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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on(3) 비신자에게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2014.8.24(일)

Re-vision(3) 2014.8.24()

비신자에게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만일 한 가지 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교인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까?”(영상).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말씀이 충만한 교회, 사랑이 가득한 교회, 성령충만한 교회, 민족과 열방을 살리는 교회. 다 좋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한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연못 하나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연못을 사랑해서 그 안에 많은 물고기를 넣고 길렀습니다. 또 주변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꽃과 나무도 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연못이 시들 시들 죽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물이 안 들어옵니다. 저 위에서 흘러오던 물이 막혀 안 내려온 것입니다. 물이 들어오지 않자 연못에 살던 물고기도 죽고 아름다운 나무와 풀도 시들었습니다. 결국 연못은 죽음의 웅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습니까? 교회가 연못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밖에서 물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연못이 삽니다.

 

저는 최근에 두 편의 글을 읽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쓴 이 글은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금은 잘 믿고 있는 신자가 처음 교회 나올 때를 회상하며 쓴 글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교회 잘다니던 신자가 이단교회로 옮겨가면서 쓴 글입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이 이렇게 썻습니다. “나는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는 신자입니다. 지금은 행복하고 감사하지만 제가 처음 교회 올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안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아프기도 하고 인생이 안 풀리기도 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주변의 누구도 나에게 교회 나와보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직장에서 상관이나 동료들이 교회 다닌 것을 알았지만 그들이 나에게 교회 나와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들 곁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오직 인간적인 관계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제가 답답해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반겨준 사람도 없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저는 제 발로 교회 나온 사람이지만 제 인생 42년 동안 제게 교회 나와보라고 말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저에게 불가사이하게만 느껴집니다. 저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교회다닌다는 것을 입다물고 있는 실수 말입니다. 그것은 사실 실수가 아니라 죄악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글입니다.

 

두 번째는 조금 짧지만 더 쇼킹합니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교회를 다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옮겼는 데 그 교회가 우리가 말하는 이단입니다. 그래서 왜 정통교회를 버리고 이단교회로 갔는가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다녔던 교회는 소위 정통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신학과 교리를 강조해서 나는 칼빈의 예정설, 하나님의 주권, 이런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교회는 교리만 강조했지 내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교회는 사랑도, 친절도, 새신자에 대한 배려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전통과 교리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금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전에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불렀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교회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순수하고 친절한 것입니다. 나는 이 교회와서 비로소 사람 대접을 받았습니다. 나는 교리같은 것을 잘 모릅니다. 다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교리가 순수하고 친절한 교인들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내가 이 교회에 오게 된 이유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두 편의 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글은 오늘날의 교인들이 비신자와 상관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고 선교를 말하지만 일생 한번도 비신자를 교회로 초청해본 적이 없습니다. “니 밥 니 먹고 내 밥 내 묵고“. 서로 담쌓고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편지는 사람에게 무관심한 교회입니다. 전통과 교리, 사업과 행사는 많은 데 새로 들어온 교인 하나 제대로 품지 못하는 교회, 도대체 누가 새신자고, 누구를 돌봐야 할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이 없는 교회, 그런 교회 다니다가 죽을 것 같아서 차라리 친절한 이단교회로 옮긴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저 나 한 사람 겨우 믿는 신앙, 세상과 담 쌓고 사는 교회,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사업에만 미친 교회, 이런 교회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연못이 살기 위해 연못 밖에서 물이 들어오는 법을 찾아야 합니다. 연못안에 있는 고기만 신경쓰고 연못안에 들어올 물은 신경안쓰는 교회, 성처럼 크게 짓기만 생각하고 비신자들이 들어오는 길은 닦지 않는 교회, 그 교회는 곧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라도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과연 좋은 모델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삭개오 모델입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 그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좋은 모델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삭개오입니다. 삭개오가 누굽니까? 2절입니다.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부자라”. 이 짧막한 한 귀절에 삭개오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 “세리장은 요즘으로 하면 세무소장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세리는 탐관오리와 매국노의 대명사였습니다. 백성들의 피와 땀을 세금으로 걷어 로마에 바치고 백성들을 압박해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자기 부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명백히 교회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표적인 비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우선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돈밖에 모릅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세리장이요 부자라”. 공무원이 금방 부자될 수 있습니까? 다른 주머니를 차야 부자가 됩니다.

 

미국의 교회학자 조지 바나가 비신자들이 가진 삶의 우선순위를 조사했습니다. 비신자, 불신자들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부터 하면 첫째가 좋은 결혼, 행복한 가정생활입니다. 둘째가 좋은 직장, 풍부한 물질생활입니다. 셋째가 우정, 행복한 친구관계입니다. 넷째가 건강, 다섯째가 여가, 취미생활, 여섯째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하는 것입니다. 이 우선순위에 영적인 것은 없습니다. 있지만 뒤에 있습니다. 그들의 가치는 여전히 물질적이며 세상적입니다. 성공지향적이며 쾌락추구형입니다. 삭개오가 살았던 가치관이 그랬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비신자를 구원하려고 하면 그들의 눈으로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신자의 눈으로 교회를 보아야 합니다.

, 비신자의 눈으로 교회를 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좋은 결혼생활을 통해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기 바랍니다. 교회 오면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건강한 몸으로 좋은 친구를 사귀며 재미있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교회 오면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세상을 떠나 교회로 온다면 적어도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는 더 행복하고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 오면 전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이것이 그들을 망설이게 합니다. 과연 교회가면 행복하고 멋진 인생이 펼쳐질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원한다고 해서 비신자들이 쾌락만 좇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 남을 위해 봉사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욕구들이 교회오면 이루어 질까? 그래서 교회는 그들을 무조건 끄집어 들이기 전에 그들이 교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한번 물어 봅시다. 왜 삭개오는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삭개오란 이름은 히브리어 이름입니다. 뜻은 의롭다, 깨끗하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는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이름을 붙일 리 없습니다. 삭개오는 분명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불과 28킬로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차로 가면 30분도 다 안 걸립니다. 옛날에 나귀를 타고 갔다고 해도 불과 몇 시간이면 예루살렘 성전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한번도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예루살렘 성전이 그렇게 가까운데도 하나님없이 살았던 삭개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삭개오의 눈으로 볼 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그런 믿음을 주지 못한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이, 나같은 탕자가 성전에 가면 나도 그들처럼 좋아지고 내가 평생 꿈꾸던 행복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루에도 수차례 제사드리고 에배드렸지만 비신자들의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볼 줄은 몰랐습니다. 비신자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비신자들이 보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좋아지겠다라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것입니다. 좋아지기는 커녕 더 나빠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교황이 방한했습니다. 며칠 있으면서 많은 도전과 감동을 주고 갔습니다. 작은 타를 타고 다닙니다. 손수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호화 관저를 마다 하고 소탈하게 먹고 잡니다.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을 가슴에 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정신대 할머니들, 꽃동네 장애우들, 아프고 소외된 자들을 돌아 봅니다. 분단의 아픔을 겪는 민족에게 통일의 희망을 안겨 줍니다. 카톨릭교인 아닌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불신자도, 타종교인도, 야당도 여당도 다 좋아합니다. 왜 사람들은 교황에게 그렇게 환호한 것일까? 사람들이 찾는 긍극적인 행복과 삶의 의미를 교황에게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 비신자들도 교회를 보면서 저런 희망을 가질까? 만일 아니라면 왜 아닐까?” 교황이 보여준 모습은 오늘날 비신자가 교회에서 찾기를 원하는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비신자입장에서 교회를 보아야 합니다. 비신자는 교회를 통해 무엇을 보기 원하나? 교회는 비신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혈안이 되지 말고 그들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믿는 우리는 웬만하면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신자입니다. 비신자에게 교회는 좋은 곳인가? 비신자에게는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비신자에게 좋은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우리 교회는 비신자에게 문턱이 낮은 교회인가? 우리 교회는 비신자를 정말 사랑하는가? 이것을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비신자도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삭개오 이야기에서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느날 예수님을 보러 길거리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19:3-4,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고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없이 살았던 삭개오가 어느날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비신자로 살던 삭개오에게도 영적인 욕구가 있었던 것일까? 비신자의 마음에도 하나님을 찾는 본성이 있는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신자에 대해 갖고 있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비신자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근거없는 오해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1> 비신자는 반신자가 아니다.

첫 번째 오해가 이것입니다. “비신자는 반신자다”. 다른 말로 하면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다라는 오해입니다. 맞습니까? 아닙니다. 역시 통계를 보겠습니다. 비신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싫어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오른 쪽은 퍼센티지입니다. 표를 보시면 제일 많은 것이 기독교인들의 가식적인 행동입니다. 둘째가 엄격하고 융통성없는 신앙관입니다. 교회오면 특별한 것이 없다. 별 의미가 없다가 세 번째 21%, 예배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가 12%입니다.

기독교인들의 가식적인 행동

21

엄격하고 융통성 없는 신앙관

21

특별한 것이 없음

21

예배(너무 길다, 지루하다 등)

12

헌금에 대한 지나친 강조

9

기독교인들의 우월 의식

6

교회에 참여하고 돌아오라는 압력

4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시받는 것

4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이 하나님이 필요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신자중 교회란 정말 필요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26%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74%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포함, 전체 성인의 85%신앙은 우리 삶에 중요하다라고 인정합니다. 안 믿는 비신자중에서는 2/3정도가 신앙은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인정합니다. 극단적으로 교회는 필요없다.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5%정도밖에 안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

입니다.

천국, 지옥에 대한 비신자들의 생각

천국, 지옥이 있다고 생각한다

천국, 지옥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르겠다/기타

79%

13%

8%

 

표를 보실까요? 비신자의 79%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교회를 안 나오는 사람을 비신자라고 부르지만 그 비신자가 반드시 반신자는 아닌 것입니다. 1:20을 기억합니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찾는 본성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오죽 하겠습니까?

 

2> 한번 거절은 영원한 거절이 아니다

두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비신자에게 전도하면 대개 거절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낙심해서 거봐. 내가 안된다고 했잖아? 괜히 시간 낭비했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거절할 수 있지만 그 거절은 영원한 거절은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김집사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안 믿는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친구가 하나 있었는 데 이 친구는 안 믿는 친구에게 계속 교회 가자고 전도했습니다. 그때마다 친구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먹고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너무 너무 외롭고 힘들어 자기도 모르게 교회 나왔습니다. 그가 교회 나온 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친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는 안 믿는 나를 어릴 때부터 전도했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거절했지만 친구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친구가 전도할 때 나도 거절했지만 내가 거절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친구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내 거절에도 불구하고 나를 여기 있게 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친구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거절당할 수 있지만 그 거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도 하나님이 필요하고 그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을 아십니까? 누가 그렇게 부정한 삭개오가 예수님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갈 줄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본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소문을 듣자 마음이 열려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비신자가 반신자는 아닙니다. 한번의 거절이 영원한 거절은 아닙니다. 모든 비신자는 곧 예비신자입니다. 교회의 기둥 베드로도 처음에는 비신자였고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악한 비신자였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도 130년 전에는 누구나 비신자였습니다. 하니님은 비신자를 불러 신자가 되게 하시고 장로, 목사, 신학자, 순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비신자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비신자를 초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신자와 잘 지내고 틈을 봐서 교회로 초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초청하는 장면입니다. 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이 어떻게 뽕나무에 있는 삭개오를 알아 보았을까요?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는 우리 나라 뽕나무와 다릅니다. 우리 말로는 뽕나무로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돌무화과 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특징은 잎이 무성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잎이 무성해서 나무로 올라가면 그 나무에 있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나무안에 있는 사람은 나무 밖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 밖에 있는 사람은 나무안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누가 말해 주었을까요? 아무도 말해준 사람이 없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나 여기 있어요소리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보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오랫동안 교회는 비신자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많은 시스템을 개발합니다. 오늘날의 각종 전도는 그 시스템의 하나입니다. 전도의 종류도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통계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개인초청입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가겠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거창한 전도법, 전도학교, 전도훈련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와보라전도입니다. 그나마 서로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초청하는 것처럼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안드레를 초청하자 안드레가 베드로를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초청하자 나다나엘이 빌립을 초청했습니다. 전도의 85%가 초청으로 이루어집니다. 실제 우리 교회에 그런 예가 많습니다. 어느날 보니까 같은 직장에 다니는 분이 우리 교회에 나왔습니다. 반가와서 말합니다. “아이구, 어떻게 나오셨어요?”. 대답은 딱 한 마디입니다. “우리 친구가 나를 불렀어”.

 

몇 년 전에 총동원 주일에 한 분이 교회나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교회 나오셨나요?” “친구가 초청해서요. 차음에는 거부했죠. 그런데 친구가 여러번 이야기해서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왔는 데 참 좋더라고요”. “그러면 과거에는 한번도 교회 나와 본적이 없나요?” “, 한번도 없었죠”. “왜 그랬죠?” 대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36년간 한번도 사람들이 저를 초청한 적이 없었죠”. 36년간 한번도 교회 나와본적이 없는 사람이 어느날 친구의 초청을 받고 교회나온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더 일찍 초청한 사람이 있었다면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원할 기회를 놓치고 있는가? 그냥 한번 교회 가봅시다하면 될 것을, 그 이야기 한 마디 못하는 바람에 놓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전도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거창하게 생각하지만 전도는 사실 이벤트가 아니라 생활입니다. 그냥 생활속에서 입버릇처럼 할 말이 있습니다. “교회 한번 나와봐”. 우리가 초청하면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 하십니다. 혹시 못 나와도 내가 손해볼 것은 없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밥먹고 잠자는 것처럼 생활이며 습관입니다. “한번 나와 봐. 좋아”. 딱 두 마디면 됩니다. 다같이 한번 나와 봐. 좋아”. 그 다음은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안산동산교회 김인중 목사님의 설교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식당에 들어가 식당 종업원을 전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업원이 계속 언짢은 얼굴로 불친절하게 행동하더라는 것입니다. 순간 짜증이 확 올라 전도하고픈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식당을 나왔습니다. 며칠 있다가 다시 그 식당으로 갔는 데 며칠전에 보이던 종업원이 안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며칠 전 그 종업원 어디 갔어요?” 그때 주인이 쭈삣 쭈삣하며 말했답니다. “손님이 다녀간 그 날 밤 자살했습니다“. 그때 전도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했습니다. 그때 마음 먹을 때 전도할 것을. ”교회 한 번 나와 보세요. 좋아요할 것을. 그때 미루는 바람에 종업원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생활이요 습관입니다. 그저 입버릇처럼 말해 보세요. ”교회 한 번 나와 보세요. 좋아요“. 그러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비신자

복음에 대해

매우 갈 것 같다

갈 것 같다

합계

U5

적대적(5%)

0%

20%

20%

U4

거부적(21%)

17%

45%

62%

U3

중립적(36%)

23%

63%

86%

U2

우호적(27%)

46%

51%

97%

U1

수용적(11%)

52%

45%

97%

 

이 통계를 보고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 통계는 앞에서 말한 미국의 교회연구가 조지 바나의 통계입니다. 그가 미국의 많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비신자도 한 종류가 아니라 5종류였답니다. UUnbeliever, 비신자입니다. U5는 가장 적대적인 비신자입니다. 교회, 하나님을 목숨걸고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5%됩니다. U4는 거부적인 비신자입니다. 교회, 반대하지만 목숨 걸고는 하지 않습니다. 21%됩니다. U3은 중립적인 비신자입니다. 때로 좋고 때로 나쁩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교회 나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도 한번 나가 보았습니다. 지금은 쉬고 있지만 언제나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가장 많은 36%입니다. U2는 우호적인 비신자입니다. 마음은 늘 교회에 있지만 생활이 말을 안 듣습니다. 이 경우의 비신자중 약 30% 이상이 과거에 교회 다녔습니다. “가야지. 가야지하면서 못 옵니다. 언제라도 상황이 되면 교회 나올 수 있습니다. 역시 많습니다. 27%입니다. 마지막 U1은 수용적 비신자입니다. 언제라도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들을 믿는 사람이 초청했습니다. 그 초청에 얼마나 많은 비신자들이 반응을 보일까? 비신자의 종류에 따라서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그것이 오른쪽 수치입니다. 가장 적대적인 비신자가 20%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강팍한 사람도 간절히 초청하면 5명중 한 명은 교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62%, 중립적인 사람이 86%, 점점 수가 많아져서 우호적이거나 수용적인 사람은 무려 97%입니다. 초청만 하면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미국 통계이고, 한국은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사람의 마음은 비슷합니다. 어떤 적대적인 비신자라도 진실로 그리고 꾸준히 초청하면 교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성전에 대하여 거부적이었던 삭개오를 초청하신 주님, 그날 그는 오랫동안의 방황을 마치고 예수님 초청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의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신자중심의 목회를 했습니다. “일단 교회안에 들어온 신자를 잘 가르치고 양육해서 주님의 좋은 제자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제 목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점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 양육보다 더 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비신자의 구원입니다. 신자는 우선 세상에서 비신자와 잘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비신자를 교회로 초청해야 합니다. 초청에 실패는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오든지, 다음에 오든지. 안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초청은 해야 합니다. 교회는 특정 전도자만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전도대가 필요없습니다. 모두가 전도대입니다.

 

전도뿐만이 아니라 예배도 비신자에게 맞아야 합니다. 설교도 비신자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 프로그램, 사회적 봉사, 모든 것이 비신자들에게 맞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비신자에게 맞는 교회입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교회가 더 비신자 친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연구하지 않겠습니까? 비신자에게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Re-vision(3) 2014.8.24()

비신자에게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까?”(영상).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부자라”.

 

비신자의 눈으로 교회를 보아야 합니다.

교황(영상)

 

비신자도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3-4,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고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우리가 가진 오해들

1> 비신자는 반신자다.

 

비신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싫어하는 것

기독교인들의 가식적인 행동

21

엄격하고 융통성 없는 신앙관

21

특별한 것이 없음

21

예배(너무 길다, 지루하다 등)

12

헌금에 대한 지나친 강조

9

기독교인들의 우월 의식

6

교회에 참여하고 돌아오라는 압력

4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시받는 것

4

 

 

천국, 지옥에 대한 비신자들의 생각

천국, 지옥이 있다고 생각한다

천국, 지옥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르겠다/기타

79%

13%

8%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2> 한번 거절은 영원한 거절이다

 

비신자를 초청해야 합니다

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비신자

복음에 대해

매우 갈 것 같다

갈 것 같다

합계

U5

적대적(5%)

0%

20%

20%

U4

거부적(21%)

17%

45%

62%

U3

중립적(36%)

23%

63%

86%

U2

우호적(27%)

46%

51%

97%

U1

수용적(11%)

52%

45%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