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4) 2014.8.31(일)
교회에서 울 수 없다면 더 이상 울 데가 없습니다.
8월 마지막 주일에 긴 여름을 살아온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축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 남아서 축하드립니다”. 우리 삶의 최고 감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은 고민이 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입니까?”. 인터넷에 “고민”이라고 쳤더니 “세대별 고민”이라는 것이 떳습니다. 사람들의 고민은 새대별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먼저 10대, 키, 성적표, 여드름, 다이어트. 10대의 고민이랍니다. 20대, 연애, 취업, 얼굴, 다이어트, 돈. 20대부터는 돈이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30대, 취업, 결혼, 탈모, 돈, 탈모가 눈에 띕니다. 40대, 승진, 자식걱정, 탈모, 돈입니다. 자식걱정이 시작됩니다. 50대, 자식걱정, 은퇴, 노후준비, 돈. 자식걱정이 맨 먼저로 올라오고 돈 걱정은 계속됩니다. 60대, 건강, 노후걱정. 60대부터는 건강이 최고 걱정입니다. 70대 이상, 질병, 그리고 죽음. 70대부터는 질병 때문에 걱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생에 고민이 없고 걱정이 없는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고민들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겨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야기해도 속에 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어주기는 커녕 듣고 소문안 내면 다행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참고 지냅니다. 그러니까 외로워서 늘 T,V, 인터넷앞에 앉습니다. 한국 사람이 하루 평균 TV보는 시간이 4시간, 핸드폰, 인터넷 시간이 4시간, 신문보는 시간이 30분이라고 합니다. 대략 하루 9시간 정도를 매스미디어앞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외로우니까 앉아 있고 앉아 있다 보면 더 외롭습니다.
어느 성탄절에 한 할머니가 우체국앞에 긴 줄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남자 직원이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다리도 아프신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응, 나, 우표 두 장만 사려고”. “그래요? 그러면 할머니, 저 앞에 있는 기계에 돈만 넣으면 우표 두장이 나와요. 저를 따라오세요”. 그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나 여기 서 있을래”. 직원이 “할머니, 왜요?” 하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서 있을거야. 저 기계앞에 가면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처럼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세요? 손자들은 잘 있어요?하고 묻지 않거든”. 참 지혜로운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기계가 편하기는 하지만 사람처럼 자기에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가르칠 “교”, 모일 “회”,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거기 여러 사람이 모였으니 내 생각과 항상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곳입니다. 교회오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교회 나오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배말고 또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요 하나님께 받는 은혜라면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드려지는 예배와 사람과 함께 나누는 사랑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안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제가 우리 교인들의 목장모임에 참여할 때마다 느낍니다. 한 목장에 갔는 데 그 목장은 70대 이상 장로님 두 가정, 50대 안수집사, 권사, 집사, 40대 집사 부부, 30대 부부, 그리고 중학교, 초등학교, 영아부 자녀로 구성된 그야말로 전 세대 목장입니다. 이 분들은 하는 일도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교회 오기전에는 서로 몰랐는 데 얼마나 서로 행복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모든 식구가 형님, 아우 하면서 사는 것을 보면 눈물나게 아름답습니다. 최근에는 장로님 부인이 돌아가 장례식을 치루개 되었는 데 목원들이 다 장례식에 참여해 외로운 장로님을 위로했습니다. 홀로 남아 외로운 장로님을 자주 찾고 음식도 만들어 주는 등 아들, 며느리처럼 섬깁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젊은 사람을 아들, 며느리처럼, 젊은 사람은 나이많은 분들을 아버지, 어머니처럼 따르고, 시간만 나면 음식 싸들고 함께 여행을 다닙니다. 교회 아니면 어디서 이런 행복을 경험하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교회 생활하면서 행복합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느헤미아가 그 해답을 줍니다. 느헤미아는 두 주 전에 제가 설교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주전 5세기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오늘 느8장은 느헤미아가 52일만에 성벽을 다 재건하고 당시 영적 지도자 에스라를 모시고 백성들과 말씀축제를 갖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수문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습니다. 이 광장에서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성벽재건뿐 아니라 영적 재건도 하자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백성들의 반응을 보시겠습니까? 6절입니다. 느8: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참으로 놀라운 반응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에스라앞에서 백성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히브리어로 예배를 “샤하”라고 합니다. 이 말이 구약에 170번 이상 나옵니다. 이 말의 뜻은 “엎드리는 것”입니다. 단순히 몸만 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엎드리는 것, 존경과 경외의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면류관를 벗어 던집니다. 면류관은 왕관입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앞에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던지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던지고 겸손히 그 발앞에 엎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날 말씀축제에는 예배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예배와 소그룹이 함께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설교가 위대한 것은 예배뿐 아니라 한 가지가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7절을 보면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조금 지루하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읽겠습니다. 느8: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 실명으로 13사람이 나오고 또 “레위 사람들” 했으니 더 있습니다. 모두 몇 명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에스라가 설교를 마치자 이 사람들이 앞으로 쭉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각각 그룹을 짓게 하더니 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7-8절입니다. 느8:7-8, “이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이 사람들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세 가지를 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깨닫게” 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9절입니다. 느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여러분, 이것은 특이한 반응입니다. 에스라가 설교할 때만 해도 이런 반응은 없었습니다.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지만 울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흩어져 여기 저기 모이면서 울기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7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소그룹 리더들입니다. 교인들을 영적으로 케어하는 평신도 지도자들, 목자, 교사들입니다. 이들은 에스라가 설교를 마치자 백성들을 여덟명, 아홉명, 열, 열두명으로 나뉜 뒤 소그룹을 인도하며 에스라가 설교한 내용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은 크게 셋입니다. “읽고”, “해석하고”, “깨닫게 하고”, 이 세 과정은 설교와 달랐습니다. 설교는 목회자의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설교는 듣기만 하지 반응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 말할 수도 없습니다.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그룹은 수가 적기 때문에 둘러 앉아 자신이 들은 설교를 기억하며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다시 읽고, 자기가 느낀대로 소감을 말하며, 각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그랬더니 은혜가 넘쳤습니다. 보통 은혜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라의 설교를 들을 때는 잘 몰랐던 말씀이 함께 나누면서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은혜받고 너무 우니까 진행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느메니아와 에스라까지 나서서 백성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느8“9,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아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울지 말라“.
여러분, 왜 이런 변화가 임했습니까? 두 가지가 함께 갔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소그룹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 중심은 설교입니다. 소그룹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중심은 나눔입니다. 둘다 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으로 합니다. 예배는 말씀을 선포하고 소그룹은 말씀을 나눕니다. 예배의 목적은 감동이요 소그룹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둘 다가 성령님이 감동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다릅니다. 예배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하고 소그룹은 적은 사람이 모여서 합니다. 예배는 주로 주일날 드리고 소그룹은 주로 평일날 모입니다. 예배는 목회자가 인도하고 소그룹은 평신도가 인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자, 보시겠습니까?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 기둥이 둘이 있었습니다. 보아스와 야긴입니다(성전 기둥, 그림1). 이 두 기둥이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소그룹의 두 기둥입니다. 이것을 독수리 날개로 비유하는 분도 있습니다. 독수리의 두 날개가 조화를 이루어야 멀리 날 수 있습니다. (독수리 날개, 그림2).
어떻습니까? 이 두 그림으로 여러분의 교회생활을 점검해 보시겠습니까? 교회생활의한 축은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니까? 교회생활의 또 한 축은 소그룹입니다. 소그룹을 우리 교회에서는 목장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목장모임에 참여하십니까? 그래서 두 기둥, 두 날개로 신앙생활하십니까?
교회는 가정이요 목장은 가족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할 때 가장 성경적인 대답은 “교회는 가정이다”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교회가 갖고 있습니다. 가정은 친밀합니다. 교회도 친밀합니다. 가정은 육신의 피를 나눴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피를 나눴습니다. 가정은 서로 의지하고 책임집니다. 교회도 서로 의지하고 책임집니다. 가정은 운명공동체입니다. 교회도 운명공동체입니다. 이 땅에 함께 살다가 천국까지 같이 갑니다. 가정에 가족이 있듯이 교회에도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족이 교회안에 작은 교회, 목장입니다. 목장은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요 영적인 가족입니다. 미국 애틀란타의 노스포인트교회의 앤디 스탠리 목사님은 목장의 세 가지 기능을 A.B.C로 말했습니다. A는 Acountability(책임감), B는 Belonging(소속감), C는 Care(돌봄), 세 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려면 영적 소그룹인 목장에서 다음과 같은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1) Acountability, 책임감입니다.
가족이 갖는 가장 큰 힘의 비밀은 책임감입니다. 가족은 서로 피를 나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버릴 수 없습니다. 운명을 같이 하며 끝까지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옛날에 부흥회때 그런 이야기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아들을 다섯 둔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들이 없는 친구가 이렇게 부탁했답니다. “자네는 참 복도 많네. 아들이 다섯이나 되니 말이야. 그 중 하나만 내게 줄 수 없겠나?”.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술도 한 잔 했겠다 웃으면서 쉽게 말했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구. 자네와 나 사이에 그것도 못하겠나?” 그리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펄쩍 뛰더니 안된다고 반대하더랍니다. 그래도 친구와 약속한 것이니 지켜야 한다며 아들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갔답니다. 한 명씩 보는 데 큰 아들을 줄까? 장남이라서 안 되겠고, 둘째는? 다섯 놈 중에 제일 똑똑해서 안 되겠고, 셋째는? 자기를 쏙 빼닮아 안되겠고, 넷째를 줄까? 넷째는 늘 몸이 약해서 불쌍해서 안되겠고, 막내밖에 없는 데 막내를 줄까? 했는 데 막내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나서 도저히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교회요 목장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이 그 사랑이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것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지셨다는 것입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롬5:10,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잖습니까? 누구 하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책임짓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초대교회가 어떻게 했습니까? 행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초대교회는 거기 들어온 모든 사람을 책임졌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들이든 누구든 자기 것을 내서 책임졌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 교회 목장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같은 목장안에 형편이 여려운 교인 하나가 다른 교인에게 돈을 꾼 것 같습니다. 그 액수가 몇 천되는 큰 돈이었는 데 문제는 약속한 날에 갚지 못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업이 어려워지고 신뢰관계에도 금이 갔습니다. 같은 목장에 이런 일이 있으니 만날 때마다 얼마나 괴롭웠겠습니까? 목자가 그 형편을 알고 고민하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남편과 상의했습니다. “여보, 우리 목장 안에 누구 어려운가 봐요.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우리는 오랜 믿음의 형제들 아닌가요?우리가 돈을 잃을 수 있지만 형제를 잃을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대신 내주면 안될까요?” 결국 이들은 어렵게 마련한 적금을 깨서 돈을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불러 이젠 옛날을 잊어버리고 다시 형제처럼 지내자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책임을 묻지만 하나님은 책임을 집니다. 세상은 잘못을 물어 책임을 따지지만 교회는 잘못을 덮어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목장은 서로 서로 사랑하고 상호책임지는 곳입니다.
(2) Belonging, 소속감입니다.
기족이 갖는 힘의 두 번째는 가족은 하나의 뿌리에 같이 소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이 같고 고향이 같고 부모가 같습니다. 서로 서로 개성은 다르지만 근원이 같습니다. 같은 목표, 같은 가치, 같은 생각을 갖습니다. 목장이 그런 곳입니다. 교회에 등록하면 호적을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목장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호적은 있으나 가족과 만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목장에 참여하십니까? 한신교회 예배에 참여하면 등록했건 안했던 신자입니다. 저는 등록 안하고 교회 나오는 분들에게 과도하게 권유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분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다니면 편하기s하지만 믿음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더구나 목장안에 참여하지 않으면 자신의 비밀이 노출되지도 않지만 친구도 사귈 수 없습니다. 가족이 가정에 속하듯이, 가족이 다른 가족과 만나듯이, 신자는 교회에 속해야 하고, 가족은 목장에서 영적 가족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나 중심의 시대”, 소위 “me-generation"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개인주의적이기 이기적인 시대라는 뜻입니다. 한국교회 통계를 보면 10% 이상의 신자가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다닙니다. 그리고 등록한 교인의 50% 정도가 목장모임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세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교회 소속감에 없어서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떠돌이 신자가 됩니다. 둘째 교회에 깊히 들어오지 못하고 교인과의 관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의미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위기를 만날 때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최근 한 청년이 이런 내용의 글을 저에게 썻습니다. 우리 교회 근처에 사는 이 청년은 판교로 이사온 후 가까워서 우리 교회 나왔습니다. 그래서 주일예배를 몇 달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배만 드리고 가는 자신이 외로워 보였습니다. 우연히 전도사님의 권면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예배는 좋은 데 청년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용기를 내서 청년 예배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뭔가 모르게 미흡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청년예배만 나가고 청년 목장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년부 목장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부터 소속감도 생기고 믿음도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말로 제대로 신앙생활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소속이 필요합니다. 소속감이 곧 가치감이요 유대감입니다. 10% 남짓 우리 교회 미등록자도 때를 봐서 등록했으면 좋겠습니다. 50% 남짓, 우리 교회 목장모임 불참자도 오늘부터 시작하는 목장모임에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고전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중 누구 하나라도 없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한 지체입니다.
(3) Care, 돌봄입니다.
가족이 갖는 힘은 서로 돌본다는 데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자녀를 돌보고 자라서는 형제가 형제를 돌보고 늙어서 자녀가 부모를 돌봅니다. 히10:24절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목장의 첫 번째 일은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교회나오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많은 사람이 설교 때문에 은혜받으러 교회 나왔다가 나중에 자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없다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냥 교회만 나와서는 돌봄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목장은 돌봄의 공동체입니다. 주일날 교회 나오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돌보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돌보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목장에서 서로 돌보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은 눈물겹습니다. 어떤 목장에는 몸이 아픈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자주 병원에 입원합니다. 그때마다 꼭 병원에 동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장식구들입니다. 수술할 때는 새벽마다 기도하고, 입원할 때는 동행하고, 퇴원하면 집으로 찾아갑니다. 어떤 목장의 집사님이 사고가 나 다리 수술을 했습니다. 목자가 주야로 좇아다니며 입원, 퇴원 수속해주고 퇴원하자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교회, 시장을 데리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둘이 자매간 인 줄 알았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장에는 목원의 식구 부모가 상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목원들이 밤을 새워 영정을 지키며 외로운 목원을 지켰습니다. 세상에 이런 의리가 없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고3 자녀를 둔 목원이 직장 때문에 바쁘자 시간있는 목원들이 돌아가면서 차를 태워 학교에 인도해 주었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유학가는 목원의 자녀를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장학금으로 주고 공항까지 따라가 전송해 주었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목원의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원한 것을 알고 목원들이 음식을 만들어 교대로 방문하고 위로했습니다. 다른 데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니는 한신교회 목장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어떤 목장의 목원은 의사입니다. 이 분이 여름에 해외선교때가 되자 한 주간동안 자기 병원 문을 닫고 병원에 있는 모든 간호사들을 자기 비용으로 비행기표 사서 함께 선교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떤 목장의 목원은 공무원입니다. 여름에 일년에 한번 쓰는 휴가를 내 딸과 함께 땀흘리며 해외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어떤 목장의 식구들은 모든 목원, 자녀들이 함께 자전거를 빌어 주말에 양평으로 자전거 드라이브를 다녀왔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전 목원이 여름 휴가를 내서 아이들과 함께 여름 가족수양회로 2박 3일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다른 데서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우리 한신교회 목장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서로 돌보고 사랑합니다. 시133:1 말씀대로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말씀대로입니다. 히10:24도 아십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교회가 가정이라면 목장은 가족입니다. 가족들이 하는 일은 서로 돌보고 책임지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악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들려오는 데 교회에서라도 아름다운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가 들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힘든 세상에 어디가서 아픈 가슴을 하소연하겠습니까? 이 세상 어디 가서 울고 싶을 때 실컷 울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마음껏 울 데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교회는 은혜 때문에 웃는 곳이면서 또한 사랑 때문에 우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울지 않으면 이 세상에 울 데가 없습니다. 맹인 가수이며 작사가인 켄 미드머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에 가서 날아야 하나. 언제나 미소 지을 수 있는 곳을 나는 필요치 않아. 나에게는 마음껏 울 곳이 필요해.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우는 곳이 내가 살 곳이야.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작은 교회가 목장입니다. 우리 영혼에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두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예배와 소그룹입니다. 예배는 주일날 우리 모두가 함께 드립니다. 목장인 소그룹은 사랑하는 형제, 자매와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마음껏 이야기하고 마음껏 울고 마음껏 자라납니다. 외롭습니까? 힘듭니까? 교회가 울 곳입니다. 마음껏 울 곳이 있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아멘.
Re-vision(4) 2014.8.31.(일)
교회에서 울 수 없다면 더 이상 울 데가 없습니다.
“세대별 고민”
10대-키, 성적표, 여드름, 다이어트.
20대-연애, 취업, 얼굴, 다이어트, 돈.
30대-취업, 결혼, 탈모, 돈.
40대-승진, 자식걱정, 탈모, 돈
50대-자식걱정, 은퇴, 노후준비, 돈.
60대-건강, 노후걱정.
70대 이상-질병, 죽음.
느8: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예배와 소그룹이 함께 있습니다.
느8: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
느8:7-8, “이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느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8:9,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아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울지 말라“.
성전의 두 기둥 보아스와 야긴(그림1).
독수리의 날개 (그림2).
교회는 가정이요 목장은 가족입니다.
앤디 스탠리, “목장의 3대 기능”
Acountability(책임감), B는 Belonging(소속감), C는 Care(돌봄),
(1) Acountability, 책임감입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롬5:10,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행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2) Belonging, 소속감입니다.
고전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3) Care, 돌봄입니다.
히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시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켄 미드머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에 가서 날아야 하나. 언제나 미소 지을 수 있는 곳을 나는 필요치 않아. 나에게는 마음껏 울 곳이 필요해.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우는 곳이 내가 살 곳이야.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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