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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성령의 일,성령의 은혜

고전2:10-16 2014.5.18()

성령의 일, 성령의 은혜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와 가장 오래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연히 토지를 쓴 박경리가 쓴 어머니란 시를 읽었습니다. 박경리,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 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박경리의 어머니는 죽은 지 이미 30여년이 되었지만 박경리는 여전히 어머니의 꿈을 꿉니다. 그가 꿈만 꾸면 언제나 어머니와 함께 했던 곳을 헤맵니다. 그러나 헤매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퍼뜩 , 어머니가 없지하고 정신이 차리면 자기 생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죽어서도 함께 사는 사람,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우리 자식들, 그 생명의 인연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끊지 못한 것일까?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의 영혼의 세계에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령님을 어머니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것 같습니다. 성경이 성령을 말할 때는 늘 어머니의 은유로 말합니다. 14:16,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은 예수님이 떠난 빈 자리에 다른 한 분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분을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란 옆에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다만 옆에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옆에서 위로하시고 옆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4:17,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슴이라”. 누가 우리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인간적으로는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어머니처럼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고 또 우리안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그 분이 생명의 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숨을 쉬고 삽니다. 성경은 성령을 ”, 히브리어로 루아흐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이 말을 입김, 콧김, , 하나님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의 신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신은 숨입니다. 호흡이요 입김입니다. 숨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성령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계십니다. 숨은 생명입니다. 성령님도 생명입니다. 누구나 숨을 들이쉬고 내뱉지 못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1968,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성령이 없이는 하나님도 사라지고 그리스도도 과거에 머물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복음은 죽은 문서요 교회는 하나의 조직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권위는 지배를 위한 권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자기 선전에 불과하고 예배는 자기 도취가 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도덕적 노예생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분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믿습니까?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것을 말씀합니다.

 

먼저 성령은 다 아신다

오늘 말씀이 성령님에 대하여 말하는 첫 번째는 성령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믿음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 멀리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토끼, 집토끼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토끼를 연구하는 한 생물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산에 올라가 산에서 놀고 있는 산토끼를 연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토끼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뛰어다니고 숨어 다닙니다. 할 수 없이 산토끼를 잡아 집으로 가져와 우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산토끼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잠은 어떻게 자는가? 생활습관은 어떤가? 오랜 시간 산토끼를 연구한 생물학자는 산토끼에 대한 긴 보고서를 냈습니다. 이 정도면 산토기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고서를 읽은 노 학자가 조용히 한 마디 했습니다. “산토끼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집토끼를 연구했군”. 그렇습니다. 산토끼는 산에 있는 토끼입니다. 산토끼를 연구하려면 산에서 뛰어 노는 산토끼의 있는 그대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산토끼를 잡아 집안 우리에 가둬 놓고 연구했으니 그는 산토끼가 아니라 집토끼를 연구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본래 모습대로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롬11:32절이 말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멀리 계시고 또 깊은 데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의 방식과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입니다. 성경이 쓰여진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지혜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고전2:13, “이것을 우리가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친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헬라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로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압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4:9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알려집니다. 그 일을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는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는 들리는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14:26절입니다. “보혜사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곳뿐 아니라 인간의 깊은 곳을 알게 합니다. 11절입니다. 고전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하나님이 깊은 곳에 있듯이 인간도 깊은 데에 있습니다. “열 길은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볼 때는 작아 보여도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중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아내의 마음이랍니다. 어떤 분이 아내를 이해하려면 아내의 말의 숨겨진 뜻을 알아야 한답니다. 가령 아내가 콧소리로 자기 나 사랑해?”하면 이 말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나 갖고 싶은 거 있는데 사 줄 거야?”하고 묻는 것이랍니다. 아내가 자기, 나 얼마나 사랑해?”라면 나 비싼 거 샀는데 괜찮지?”라는 뜻이랍니다. “어머, 쓰레기 봉투가 벌써 다 찼네라는 말은 그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빨리 갖다 버리라는 뜻이랍니다. 아내가 , 화 안 났어하면 실제 화가 안난 것이 아니라 나 지금 엄청 열 받았어라는 뜻이고 당신 맘대로 해하면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돼. 그렇게 하기만 해 봐라의 뜻이랍니다. “차가 너무 지저분하네하면 그렇게 게으름만 피우고 있지 말고 빨리 차 청소하라는 뜻이고 아내가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며 당신, 나하고 이야기 좀 해요하면 그날은 죽는 날이랍니다. 남자들은 겉으로 나타난 말만 듣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말을 잘 못 알아 듣습니다.

 

성령님은 사람의 깊은 곳도 이해하게 합니다. 20042, 태국으로 단기선교를 떠난 단기선교팀이 메콩강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두사람의 학생이 메콩강에서 배를 타다가 배가 뒤집혀 순교했습니다. 제가 새벽에 그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는 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메콩강에서 죽은 두 학생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그들 역시 울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학생, 하나는 막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 후였습니다. 그리고 제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는 데 마치 칼로 도려내는 것과도 같은 아픔이었습니다. 다음 날, 제가 두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하고 찾아갔습니다. 저는 부모를 알지도 못했고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모를 만나 성경을 펴는 순간 제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20분이 지나도 30분이 지나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마치 엄마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울자 부모도 울었고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붙잡고 울었습니다. 처음보는 부모를 보고 한 마디로 못하고 울기만 하다니 저로서는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부모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부모가 메콩강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선뜻 제가 메콩강에 다녀오겠습니다했습니다. 그 해 8, 저희 부부는 약속대로 태국 메콩강으로 갔습니다. 물어 물어 사고의 현장으로 갔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메콩강의 북정물이 되어 거칠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비내리는 강가에 앉았는 데 또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자녀 잃은 부모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부모를 만났는 데 그들이 제 손을 잡고 말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처음 뵙자 마자 눈물을 흘려서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그러나 계속 목사님이 우시는 가운데 저희 마음이 한없이 자유했습니다. 또 우리 자식들만 위해 태국까지 다녀오시니 이제 저희들이 힘을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말 몇 마디로 사람을 위로하거나 격려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하게 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다시 11절입니다. 고전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사람의 깊은 곳을 알게 하신 분도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한다

성령님이 하시는 두 번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1절 후반절을 보겠습니다. 고전2:11,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12절을 보겠습니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삽니다. 성공한 일, 실패한 일, 잘한 일, 못한 일, 우리는 대부분, 일의 표면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일의 내면, 깊은 뜻은 잘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일의 표면이 아니라 일의 내면입니다. 이것이 어떤 일인가 보다 이것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는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일이 되도록 돕는 일입니다. 제가 한번은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가 샤워를 하려고 세면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새 비누가 하나 있는데 아무리 문질러도 거품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비누가 거품이 안 나오지?” 했더니 말합니다. “비닐 껍질을 안 벗겼잖아요”. 자세히 보니 투명한 비닐 껍질을 안 벗겼습니다. 껍질을 안 벗겼으니 거품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비누와 같습니다. 모양은 그럴싸 해도 껍질이 그대로 있으면 거품을 낼 수 없습니다. 껍질을 벗겨내야 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 눈의 껍질을 벗겨내고 사물의 내면을 보게 하고 사건의 껍질을 벗겨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두 달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기도했는 데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암이 생겨 입원합니다. 교회에서 여신도 회장으로 한참 재미있게 신앙생활하는 데 갑자기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그렇게 잘 지내던 교인으로부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오해를 받고 악성루머에 시달립니다. 그때 느끼는 첫 번째 생각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일을 겪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잘못이 없는 데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해답은 없습니다. 아직 껍질로 감춰있습니다. 이렇게 물어야 껍질이 벗겨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일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때 임하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먼저 없애주는 분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게 하는 분입니다. 그 다른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생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고난을 당하고 우리가 힘들 때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는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하는 은혜입니다. 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보게 하는 은혜입니다. 생각을 바꿔주시고 시각을 교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밑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도 보고 옆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도 보고, 땅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보는 것입니다.

 

헤럴드 쿠시너가 쓴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착한 쿠시너는 모든 교인들로부터 존경받는 훌륭한 목사였는데, 어느 날 3개월 된 어린 아들이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조로증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10살이 되기 전에 팔순 노인처럼 늙어버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쿠시너 목사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고통을 가슴에 끌어안고 오랜 시간 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날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 땅에 있는 사람들 중 기쁨만 누리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 있는 사람도 없다. 둘째, 인생의 고난을 나 혼자만 당하는 것 같지만 모든 사람이 다 겪는다. 셋째, 이 땅에 우연한 일은 없으며 내 머리로 이해는 안되지만 고통가운데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다. 넷째, 하나님이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하나의 문을 닫고 또 하나의 문을 여신다. 다섯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나며 우리는 결국 하나님안에서 승리한다. 이것이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었습니다.

 

요즘 제가 경험한 것입니다. 평온한 교회는 잔잔한 바다와 같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볼 때는 잔잔해도 속으로 들어가보면 급한 조류와 차거운 파도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어떤 일로 급한 조류가 몰아쳤습니다. 제가 새벽이 나와 기도하는 데 작은 환상이 보였습니다. 제가 아기처럼 걷는 데 걷다가 넘어지고 걷다가 넘어집니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와 같습니다. 제가 눈을 뜨고 생각했습니다. 왜 아이가 걷다 넘어지고 걷다 넘어질까? 왜 내가 아기처럼 걸음마를 할까?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 나는 아직도 어린 아기구나”. 내 영적 상황을 보여주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노력해서 조금 큰 줄 알았는 데 아직도 저는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 또 하나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크는 것이 아니야?”. 지난 월, , 이틀간 목회자 들과 함께 충남 옥천에 있는 목회자 수양회에 다녀왔습니다.

 

거기 있는 데 우리 교회 집사님 한분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요즘 힘드시죠?” 제가 괜찮아요했더니 집사님이 말합니다. “목사님, 다 성장통이잖아요. 아이들은 넘어지면서 크잖아요. 교회도 부흥하려면 아픔이 있잖아요”.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본 환상을 집사님도 보았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을 성장통이라고 해석한 집사님의 해석에 감사했습니다. 목회자도 아니고 평신도가 그렇게 고난을 해석한 것도 대견하고 그렇게 목회자를 위로한 것도 감사했습니다. 그때 제가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자랍니다. 넘어지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지만 걷기 위해 넘어지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지금 넘어져 있습니까? 걸음마하는 것입니다. 다 자랐으면 걸음마도 안 합니다. 지금 자라고 있고 지금 크고 있고 지금 되고 있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져서 그대로 주저 앉아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장통입니다. 자라기 위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마귀는 넘어질 때 네가 실패해서 넘어졌다고 하고 성령님은 자라기 때문에 넘어졌다고 말합니다. 마귀는 넘어질 때 일어나지 말라고 하고 성령님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성령의 은혜로 받으면 실수는 해도 실패는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받으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님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네팔 선교에 가서 경비행기로 에베레스트 상공을 난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랐더니 8000미터 히말라야가 다 제 발밑에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바뀌지 않습니다. 문제의 에베레스트는 항상 내 앞에 입을 벌리고 서 있습니다. 문제를 이기는 방법은 문제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서워 할 것 없습니다. 산을 옮길 것이 아니라 내가 높이 날면 됩니다. 내가 비행기타고 높이 날면 모든 것이 다 내 발아래 있습니다. 성령님은 가장 놓으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말헸습니다.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성령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입니다. most highest power, 그 분과 함께 동행하면 어떤 문제도 내 발 아래 있습니다.

 

성령은 기도하게 하신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면 해결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게 합니다. 언제나 원리가 방법을 낳습니다. 13절 다시 보시겠습니까? 고전2:13,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원리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도 없고, 해결하지 못하시는 일도 없고, 하나님의 주권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일도 없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다”. 그러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생 훈련할 것이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영적으로 보는 훈련, 모든 일을 영적으로 해결하는 훈련, 영적으로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영적인 방법입니다.

 

지난 두 달동안 우리 교인들이 많이 기도했습니다. 100일 기도 대행진을 통해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간증과 응답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작년 11월부터 올 2월까지 한끼 금식하던 어느날 제가 한 장로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데 우리 교회 1층 현관에서 샘이 솟더니 생수가 콸콸 쏟아졌습니다. 그 물이 흘러 마당으로 흘렀는 데 거기 있는 많은 쓰레기, 오물들이 쓸려 나갔습니다. 우리 교회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놀라운 부흥을 주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저는 그 환상을 믿고 100일 기도 대행진을 선포했습니다. 한 젊은 집사님이 100일 새벽기도를 작정했습니다. 마침 목장식구들이 부산에 23일로 여행을 가서 자신도 가고 싶은 데 문제는 새벽기도를 이틀 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듣고 감사했습니다. 세상에는 고민도 많은 데 새벽기도를 안 빠지는 고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집사님, 하나님이 다 아시니 다녀오세요”.

 

지난 주에는 어떤 권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다 나았어요. 제가 평소에 머리가 욱신거리고 옥죄고 아팠거든요. 언제나 목사님 안수 받아보나 했는 데 몇 주전 권사님들 소풍가는데 목시님이 차에 오셔서 기도하셨지요. 소풍 잘 다녀오라고. 제가 목사님 붙잡고 계신 손밑에 제 머리를 살짝 댔거든요.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머리가 안 아파요. 지금은 약도 안 먹어요”. 병을 위해 기도한 것도 아니고 소풍 잘 다녀오라고 기도했는 데 그 의자에 머리를 갖다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혈루병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여러분, 영적인 문제는 영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염려하십니까? 하나님이 모르시는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역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잖습니까? 갑자기 병이 나고 갑자기 사업이 안되고 갑자기 오해받고 갑자기 시험드는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마다 분노하겠습니까? 그때마다 사람과 다투겠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그때 기억해야 할 믿음의 원리가 이것입니다. 고전2:13,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무슨 문제를 영적으로 해결하지 못할까요? 못 해결한다면 하나님도 아닙니다.

 

몇 년전 케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래전 케냐 마우마우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선교사 두 사람이 그 지역을 통과하여 나이로비를 돌아오고 있었는 데 ,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차가 고장나더니 멈춰섰습니다. 선교사들은 차 속에서 불안한 밤을 보냇습니다. 자기전 성경을 폈는 데 시편 4:8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말씀을 붙잡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나이로비로 왔는 데 한 케냐 목사가 그들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폭동 지역사람들이 당신들 차에 접근하여 당신들을 죽이려고 갔는 데 차에 열 여섯명이 에워싸고 있어서 무서워 그냥 돌아갔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열여섯 사람이라고요? 우리는 둘 밖에 없었는데”. 선교사는 16명이 무엇일까 긍금하게 여기면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모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중보기도팀이 있는 데 이들이 매일 케냐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들이 몇 명이냐고 물었는 데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16명이예요”. 두 선교사가 폭동지역에 있을 때도 16명이 기도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그 16명을 폭도들에게 보이게 해 그들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최고의 방법임을 믿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일이고 따라서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믿습니까? 최고의 영적인 방법이 기도임을 믿습니까? 기도는 성령의 은혜가 임하는 통로입니다. 6:18절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다같이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괴로워하고 방황하는 그 시간에 겸손히 하나님앞에 나와 회개기도헤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를 써 인간적인 해결방법을 찾는 그 시간에 하나님앞에 나와 무릎을 꿇으면 어떨까요?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영적인 문제 풀립니다.

 

 

 

 

 

 

 

 

 

 

 

 

 

 

 

 

 

 

 

 

 

 

 

 

 

 

고전2:10-16 2014.5.18()

성령의 일, 성령의 은혜

박경리,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 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4:17,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슴이라”.

 

성령이 없이는 하나님도 사라지고 그리스도도 과거에 머물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복음은 죽은 문서요 교회는 하나의 조직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권위는 지배를 위한 권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자기 선전에 불과하고 예배는 자기 도취가 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도덕적 노예생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먼저 성령은 다 아신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통달하시느니라”.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11:32,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을 아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인간의 지혜의 방식과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이다.

 

고전2:13, “이것을 우리가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친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14:26, “보혜사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전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한다

고전2:11,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먼저 없애주는 분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게 하는 분이다.

 

문제를 이기는 방법은 문제보다 커지는 것이다.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성령=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most highest power

성령은 기도하게 하신다

고전2:13,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시편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