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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Re-vision(5) 2014.9.7(일)

Re-vision(5) 2014.9.7()

대화가 필요합니다

추석입니다. 추석은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사랑을 나누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입니다. 어떻게 여러분도 가족과 함께 모입니까? 가족과 함께 모일 때 필요한 것이 대화입니다. 개그 콘서트에서 인기를 얻었던 코너가 있습니다. “대화가 필요해라는 코너입니다. 보실까요?(영상).

 

어떻습니까? 대화없이 밥만 먹는 모습이 우리 가정의 모습은 아닌가요? 혹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산 나머지 우리가 이사가는 줄도 모르고 자녀들의 성적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은 말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자극적인 것이 잠18:21절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은 우리에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고 사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말의 열매를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는 며느리들은 반드시 시어머니를 만날텐데, 박광수 씨가 그린 광수 생각이라는 만화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한 며느리에게 어느날 낯선 사람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너의 시어머니를 우리가 납치했다. 우리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너의 시어머니를 우리가 가만 두지 않겠다.” 그 소리를 들은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 한 푼도 못 줘, 니들 맘대로 해”. 그랬더니 납치범이 또 다시 말합니다. “좋다. 몸값을 주지 않겠다면 네 시어머니를 당장 네 집으로 돌려보내 버리겠다.” 그때 당황한 며느리가 급하게 외칩니다. “통장 번호가 어떻게 되는데요? 얼마를 보내면 돼요?”. 이번 추석에는 이런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3년전 어떤 기관에서 네티즌 5,032명이 참여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질문은 당신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1위로 선정된 말이 모두 잘 될 겁니다였습니다. 60.7%, 3,053명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2, “그대를 사랑합니다”. 19.1%, 3, “너는 할 수 있어”, 11.7%, 4, “고맙습니다”, 5, “괜찮아, 걱정마”. 어려운 시대에 사람들은 남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 잘거야. 괜찮아. 힘내, 고마워, 사랑해”,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외로운 시대, 사람들은 남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소통하고 외롭지 않게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한 대화를 원하십니까? 가족과 교인과 직장에서,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과 행복한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까? 성경이 말하는 대화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대화와 소통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36절 보실까요?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매 이게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이스라엘은 사람을 식사에 초청하는 좋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 음식을 혼자 먹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식탁은 다만 밥만 먹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귀는 곳입니다. 저도 이스라엘에서 여러번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보면 음식도 음식이지만 대화를 많이 합니다. 조용히 음식만 먹는 우리 문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가 그치지 않습니다. 포도주는 기본입니다. 포도주가 한 두 잔 들어가면 흥겹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정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 정말 행복했다”. “사람 대접받았다”, “훈훈했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의 초청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이 초청을 받으면 하인이 나와서 손님의 손과 발부터 씻깁니다. 그런데 오늘의 바리새인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은 준비 했지만 마음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갑자기 한 여자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37절입니다.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데 한 여자가 불쑥 들어왔습니다. 불청객이었습니다. 누군가 보니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딱딱한 분위기인데 갑자기 불청객이 들어와 대화의 분위기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대화적 관계는 바리새인과 예수님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갑자기 끼어 들자 여자가 대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서 대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그리고 여자, 이 세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성경적 대화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대화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대화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대화하면 서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로 말하는 것이 대화가 아니라 서로 듣는 것이 대화입니다. 우선 잘 들어야 잘 말합니다. 우리 대화가 잘 안되는 것은 잘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려면 그의 형편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온 여자는 어떤 여자입니까? 37절에 죄인인 여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인은 누구입니까? 보통 예수님 시대 죄인하면,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기를 의미했습니다. 결혼했거나 안 했거나 돈을 목적으로 아무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윤리적으로 나쁜 일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런 남녀를 돌로 처죽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을 율법의 눈으로 보지 않고 부모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부모에게 자식은 소중하지 않습니까? 평생 그 일을 하며 손가락질과 모멸속에 살아온 당사자는 어떨까요?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한편 자신의 운명이 미웁고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자신이 서럽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38절입니다. 7:38,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왜 이 여인은 예수님 뒤에 서 있었을까요? 아마도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 뒤에 서서 울고 있는 여자를 보시나요? 그 눈물은 아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한의 눈물일 것입니다. 마음의 자존심 무너지고, 수치심과 억울함으로 깨어진 자기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 눈물일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앞에 선 사람중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아무런 아픔없이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든지 말로 대화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의 아픔의 소리를 먼저 듣지 않으면 대화는 허공을 치고 맙니다.

 

미국의 작가, 오 헨리의 단편중에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주인이 강도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강도는 총을 들이대며 소리칩니다. “손들어!”. 집주인은 엉겁결에 손을 들었는 데 왼손만 들고 오른손을 들지 못했니다. 그래서 강도가 물었습니다. “왜 한 손만 드나? 두 손 다 들어”. 그때 주인이 더듬거리며 말합니다. “사실은 제 오른손이 신경통으로 마비되어 못 듭니다. 그래서 왼손만 듭니다”. 이 말을 들은 강도가 슬그머니 총을 내려놓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도 신경통 때문에 강도가 되었소. 낮에는 일을 못하고 밤에는 아파서 한 숨도 못 잡니, 강도짓밖에는 더 하겠소?” 그러면서 둘은 마주앉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주인과 강도는 그 다음날, 친구가 되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25% 정도만 듣고 나머지 75%는 못 듣는다고 합니다. 75%는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오해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듣는 태도는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며 듣는 것입니다. 실제 아무 것도 안 듣는 것입니다. 둘째는 , 그래, 그렇지, 맞아.” 하며 맞장구 치면서 실제로는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체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선택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대화중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네 번째는 집중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에 주의하고 그 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공감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공감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이해하면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공감은 동감이 아닙니다”. 동감은 내 생각과 같은 것이며 공감은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 그 사람의 말을 그 사람의 말대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동감은 합의지만, 공감은 이해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언제나 동감일 수 없지만 언제나 공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상대의 이야기로 들어주는 것이 공감입니다. 내 의견과 달라도 상대의 의견으로 존중해 주면 공감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가 예수님의 공감적 대화를 p로 시작하는 세 단어로 나타냈습니다. 먼저 positive. 예수님이 보여준 공감적 대화의 첫 번째는 positive,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무식한 어부 베드로에게는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고 반석이라고 말합니다. 단단하다는 뜻입니다. 내성적이고 영적으로 예민한 요한에게 변덕이 심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의 우레소리같다고 말합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홀로 앉아 있던 나다나엘에게 무능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남편 5명이나 있었던 수가성 여인에게는 부정한 여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인생의 갈증이 많은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여자에게도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47, “죄는 많지만 하나님의 용서도 많이 받은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를 죄인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positive, 긍정의 언어로 말했습니다.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상대방과의 대화도 시작됩니다.

 

가끔 광고에서 큰 사이즈의 물건을 퀸 사이즈라고 말한 것을 듭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여성사업가 오스틴이 큰 체형의 여성 속옷을 처음에 빅 사이즈라고 불렀다가 안 팔리자 퀸 사이즈로 바꾼 것으로부터 유래합니다. “빅 사이즈가 아니라 퀸 사이즈로 부르자 옷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속옷을 입는 여성들이 이 옷을 입을 때마다 자신은 뚱뚱보가 아니라 여왕과 같은 존재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positive, 긍정의 언어가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참가자들에게 두 종류의 메모가 적힌 고깃덩이를 보여주고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지방 99%”, 다른 하나는 지방 1%함유”. 내용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고기를 선택했습니까? “무지방 99%”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긍정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present, 현재형으로 말씀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죄인인 여자를 보는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은 여자의 과거를 보고 예수님은 여자의 현재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여자에게서 과거에 나쁜 짓 하고 살았던 죄인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이제는 돌아와 눈물로 참회하는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과거를 보지 말고 현재를 보아야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야 공감합니다. 세 번째가 personal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개인적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같이 이야기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합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일 뿐 아니라 효과도 없는 일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좋은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할 때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집중했습니다. 삭개오와 이야기할 때는 삭개오에게만 집중했습니다. 한 사람을 일반화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누가 있든 그가 전부였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든지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람은 많은 사람중 하나가 아니고 그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 사람, 그에게 집중하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를 최고의 사람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감 화법입니다. 어떻습나까? 여러분도 대화할 때 말하기 전에 잘 듣겠습니까? 성경 18:13입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잘 듣는 것이 지혜요 잘 듣는 것이 좋은 대화의 시작입니다.

 

식탁에서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탁에 초청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대화가 일어난 현장이 식탁입니다. 다시 36절을 보시겠습니까?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중동 문화의 독특한 특징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전 광야에서 양을 치던 유목민들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외딴 들에서 양을 치던 이들에게 멀리서 사람 하나가 나타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달려 나가 반갑게 맞이한 후 텐트로 데리고 들어가 차를 대접하고 음식을 공급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누구와 식탁에 마주 앉을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이 마음입니다. 이것을 환대라고 합니다. 유목민에게 식탁은 다만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하나님처럼 환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식탁의 기본 정신이 환대입니다. 환대는 다만 친절한 것이 아니라 나그네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영접해주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에 가면 입구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은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함깨 음식을 먹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예수님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과 함께 먹었지 않습니까? 그와 함께 먹음으로 그의 할아버지 사울의 죄를 모두 용납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와 함께 먹었지 않습니까? 다만 밥만 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먹음으로 그들을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미국의 영성가 헨리 니우엔이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에서 이렇게 썻습니다. “환대란 낯선 나그네가 들어와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열어 준다는 뜻이다. 환대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환대란 사람에게 먹고 자는 공간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의 자존감과 평생의 가치의 방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환대는 한번의 친절한 행동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가장 많이 배운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의 연구팀에 의하면 세 살 어린아이가 책을 통해 배우는 단어는 대략 140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식사하면서 배우는 단어는 1,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식사때 대화를 많이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함께 둘러 앉아 식사하는 가정의 자녀들이 나중에 언어 능력, 대화능력, 독해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주일에 적어도 5회 이상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10대 청소년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청소년들보다 학업 성적이 훨씬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식사때 밥만 먹는 것이 으니라 대화를 통해 언어를 배우고 생각을 배우고 삶의 태도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식탁에서의 대화를 잘해서 세계적인 민족이 된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평소에도 거의 혼자 식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가족과 함께 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정, 식당, 호텔, 키부츠에 가보면 거의 가족과 함께 식사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않습니다. 가장의 자리는 항상 중앙입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심지어 그 자리를 비워 놓습니다. 자녀들은 어른들과 함께 식사함으로서 자신들도 가족의 한 구성원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며 어른들의 언어와 생각을 듣고 자라면서 지능이 발달합니다. 언제 어린아이가 밖에서 일제 시대를 살아본 할아버지와 이야기하며 언제 초등학생이 삼성 다니는 아저씨와 이야기해 보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가정에서 식구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으면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질문함으로써 누구와도 대화하고 사는 법을 어릴 때부터 배웁니다. 그들의 식탁에서의 대화와 토론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항상 연장자가 먼저 발언한다. 둘째, 다른 사람의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지 않는다. 셋째, 말하기 전에 먼저 깊히 생각한다. 넷째, 대답할 때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다섯째, 대답은 짧게 하고 질문은 많이 한다. 여섯째, 처음 할 이야기와 나중 할 이야기를 잘 구별한다. 일곱째, 잘 알지 못하고 말했거나 잘못 말한 것은 솔직히 인정한다.

 

유대인의 우수성은 두 말할 것 없이 식탁에서 길러집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족들이 함께 식탁에 앉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으면 밥을 같이 먹어 가족간에 화목한 것뿐만 아닙니다. 대화하는 법도 배웁니다. 어른들의 생각을 알아 사춘기의 탈선도 막아 줍니다. 어릴 때는 그들에게서 언어를 배우고 자라서는 그들에게서 생각을 배웁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에 어려운 것은 어려서부터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식탁은 축소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 소리부터 지르는 것은 어릴 때부터 어른과 식탁에 함께 앉아 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른과 함께 앉으면 항상 어른이 먼저 말하고 어른이 말할 때 조용히 듣는 일에 훈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때 남의 말을 가로채는 이유도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른과 함께 이야기하다보면 말을 가로챌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 말씀을 아십니까? 128: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아내는 안방에 있고 자녀는 식탁에 들러 앉아 있어야 합니다. 식탁의 중요성을 말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추석에 온 식구가 둘러 앉겠습니까? 다만 밥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식구가 한 가족이며 식탁에 둘러 앉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고모, 동생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배우고 자라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추석 이후, 평생 온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 앉겠습니까? 식탁에서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살리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불청객에 대한 예수님의 다음의 말로 마칩니다. 50절입니다.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사실 이 말씀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한 유일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한 단 한 마디 말이 여인에게 축복과 구원을 선포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말을 많이 해야 좋은 대화가 아니라 살리는 말이어야 좋은 대화입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것이 SNS를 통해 말하는 소위 사이버 언어입니다. 그런데 이 언어가 자주 폭력화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본래 좋은 목적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많은 인터넷 언어가 사이버 폭력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소위 악플이란 것이 그것입니다. 악플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식의 악플, 그래서 많은 연예인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배 아파형 악플, 사회매장형, 지역감정형 악플, 어떤 경우들이 사이버 언어는 빨리 확산되고, 문자로 기록했으니 없애기 전에는 남아 있고, 한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집단화되고, 이로 인해 많이 사람이 모욕감, 명예훼손을 당하고 그레서 사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믿는 사람들은 절대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레19:16절입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논단하지 말라는 말은 쓸데 없는 말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를 성경은 말합니다. 9:8,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죽이는 화살입니다. 사람들의 심장을 뚫고 날아갑니다. 살리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비판, 비방, 중상, 험담은 죽이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지 말이야 할 세 가지 성경적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지금의 모습이 그 사람의 전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나도 내가 모르는 데 남 속에 있는 남을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두 번째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판단하십니다. 언젠가 한경직 목사님께 기자가 와서 물었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목회에도 성공하시고 많은 사람이 성자같은 목사님이라고 말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한경직 목사님이 한참 생각하시다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앞에 서봐야 알지요했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사람을 판단하겠습니까? 하나님앞에 서 봐야 아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것입니다. 남의 행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알 것은 신앙은 언제나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캘커타 테레사 수녀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고 험담을 했답니다. 그때 수녀가 한 마디했습니다.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은 사람을 쳐다볼 겨를이 없습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데 바쁜 사람이 어떻게 남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하겠습니까? 내가 사랑이 없는 데 어떻게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으며 내가 헌금을 안하는 데 어떻게 교회 재정이 어떻고 저떻고를 말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성경이 말합니다.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존하느니라”(13:3). 또 말합니다. 34: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그리고 바울이 말합니다. 5:3-4,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아멘. 살리는 말, 예수님이 사용하신 살리는 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살리는 말을 통해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나로 인해 행복하게 사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Re-vision(5) 2014.9.7()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가 필요해” (영상).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매 이게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대화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7:38,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경청의 종류

-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며 듣는 것

- 듣는 체하며 안 듣는 것

- 선택적으로 듣는 것

- 집중적으로 듣는 것

- 공감적으로 듣는 것

 

공감은 동감이 아니다.

 

예수님의 공감적 대화(3p)

- positive(긍정적)

- present(현재적)

- personal(개인적)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식탁에서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헨리 니우엔, “환대란 낯선 나그네가 들어와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열어 준다는 뜻이다. 환대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

 

이스라엘의 식탁대화

- 항상 연장자가 먼저 발언한다.

- 다른 사람의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지 않는다.

- 말하기 전에 먼저 깊히 생각한다.

- 대답할 때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 대답은 짧게 하고 질문은 많이 한다.

- 처음 할 이야기와 나중 할 이야기를 잘 구별한다.

- 잘 알지 못하고 말했거나 잘못 말한 것은 솔직히 인정한다.

 

128: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살리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9:8,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죽이는 말(비판, 비방, 중상, 험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

-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판단한다.

- 신앙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다.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존하느니라”.

34: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5:3-4,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