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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2:1-11 영적 슬럼프를 이기는길 2014.5.25(일)

42:1-11 2014.5.25()

영적 슬럼프를 이기는 법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면서 조금씩 더워 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비입니다. 며칠전 고향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는 데 시골에 모내기 할 때인데 비가 안 와서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비가 너무 와서 문제고 어떤 때는 비가 너무 적게 와서 문제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도 요즘 가물었습니까? 우리 영혼도 가끔 영적 가뭄을 경험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침체 혹은 영적 슬럼프라고 합니다. 슬럼프는 주로 인생을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오는 생활주기입니다.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항상 주저 앉아 있기 때문에 슬럼프에 빠질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슬럼프를 인생의 감기라고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감기가 찾아 오는 것처럼 슬럼프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 옵니다. 감기가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니더니 그냥 놓아두면 발전하여 큰 병이 되는 것처럼 슬럼프도 그냥 놓아두면 큰 병이 됩니다. 문제는 감기없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슬럼프없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슬럼프가 있습니다.

 

문제는 슬럼프는 왜 오고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돕슨 박사가 기독교인을 상대로 물었습니다. “당신을 가끔 슬럼프에 빠지게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몇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가장 큰 것이 생각대로 일이 안될 때였습니다. 계획한대로 일이 안되고 기대한 대로 일이 안 풀릴 때 낙심해서 슬럼프에 빠집니다. 두 번째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직장 상관, 동료와의 갈등, 친한 친구의 배신, 이런 것이 슬럼프를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행복하지 못한 가정생활입니다. 가정에서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 지속적인 부부갈등, 자녀문제 이런 것이 슬럼프를 가져옵니다. 네 번째가 경제문제, 다섯 번째가 육신의 피로, 질병, 여섯 번째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고독감, 격리감, 지루함, 늙어가는 소외감, 이런 것이 슬럼프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가끔 이런 영적 슬럼프를 만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하던 기도가 어느날 기도를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던 예배가 어느 날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은혜롭던 찬양이 시들해지고 그렇게 재미있던 목장모임이 재미가 없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찾아온 영혼의 감기, 영적 슬럼프로 인해 우리 영혼이 잠시 침체에 빠지고 심하면 병까지도 들지 않습니까? 이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생각대로 모든 것을 중단하고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겠습니까? 봉사고 기도고 사명이고 다 때려 치우고 어디 조용한 섬이라도 가고 싶습니까?

 

1. 영적 슬럼프는 무엇이고 그 증상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영적 슬럼프는 무엇이고 그 증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원인

1-2절입니다. 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1-2절은 영적 슬럼프의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슬럼프는 영혼이 목말라서 생긴 현상입니다. 사람은 7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갖난 아이는 95%가 물이고 노인도 50%이상이 물입니다. 물로 된 인간이라 물이 없으면 못 삽니다. 그런데 물을 못 마시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물은 육신에게 뿐 아니라 영혼에게도 필요합니다. 육신에게 물이 필요하듯 영혼에게는 영혼의 생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물은 우물에서 나오지만 영혼의 생수는 함나님에게서 옵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면 좋은 데 멀리 계십니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갈망합니까? 신앙은 갈망입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멀리 계십니다. 찾아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옛날에 그렇게 가까이 계셨는 데 갑자기 멀리 가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2) 특징

영적 슬럼프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슬럼프에 빠지는 데 영적 슬럼프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3절입니다. 42: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1) 첫 번째가 대인관계입니다. 사람과 만나는 것이 겁이 납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과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마음이 불안하고 기쁨이 사라지면서 다른 사람들앞에 서기가 겁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에 대해 이유없는 분노가 솟아나 조금만 건드려도 화가 납니다. 영적으로 슬럼프에 빠졌을 때 숨길 수 없는 것이 얼굴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속일 수 없습니다. 마음에 생기가 없으니 얼굴이 밝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굳어 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독기어린 말, 삐딱한 말, 찌르는 말이 나옵니다. 타다 남은 장작더미처럼 매케한 연기가 나 자신도 힘들게 하고 남도 힘들게 합니다. 영적 슬럼프에 빠지면 목회자와의 관계도 안 좋아 집니다. 평소에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오고 목회자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비판적이 됩니다. 그때부터 신앙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2) 영적 슬럼프의 또 다른 특징이 4절입니다.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두 번째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가장 잘 노출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와 기도는 신자의 영적 생활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가장 좋은 외적 증상입니다. 새벽기도 잘 나오던 사람이 새벽기도에 한번 두 번 빠지고 심야기도에 빠지기 시작하면 영적 침체가 시작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주일 예배를 그렇게 잘 참석하던 사람이 예배참석에 게으르고 습관적으로 늦게 오고 와서도 졸고 있으면 확실히 그 영혼은 병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배와 기도를 소홀히 하는 데 영적으로 충만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기도하지 않다가 갑자기 새벽기도에 보이고 심야기도에 나타나면 영적 회복이 시작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예배와 기도는 영적 침체의 표증이면서 또한 영적 회복의 증상입니다. 영적으로 침체했는 데 예배를 잘 드릴 리 없습니다. 다시 4절 보세요.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전에는 잘했습니다. 꼬박 꼬박 주일성수도 하고 새벽기도도 잘 했습니다. 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하나님께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됩니다. 이것이 영적 슬럼프입니다.

 

2. 영적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습니까?

1) 제일 첫 번째 영혼이 목말라야 합니다. 1-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영혼의 회복의 첫 번 째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행동은 한참 뒤입니다. 우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갈망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2절에 갈망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튼 목마르다는 말입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목마름”(thirst)물이 부족해 생기는 거북하거나 고통스러운 느낌이라고 정의합니다. 물이 부족할 때 느끼는 고통이 목마름입니다. 이 목마름은 깊은 불만족, 고갈, 공허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고통을 의미합니다. 웨스트콧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마름은 만족하지 못한 욕구(unsatisfied want)로 인한 고통이다.”

 

아이가 엄마가 없으면 금방 웁니다. 천하에 이것 저것 다 주어도 엄마 없으면 죽는 줄 압니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재가 우리 영혼의 슬럼프를 가져왔다면 하나님의 회복이 영혼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열쇠가 됩니다. “주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 서리. 힘없고 부족하며 지혜도 없도다.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주 떠나 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기쁘나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즐겁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됩니다. 주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영적 갈망의 사례로 사슴 이야기가 나옵니다. 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사슴은 초식동물입니다. 풀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여름이 되어 3월부터 10월까지는 비 한 방울도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땅이 쫙쫙 갈라지고 잎들이 말라 죽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겠습니까? 그렇다고 아주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름에 광야를 보면 가시 나무가 말라 있습니다. 광야는 가시나무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나무가 말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딱딱하겠습니까? 딱딱하여 먹을 수 없지만 배고픈 데 어떻게 합니까? 그 딱딱한 가시나무라도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목이 마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목마른 데 딱딱한 가시나무를 먹었으니 얼마나 목마르겠습니까? 이것이 목마름입니다. 갈망입니다. 우리 영혼이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가 이 영적 갈망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영적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몽골선교사였던 이용규 선교사가 전해준 몽골 소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몽골 어느 지역에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데 예배가 막 끝나가는 무렵, 발러르라는 소녀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왔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더니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가 이상하다 싶어 예배후에 물었답니다. “왜 이렇게 예배는 늦게 왔고 또 자리에 앉아 마자 울었느냐?”.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자기는 아침 일찍 소를 몰고 들로 갔는 데 한참 소를 먹이다 보니 오늘이 주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를 들에 놓고 교회로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도착해 보니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고 미안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는 어떻게 하고 왔느냐?”고 했더니 소는 하나님께 맡기고 왔다고 하더랍니다. 몽골은 초원이 넓습니다.

 

그런데 그 소들을 주인도 없이 들에 놓고 왔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웬일입니까? 한참 있다 보니까 밖에서 소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나가보니 소들이 교회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들을 지켜 준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갈망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63:1절을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같이 간절히 주를 찾되”, “내 영혼이 주을 갈망하며”.

 

2) 영적 슬럼프를 극복하는 두 번째가 있습니다. 6절과 7절입니다. 42:6-7,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두 번째는 자연 치료입니다. 영적 슬럼프에 빠진 다윗은 아마도 자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요단땅과 헤르몬, 미살산으로 간 것 같습니다. 거기서 폭포를 보고 또 바다로도 나간 것 같습니다. 그 자연을 보면서 자신의 영적 슬럼프를 극복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헬몬산에 가면 폭포가 있습니다(사진). 바니아스 폭포라고 합니다. 헬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 폭표를 통해 갈릴리 바다로 갑니다. 그래서 7절에 나오는 바다도 아마 갈릴리 바다를 의미할 것입니다. 갈릴리가 호수이지만 이라고 불러 바다란 뜻으로도 같이 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의 영적 슬럼프를 해소하기 위해 요단강 상류로 올라가 헬몬산으로 갔고 거기서 눈이 녹아 쏟아지는 바이아스 폭포와 그 물줄기를 타고 흐르는 요단강을 따라 갈릴리 호수까지 여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무궁무진한 치료의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상구 박사가 NEW START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중에 W. water, , S, sunshine, 햇빛, A, air, 공기, R, rest, 휴식, 이런 것들이 있잖아요? 소위 자연치료입니다. 자연에는 사람을 치료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습니다. 햇빛이 적은 나라가 햇빛이 많은 나라보다 우울증이 많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물이 몸에 중요하기 때문에 하루에 8컵 정도의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휴식은 에너지를 재창조하는 회복의 시간입니다. 자연은 우리의 몸뿐 아니라 우리 영혼까지 치료합니다. 성경에도 많은 자연치료의 기록들이 나옵니다. 마라에서 사람들이 쓴 물을 먹고 복통할 때 모세가 나무를 집어 넣어 물을 달게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들어가 문둥병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실로암 맹인은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치료받았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사람들이 독초가 들어간 국을 먹고 죽으려고 하자 엘리사가 국에 가루를 넣어 그들을 살렸습니다. 자연 치료입니다.

 

3) 그러나 영적 슬럼프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8절에 나옵니다.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바로 기도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입니다. 예배와 기도가 영적 슬럼프에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은 슬럼프가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성경적 원칙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드린 말씀을 기억합니까? 고전2:11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3절입니다. 고전2:13,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원리는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도 없고, 해결하지 못하시는 일도 없고, 하나님의 주권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일도 없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다”. 그렇다면 방법도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회복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인 능력이 성령님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저 비행기는 어디로 가나? 한번 타보고 싶다“. 그러다가 자라서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는 데 비행기를 탈 때마다 신기합니다. ”이 육중한 비행기가 어떻게 뜨나? 사람을 수 백명 씩 태우고, 짐도 엄청나게 싣고 어떻게 날아가나“. 그러다가 한번은 비행기를 탓는 데 제 옆에 마침 모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가 탓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이 무거운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납니까? 그 과학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했더니 그가 말합니다. “비행기는 이륙 5분이 중요합니다. 처음 5분동안 비행기의 모든 엔진에 일시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불은 4만 피트 상공을 올라갈 때까지 계속 붙어 있어야 합니다.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내부의 열이 외부의 운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열이 생기면 밖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비행기의 원리를 알았습니다. 비행기가 움직이는 비결은 안에서 생긴 에너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안에서 에너지가 생기면 밖으로 운동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리는 사실 비행기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몸도 그렇습니다. 안에서 에너지가 생기면 밖으로 운동합니다. 소위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무도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에서 에너지가 생기면 밖으로 꽃이 피고 열매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너지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에너지가 생기려면 음식을 먹거나 운동을 해 주어야 합니다. 식물이 꽃을 피고 열매맺으려면 물을 주거나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떨까요? 우리 영혼은 어떨까요? 우리 영혼이 살아 움직이며 행복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에서 힘이 생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 힘이 무엇일까요? 우리 몸에 음식처럼, 식물의 거름처럼 우리 영혼에는 어떤 힘이 필요합니까? 그 분이 성령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행1:8을 아십니까?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부어 주시는 힘이 성령님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우리 속에서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것이 권능입니다. 안에 권능이 생기면 밖으로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에너지의 양과 운동의 양은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칼로리가 더 생겨 더 많은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물과 거름을 주면 식물도 더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안에 하나님이 성령님을 많이 보내주시면 우리가 더 많은 힘을 받습니다. 이것을 충만이라고 합니다. 2:4절을 보실까요?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여기에 나타난 충만이라는 단어는 배에 사람이 가득 찬 상태 또는 욕조에 물이 가득 찬 상태를 말하는 플레로오라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에서 영어 flow가 나왔습니다. 안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밖으로 flow, 흐르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어디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서 가득차면 밖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능력이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우리 육체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프로 골퍼인 타이거 우즈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강인한 몸을 지녔습니다. 게다가 그 몸을 잘 훈련해서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더 멀리 정확하게 공을 날립니다. 그러나 그 훈련으로 다져진 몸도 정욕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육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8:6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성령을 의지해야 할 이유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속에 들어오면 우리 안에 에너지가 생깁니다. 이 에너지는 예배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자랍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죄를 이기고 나쁜 습관을 이기고 교만을 이기고 욕심을 이기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와 예배입니다. 3:3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라”. 그렇습니다. 성령은 예배의 영입니다. 기도하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이 우리 강운데 임할 때 일어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이 예배와 기도입니다. 고전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그러면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성령님이 예배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령의 임재는 예배중에 나타납니다. (2)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뜻입니다.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꼐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와 집회를 구분을 못합니다. 예배와 집회는 사람들이 모인 것은 비슷하지만 목적이 다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모였고 집회는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자 모였습니다. 예배를 자기 만족과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집회로 여기기 때문에 예배가 점점 공연장처럼 되고 오락화됩니다. 어떤 교인은 예배가 좋은 말씀듣는 것인 줄로 압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 부부는 주일 오전에는 집에서 가까운 본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오후에는 강남의 유명한 교회에 가서 또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강남 무슨 교회의 목사님 말씀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은혜 받으러 갑니다합니다.

 

잘못된 예배입니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예배를 통해서 내가 무슨 유익을 얻을까가 아니라 예배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3) 예배중에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4) 예배중 드리는 기도를 도우신다는 말입니다.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님이 우리의 영적 슬럼프를 회복시킵니다. 영적 슬럼프를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이 기도와 예배입니다.

 

4) 마지막으로 영적 슬럼프에 빠졌을 때 붙잡아야 할 중요한 믿음이 하나 더 있습니다. 11절입니다.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기에 여전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이미 영적 슬럼프에 빠진 사람이 영적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자연을 통해 치료도 받고 성령안에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회복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 한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낙망하며 불안해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족합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11절의 말씀은 그렇더라도”,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완전을 향해 나아가지만 완전을 멀고 험합니다. 완전을 향해 나아갈 때 다 안되더라도,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우리가 할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리라.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 will yet praise him. ”나는 그러나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한번의 슬럼프로 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거나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다시 일어나십시오.

 

 

 

 

 

 

 

 

 

 

 

 

 

 

 

 

 

 

 

 

 

 

 

 

 

 

42:1-11 2014.5.25()

영적 슬럼프를 극복하는 길

 

1. 영적 슬럼프는 무엇이고 그 증상은 무엇입니까?

1) 원인

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2) 특징

(1) 대인관계

42: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2) 영적생활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2. 영적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1) 영적 갈망

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목마름”(thirst)물이 부족해 생기는 거북하거나 고통스러운 느낌”(옥스포드 영어사전).

목마름은 만족하지 못한 욕구(unsatisfied want)로 인한 고통”(웨스트 콧)

 

주 떠나 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기쁘나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즐겁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주시옵소서”.

 

42: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자연치료

42:6-7,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헬몬산 폭포(사진).

 

3) 예배와 기도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고전2:11,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2:13,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1:8,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충만”=“배에 사람이 가득 찬 상태 또는 욕조에 물이 가득 찬 상태”(플레로오)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라”.

고전14: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꼐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4) “여전히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