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7) (신6:4-9, 잠22:6) 2014.9.21(일)
우리의 소원은 자녀를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이 갖는 가장 큰 소원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부부끼리 사랑하고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 그것이 모든 사람이 꿈꾸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소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필수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교육입니다. 자녀를 잘 가르치고 싶은 소원, 이 소원 역시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공통된 소원입니다. 가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 매스컴이 보도됩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한국교육이 그렇게 훌륭한가? 한국교육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 있는가?” 그러다가 생각한 것은 한국의 교육열입니다. 오바마가 배워야 한다고 말한 한국교육은 아마도 한국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한국처럼 자녀교육에 열정적인 나라가 있을까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2년 전국 가족보건 및 복지실태조사”에 따르면 부모가 자녀 한 명을 낳아 대학을 졸업시킬 때까지 드는 비용이 총 3억 896만원이랍니다. 월평균 120만원 정도로 9년 전에 비해 56.8%가 증가했습니다. 가장 많이 증가한 세대는 만 3살에서 5살까지 유아가 70.7%, 0세에서 2살까지 영아가 69.9%로 가장 많이 증가했습니다. 사교육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2010년 한국교육개발원이 낸 자료를 보면 만 3세부터 취학 전 자녀 2527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했는 데 무려 99.8%의 미취학 자녀들이 사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대학에 가기 위해 중고등학교 때만 영어, 수학 과외를 받는 정도였는 데 지금은 초등학생, 심지어 취학전의 아이까지도 무려 99.8%가 사교육을 받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돈을 많이 들여 교육시키면 아이들이 더 행복하고 건강합니까? 결과는 반대입니다. 한림대학교 홍현주 교수팀이 연구한 보고에 따르면 하루 네 시간 이상 사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30%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우울증은성인이 되어도 그대로 이러진다고 합니다. 어떤 분의 말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잘되는 병원이 두 가지랍니다. 성형외과와 소아정신과입니다. 30년 전에는 이름조차 없었던 소아정신과에 아이들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미술치료, 음악치료, 독서치료, 놀이치료, 언어치료등 온갖 치료로 아이들을 치료합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들여 공부시켜 우울증 생기고, 또 돈들여 치료하고 있으니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자녀들의 조기교육으로 “기러기 아빠”, “오리 아빠”가 생긴 것은 옛날이고, 요즘은 “매니저 맘”, “헬리콥터맘”이 생겼습니다. 엄마가 아예 아이 공부 매니저로 나서서 “매니저 맘”이고, 얼마나 바쁜지 헬리콥터처럼 날아다닌다 해서 “헬리콥터 맘”입니다. 그렇게 많이 투자하고 그렇게 많이 가르쳐도 우울증 생기고, 성적 떨어졌다고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우수수 뛰어내리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혹시 우리가 자녀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자녀교육이 중요한데도 왜 부모들은 안 가르치고 밖에서만 가르칩니까? 그래서 어떤 교육학자가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자녀교육은 외주 하청형 자녀교육이다”. 다 남의 손에 맡겨 돈주고 키운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는 일은 밥주고 재워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까?
저는 신명기를 읽으며 해답을 찾았습니다. 신6:4-9절입니다. 함께 읽을까요?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여러분도 이 말씀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리의 요3:16절처럼 소중한 신앙과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소중한 것은 아니라 우리에게도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녀 교육에 관하여 세 가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첫째 누가 가르칠 것인가? 둘째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셋째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입니다.
누가 가르칠 것인가?
교육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치느냐입니다. 교재도 중요하고 시설도 중요하지만 교육은 역시 교사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누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분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야죠”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를 교회에 맡기면서 ”교회에서 말씀으로 가르쳐야죠“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학교도 가르치고 교회도 가르쳐야 합니다. 학교는 지식을, 교회는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50:3,000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50은 자녀가 교회에 있는 시간이고 3,000은 가정에 있는 시간입니다. 교회다니는 아이가 교회학교에서 배우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휴가나 방학을 빼고 거의 개근한다고 해도 일년에 50시간입니다. 교회 많이 나오는 것 같아도 일년에 50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는 엄청난 시간을 보냅니다. 그것이 3,000시간입니다. 그래서 50:3,000 원칙입니다. 매주 교회나오는 시간이 1시간이 아니라 2시간이라고 해도 1년에 100시간입니다. 그러면 100:3,000입니다. 어떻습니까? 일년에 50시간에서 100시간 보내는 교회에서 교육을 많이 받겠습니까? 3,000시간 보내는 가정에서 교육을 많이 받겠습니까? 당연히 가정입니다.
이 말은 교회는 자녀교육의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마땅히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가 늘 기억할 말씀이 있습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같이 ”마땅히“. 교회는 마땅히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여기서 ”아이“는 유아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직 부모의 슬하에 모든 자녀를 말합니다. 나이가 40이라도 부모밑에 있으면 여전히 가르쳐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자녀교육이 주로 가정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신자의 자녀교육은 100%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믿는 가정의 경우는 자녀를 주일날 교회는 보내지만 안 믿는 가정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평일에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육받는 것은 같습니다. 그나마 믿는 가정에서 주일날 자녀를 교회 보내지 않으면 안 믿는 가정과 똑같습니다. 교육 내용이나 가치가 불신자와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교회 집사, 장로라는 것만 차이가 있습니다. 가정은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돈대주는 곳, 그리고 가끔 잔소리하고 구박하는 정도,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할 것이며". 오늘 말씀은 자녀교육의 주체가 부모라고 말합니다. “네 자녀에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부모에게 자녀교육을 명령합니다. 거기에 학교 선생님도, 과외교사도, 심지어 교회도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전적으로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 집에 앉는다는 말은 식탁에 앉았다는 말입니다. 식사 시간이 곧 교육시간입니다. “길을 갈 때에”, 밖에 나가 길을 걸을 때도 심지어 교육 시간입니다. “누었을 때”, 취침 시간입니다. 누었는 데 어떻게 교육합니까? 소위 베겟머리 교육입니다. 팔베개하며 도란 도란 이야기하고 책을 읽어주며 교육합니다. “일어날 때에든지”, 아침입니다. 가정에서 교육은 아침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아버지가 칠판놓고 강의하지는 않습니다. 어머니가 성경강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순간부터 자녀는 보고 배웁니다. 교육이 없는 시간은 딱 하나입니다. 잠자는 시간입니다. 잠자는 시간 빼놓고 모든 시간이 교육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 가정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학교에, 학원에 맡깁니다. 믿는 사람은 주일마다 교회 맡기지만 그것도 일년에 50시간, 100시간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교육은 누가 합니까? 비신자는 말할 것 없고 신자인 여러분은 오로지 교회에만 맡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에 맡겼으면 그것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데 자녀가 교회 안 나올 때 권면합니까? 혹시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회학교 선생님 이름은 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예배드리는 교실에 한번 가보셨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교회와 가정을 두 기관을 같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자녀교육을 위한 동반자입니다. 서로의 장점을 살려 시너지를 내야 합니다. 자녀를 교회에 맡겼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부모나 부모없이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는 어느 쪽도 성공적인 교육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둘이 같이 가야 합니다. 서로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필요한 것을 가정이 돕고 가정이 필요한 것을 교회가 도와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이 함께 가는 교육이 되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원칙을 전제해야 합니다.
1. 자녀는 하나님에게 소중한 존재다.
2. 자녀는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자라야 온전하게 자랄 수 있다.
3. 부모만큼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없다.
4. 교회만큼 부모에게 영향을 미칠 것은 없다.
5. 자녀교육을 위해 가정과 교회가 협력할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교회와 가정이 연계된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번 가을에 준비해서 빠르면 연말부터 이렇게 했으면 합니다. 우선 교회학교 학부모모임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모여 주십시오. 가족과 함께 하는 체험의 기회를 늘리려고 합니다. 많이 참여해 주십시오. 자녀교육은 부모교육입니다. 부모가 잘 배워야 자녀들도 잘 배웁니다. 그래서 부모학교가 필요합니다. 헌아식, 세례, 생일, 성경학교, 여름봉사, 여행, 졸업식등 자녀들이 교회안에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나갈 때마다 함께 해 주십시오. 부모와 함께 하는 정기적인 예배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주 교회에서 자녀들이 무슨 설교를 듣고 분반공부시간에는 무슨 주제로 토론하는지 교육 자료를 부모와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주제로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제 비전은 간단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교회에서 부모없이 혼자 자라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것을 가정에서 실천하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성경적 가치가 가정과 학교에서의 세상적 가치와 유리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이 가정, 교회, 세상, 어디에 있으나 하나님안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승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부모와 교회는 자녀교육의 아름다운 동역자입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교육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미국 교육부장관도 여러 차례 한국 교육을 칭찬했지만 그것도 교육열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에는 열정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표를 보실까요?
교육=열정(자세) + 시스템(방법) + 가치(목적)
교육에는 열정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어내는 방법과 그것이 지향하는 교육적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한국학생이 미국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비율은 전 입학생의 1%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들어가서 중도에 그만 두는 율이 44%입니다. 10명이 입학했다면 4명 이상이 그만 둡니다. 왜 그럴까요? 교육의 열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듣고 외우고 시험 보는” 방식으로 공부해서 학교에 들어갔으나 그 방법이 계속 통하지 않으니까 학교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에 없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체험이 없고 자기성찰이 없고 토론이 없습니다. 그냥 머리에 집어 넣기만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에 대해서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다시 읽을까요?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1) 마음에 새기고
자, 우선 7절부터 순서를 보면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했습니다. 가장 첫 번째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새기는 것”입니다. 새긴다는 말은 “못을 박는다”는 말입니다. 칼이나 정을 가지고 “나무나 돌에 조각하는 것”입니다. 단지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시험보기 위해 밤새워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마음”은 “레브”, “심장”입니다.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장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구의 심장에 새기느냐입니다. 가르치는 대상의 심장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의 심장에 새깁니다. 교사가 누구입니까? 부모입니다.
언제나 목회는 목사고 교육은 교사입니다. 교사인 내가 먼저 확신할 수 없으면 남도 확신시킬 수 없습니다. 잠6:21입니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속에 새긴 것만 내것입니다. 시119:11절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이 “마음이 둔 것”이 새기는 것입니다. 새긴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네 가지가 이어집니다. 가르치고, 강론하고, 기호를 삼으며, 기록하는 것입니다.
2) 가르치고
교육의 방식이 크게 넷입니다. “가르치라”. 이 말을 히브리어로 “샤난”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찌르다. 뾰쪽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칼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히4:12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교육은 강의가 아닙니다. 영혼에 대한 예리한 수술입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아파야 치료가 됩니다. 교육의 목적은 곧 삶의 변화입니다. 듣기 위해 듣는 것이 아닙니다. 칼로 찌르듯 가르치려면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이고 맞춤형이어야 합니다. 이래서 이스라엘에서 발전한 것이 토론식 교육입니다. 이스라엘의 학교는 모두 토론식으로 진행됩니다. 수업시간이 조용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말하면 서로 마주보고 토론합니다(사진1). 개인 책상은 서로 마주보도록 되어 있고 전체 책상은 앞을 향하여 반원형으로 놓여 있습니다. 책이 앞에 있지만 책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이야기합니다. 이 토론식 교육을 “하브루타 방식”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공부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런 순서로 진행합니다.
1. 먼저 책을 소리 내서 읽는다.
2. 내용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정한다.
3.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말한다.
4. 서로 질문과 답변을 오가며 토론하고 논쟁한다.
5.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다시 이야기한다.
6. 결론은 하나가 아니라 항상 여러 가지다.
여러분은 열두 살 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성전에 올라가 박사들과 토론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눅2:46입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우리 같으면 “말하기도 하시며 가르치기도 하시니”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고 말합니다. 듣는 것만이 교육이 아닙니다. 유대인 하브루타 교육의 장점은 서로 다른 견해, 다른 관점, 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창의성이란 다르지만 새롭게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3) 강론하라
가르쳤으면 강론해야 합니다. 강론은 우리 말 “강의”와 다릅니다. 이것은 “다바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야기하고 싶어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유대인 교육의 핵심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태교때부터 시작됩니다. 유대인 태교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엄마가 앉아 수를 놓으면서 뱃속의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치 옆에 아가 있는 것처럼 도란 도란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배셋머리에 뉘이고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자라면 밥상머리에서 이야기합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안식일식탁에 앉아 두 가지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성경을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유대인은 매일 읽어야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년에 한번, 탈무드는 7년에 한번 정도 읽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가 끝나면 일상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마 아타 호셉?“.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입니다. 같은 주제에 대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누가, 형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강론“입니다. ”강의“가 아닙니다.
4) 표를 하라
그리고 표를 하는 데 두 가지 표가 있습니다. 손에 붙이는 표와 이마에 붙이는 표입니다. 손은 13세부터 남자가 왼쪽 팔에 하나님의 말씀을 감는 것입니다. 손목에서 팔꿈치 까지 7번 감습니다. 그리고 그 손을 심장에 대고 다닙니다(사진2). 이마에 붙이는 기호는 눈과 이마 사이에 붙입니다(사진3). 몸에만 붙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는 집에도 붙입니다. 모든 가정의 화장실을 제외하고 대문에서 방문까지 모든 문의 오른쪽에 눈 높이만큼 붙입니다(사진4). 작은 상자 모양으로 뚜껑을 열면 신6:4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집을 나가고 들어갈 때 만집니다.
5) 기록하라.
그리고 마지막에 기록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이 교육방식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기라 가르치라 강론하라 표를 하라 기록하라
(마음) (토론) (이야기) (눈) (성찰)
어떻습니까?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다만 외우기만 하는 우리의 교육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이 작은 차이가 유대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배워야 할 교육방식이 이 교육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교회와 가정이 자녀를 교육할 때 기억할 또 한 가지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입니다. 2011년 11월, 세상을 놀라게 한 패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시신과 함께 8개월을 살다가 검거된 사건입니다. 왜 이 아이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어머니가 끊임없이 1등만을 요구해서 아이가 폭발한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엄마는 아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3일 동안 잠도 재우지 않고 골프채로 때려 아이의 바지에 피가 발견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의 부모들은 자녀의 학업에만 집착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가 지식뿐입니까? 감정도 있고 성품도 있고 영성도 있는 데 왜 우리는 성적 하나에만 목숨거는 것입니까? 그렇게 했어도 노벨상 하나밖에 타지 못했지 않습니까? 문제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입니다.
다시 신명기로 돌아가 봅시다.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에 명확하게 우리가 가르쳐야 할 교육의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아”. 결국 교육은 하나님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교육의 기초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인 여호아시니”.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하나, 둘, 셋의 숫자개념보다 큽니다. 여기서 하나는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존재의 근원입니다. 모든 것의 통일입니다. 모든 것을 합친 전체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all in one, 하나안에 있는 모든 것이요, one in all, 모든 것안에 있는 하나입니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연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정신, 혼입니다. 성품은 영입니다. 힘은 육입니다. 영과 혼과 육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하나님 사랑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결판납니다.
가끔 하나님은 모르는 데 공부를 잘 해서 유명한 인물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럴싸 했지만 그런 사람들의 불행한 내면, 가정, 운명을 쓴 책이 있습니다. “무신론의 심리학”(사진5)입니다. 이 책은 겉으로 볼때는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으나 무신론자였던 니체, 프로이트, 러셀, 장 폴 샤르트르, 데이비드 홈, 카뮈, 쇼펜하우어, 홉스, 볼테르,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 칼 마르크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무신론자가 되어 어떻게 살다 죽었는가를 추적한 책인데 대부분 자살하거나 불행하게 죽었고 혹시 제 명에 죽었어도 어떻게 그 후손중에 정신병, 우울증, 사회적 낙오자들이 생겼는가를 추적한 책입니다. 역사가 남긴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 잘 믿은 사람은 고난도 많았지만 반드시 성공했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았고 그 자신도 행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뿐 아니라 가정, 학교에서 이 하나님중심의 교육을 시켜야 하는 데 요즘 공교육의 탈선으로 대안학교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안학교중에는 좋은 학교가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새로운 대안학교를 만드는 것이 새로운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교육이 새로운 교육이다“. 그래서 저는 대안학교보다 원안학교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학교를 대신한 다른 학교가 대안학교라면 본래 성경이 추구한 학교를 교회와 가정을 통해 벌여 나가고 그 영향으로 학교도, 세상도 바꿔 나가는 것, 그것이 원안학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원안학교의 기초를 닦도록 힘을 모읍시다. 교회학교 교육에 관심 가져 주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좋은 교사로 지원해 주십시오. 가을에 있을 교육연구 소그룹팀에도 참여해 주십시오. 또한 가정이 자녀의 신앙교육의 센터가 되게 합시다. 교회와 가정이 하나되어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 그것이 우리의 꿈이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Re-vision(7) (신6:4-9, 잠22:6) 2014.9.21(일)
우리의 소원은 자녀를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누가 가르칠 것인가?
50:3,000법칙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할 것이며".
교회와 가정이 함께 가는 교육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원칙
1. 자녀는 하나님에게 소중한 존재다.
2. 자녀는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자라야 온전하게 자랄 수 있다.
3. 부모만큼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없다.
4. 교회만큼 부모에게 영향을 미칠 것은 없다.
5. 자녀교육을 위해 가정과 교회가 협력할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교육=열정(자세) + 시스템(방법) + 가치(목적)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1) 마음에 새기고
잠6:21,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시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2) 가르치고
이스라엘 토론식 수업(사진1).
하브루타 방식의 교육
1. 먼저 책을 소리 내서 읽는다.
2. 내용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정한다.
3.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말한다.
4. 서로 질문과 답변을 오가며 토론하고 논쟁한다.
5.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다시 이야기한다.
6. 결론은 하나가 아니라 항상 여러 가지다.
눅2:46,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3) 강론하라
4) 표를 하라
태플린(사진2). 이마(사진3). 메주자(사진4)
5) 기록하라.
새기라 가르치라 강론하라 표를 하라 기록하라
(마음) (토론) (이야기) (눈) (성찰)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폴 비츠. “무신론의 심리학”(사진5)
공교육-대안학교-원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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