그 특징은 예수님 쪽에서 먼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사람이 죽어 다시 산다고 믿지 않았고 더구나 예수님이 그렇게 되리라고 믿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아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그는 아예 부활한 주님을 떠나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가 떠났더니 몇 사람이 부화뇌동하여 같이 따라 갑니다.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 기본적으로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 성경에서 부활의 소식을 접한 제자들의 태도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막16장입니다. 막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눅24장입니다. 눅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허탄하다”는 말은 “미쳤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을 듣고 사도들은 미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28장 볼까요? 마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은 곧 승천하는 데 아직까지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간 사람들은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고 죽고 부활했다는 것도 들었지만 그 부활이 자기 삶에 아무 영향을 주지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가갔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의심많고 믿음없는 우리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믿음과 상관없는 주제로 시끄럽게 이야기할 때 “너희가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하고 슬그머니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문제를 예수님과 관련시키지 않고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 할 때 조용히 다가오시며 “너희가 무슨 문제로 그렇게 속상해 하냐? 내가 들으면 안되겠니?”하고 다가오십니다.
2차대전때 나찌가 유대인들을 많이 학살했습니다. 한 수용소에서 한 어린 학생이 무엇을 잘못해서 붙잡았습니다. 나찌가 본 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학생을 공개처형하기로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을 수용소 마당에 불러 놓고 학생을 단두대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형을 선고하고 발판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곧 죽지 않고 밧줄에 목을 걸고 몇 분동안을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고통스러워 유대인들은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중 한 유대인이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당신의 백성이 고통스럽게 죽어갈 때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고통당하는 내 백성과 함께 죽으려고 단대두에 있노라”.
오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있습니다. 고통을 해결해주는 자로서가 아니라 함께 고통당하는 자로서 거기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구절은 요11:35절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달려 갔습니다. 무덤에 도착했더니 마리아, 마르다등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11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우리 말로는 길지만 영어로는 두 단어입니다. “Jesus wept”. 헬라어 단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다쿠뤼온”. 문법시제로는 제1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스스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진행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두 방울 눈물흘리고 만 것이 아니라 울기 시작하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능력이 많습니다. 결국 나사로를 살려 냈습니다. 그러나 능력보다 먼저는 긍휼이었습니다. 울되 눈물이 그치지 않으신 주님,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저도 이번에 많이 속상하고 울었습니다. 자녀들을 깊은 바다에 쳐박고 “누구야, 누구야, 돌아오라”하는 어머니, 아버지 올부짖음은 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자식을 키워보니 그 아픔을 제대로 알 것 같았습니다. 죽음의 절망속에서도 부모를 먼저 생각한 자녀들이 너무 대견해 울었습니다. 사고가 난 배에 수학여행을 떠난 사촌언니가 탓습니다. 16일, 아침 7:36, 동생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언니, 오늘 수학여행간다며? 잘 다녀와. 기념품 잊지마”. 언니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잘 다녀올게”. 얼마후 9:25에 언니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언니가 말이야. 기념품 못 사올 것 같아. 미안해”. 그리고 문자는 더 이상 오지 않았습니다. 오전 9시 30분 경, 단원고 학생이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 엄마에게 급하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놓는다. 사랑한다". 영문을 모르던 엄마는 "나도, 아들... 사랑한다"고 대답했지만 그 문자가 마지막 문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를 생각한 아들이 너무 고마워 울었습니다. 어떤 딸은 위기의 순간에 아빠를 먼저 염려했습니다. "아빠, 걱정하지마, 구명조끼 매고 애들 모두 뭉쳐 있어". 아빠는 "가능하면 밖으로 나와라"고 대답했지만 딸은 더 이상 답변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자녀들이요 자식들입니다. 이렇게 착한 아이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어가다니 우리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왜?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묻다가 깨달았습니다. ”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아들을 이 땅에 보내고 가슴아파하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구나. ”아, 그것이 하나님 마음이구나. 아직도 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절박하고 아픈 마음이구나“.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까이 와서 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풀어주시고 또 하나는 떡을 떼어 주신 것입니다. 25절부터 27절입니다. 눅24: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믿 모든 선지자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왜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았더니 무덤이 비어 있었다. 무덤에 들어갔는 데 수의가 헝클어지지 않았다. 마치 나비처럼 쏙 빠져 나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번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변화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졌는 데 교회는 군대 하나 없었지만 2천년동안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다”. “심지어 과학자들이 예수님 무덤을 카본 14로 방사선처리해 보았더니 2천년전에 죽은 사람이 3일 이상 누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기타 많은 과학적 연구, 의학적 연구, 사회적, 심리적 연구까지 2천년동안 부활에 관한 연구는 너무 많아 도서관 몇 층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부활은 증명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증명이란 인과율이 같아야 가능합니다. 자연적 사건만 자연의 원리에 따라 증명됩니다. 그런데 부활은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초자연적 사건을 자연적 원리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존 스타트 박사가 말했습니다. “성경은 부활의 사건을 기록할 뿐 입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부활을 증명하는 책이 아니라 증거하는 책이다”(존 스타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증명과 증거는 다릅니다. 증명은 과학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고 증거는 신앙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증명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부활도 증명되지 않습니디. 다만 믿음으로 증거될 뿐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은 것도 예수님도 논리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풀었다는 것은 믿음에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합니다. 여러분도 부활을 믿습니까? 믿으면 이해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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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30-31,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셨고 제자들은 떡을 먹을 때 드디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떡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예수님 자신의 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만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함께 합니다. 몸은 성찬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됩니다. 몸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는 것은 몸된 교회를 통해서 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교제하고 양육받고 사랑하며 자랍니다. 몸은 예수님과의 신비적 연합입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 예수님과 신비적 연합을 이룹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경험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법을 아셨습니까? 이것이 옉수님이 엠마오 제자들에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그러면 그날 엠마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32절, 35절 입니다. 눅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35절, 눅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냉냉하던 사람들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렇게 잘못 알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던 사람들이 믿음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활을 증거하는 부활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은 위대한 승리임을 믿습니까? 부활은 운명주의에 대한 승리요 죽음에 대한 승리요 패배주의에 대한 승리임을 믿습니까? 성경에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그는 창녀요 일곱귀신들린 여자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내가 주를 보았다”,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었지만 후에 회개하고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주시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진도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중, 그 죽음의 순간에도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삶을 보여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승무원 박지영씨는 학생들을 먼저 구조하려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배가 45-60도 기울던 상황에서 학생들을 안심시킨 후 그는 구명조끼를 찾아 선실 이곳 저곳을 뛰어 다녔습니다. 구명조끼를 찾은 그는 학생들에게 차례로 그것을 입히고 공포에 떠는 학생들을 웃음으로 다독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가 가라앉아 배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주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친구도 있었습니다. 정차웅군. 그는 검도 유단자로 대학에서 체육학과에 진학하고 할만큼 건강한 젊은이였지만 자신의 구명조끼를 친구를 주고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같은 안산 단원고 2학년인 조대섭군, 그는 배가 기울자 구명조끼를 찾아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바닷물이 가슴에 차오를 때까지 20여 명을 구한 뒤 다행히자신도 마지막에 구조되었습니다. 이들은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먼저 ㄱ생각했을까? 이들은 허구헌날 자신만 생각하고 사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합니다. 부활의 사람들, 이렇게 장하고 착한 자녀들이 아직도 차거운 바다에서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부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더 나아갑시다. 부모들의 마음이 이렇게 아픈 데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이 부활절에 우리 기도합시다. “주여, 도와 주소서. 살려 주소서. 이제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자녀들을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주소서. 그리고 우리도 사망의 권세에서, 죽음의 바닷물이 횡행하는 이 세상에서 건져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부활절(눅24:13-35) 2014.4.20.(일)
길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
세월호 사건(사진1).
전8:8, “죽는 날을 주장할 자가 없나니 지진처럼 흔들림이라”.
길에서
눅24:13-14, “그 날에 그들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이야기하더라”.
눅24:17,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24: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엠마오(사진2)
시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시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마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를 보시니”. .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눅24:15-16,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맥스 루케이도, “부활의 주님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를 믿으라. 그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신다. 그나마 항상 가까이 계신다”.
시116:9,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아앞에 행하리로다(내가 살아있는 자의 땅에서 주 앞에 살아가겠나이다)”.
성경을 풀어 주시다
눅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막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눅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마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Jesus wept”(영)= “다쿠뤼온”(헬)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한 것
(1) 성경을 풀어주시다
눅24: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믿 모든 선지자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성경은 부활의 사건을 기록할 뿐 입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부활을 증명하는 책이 아니라 증거하는 책이다”(존 스타트)
(2) 떡을 떼어 주시다
눅24:30-31,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눅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부활은 승리다. 운명주의에 대한 승리요 죽음에 대한 승리요 패배주의에 대한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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