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4:13-17 2015.2.22(일)
행복한 가정에 희망이 따릅니다
설을 지나고 다시 모여서 기쁩니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수많은 국민들이 고향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고향에 가서 가장 좋은 것은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도시에 살면서 이것 저것 먹어보지만 어머니의 밥상만한 것이 없습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그리운 것은 어머니의 밥상입니다. 설날 전후에 우연히 작은 영상 하나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엄마의 밥”입니다. 부모를 떠나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에게 어머니들이 몰래 찾아가 밥상을 차려준다는 이야기입니다(영상).
어떻습니까? 우리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이번 설에 저희 가정은 부모님이 올라 오셨습니다. 연세가 드렸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슴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모였습니다. 형제, 자매, 아들, 딸, 조카, 손자들, 모두 모여 흐뭇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날 때는 기쁘고 헤어질 때는 슬픈 마음, 가족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이번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역시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님 보내드리고 돌아와 룻기를 읽었습니다. 가족들을 생각하며 룻기를 읽었는 데 다른 때보다 더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룻기는 가정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사시대에 살았던 나오미와 엘리 멜렉, 그들 부부가 겪었던 이야기가 베들레헴 들녁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나오미와 엘리멕렉이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흉년이 들어 집안이 가난해집니다. 그래서 살 길을 찾아 모압땅으로 이사를 갑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에서 사해를 건너기만 하면 됩니다. 가깝기도 하고 이스라엘의 먼 친척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습니다. 두 아들을 장가보냈는 데 며느리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큰 며느리는 돌아가고 둘째 며느리는 안 돌아갑니다.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합니다. 그가 룻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하게 삽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며느리가 이삭을 줍는 밭의 주인이 남편의 가까운 혈통임을 압니다. 그가 보아스입니다. 시어머니는 착한 며느리가 보아스와 맺어지도록 온갖 노력을 합니다. 드디어 둘이 맺어져 결혼하게 됩니다. 그 사이에 손자가 태어납니다. 이름이 오벳입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평범한 이스라엘의 가정이야기입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룻의 아들 오벳이 바로 다윗왕의 할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이스라엘의 한 가정 이야기가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로 발전합니다.
룻기에 나오는 가정 문제는 우리가 가정에서 매일 겪는 문제들입니다. 결혼, 출산, 이사, 사별, 이별, 고부관계, 시어머니, 장수, 믿음, 중년남녀의 사랑, 재혼, 손자, 후손, 우리가 겪는 모든 인간사가 나오미의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정의 이야기가 한 가정 이야기로 끝나지않고 하나님이 역사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룻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낳은 오벳이 다윗을 낳고 다윗은 신약으로 이어져 예수님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이스라엘의 한 가정 이야기가 다윗과 예수님을 넘어 하나님의 역사섭리라는 큰 그림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룻기를 읽으면서 깨달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통해 겪는 일은 우리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현재안에 하나님의 미래가 있고 우리 가정의 기쁨과 슬픔속에 하나님의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망은 우리 가정과 무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 가정을 통해 그의 희망을 이루어가시는가? 우리 가정이 어떨 때 하나님은 희망을 이루시는가? 나오미의 가정에 그 세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나오미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읽은 책 제목은 “룻기”이지만 실제 이야기의 내용은 나오미 이야기입니다. 나오미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결혼해서 룻을 만났고 그 룻이 보아스를 통해 다윗의 오벳을 낳았습니다. 이야기의 처음도 나오미가 등장하고 이야기의 마지막도 나오미가 손자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오미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룻기는 룻기라고 부리지 말고 나오미서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쓰시는 이 가정의 비밀을 생각할 때 나오미를 가장먼저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나오미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쓰임받는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우선 나오미는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가난해서 이사갔습니다. 객지에서 남편죽고 두 아들 죽었습니다. 며느리 하나가 그를 떠났습니다. 간신히 둘째 며느리와 함께 고향에 돌아왔지만 기다리는 것은 가난과 차거운 이웃의 눈총이었습니다. 룻1:20을 보실까요?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르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슴이라”. 21절입니다. 룻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아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아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이름의 뜻이 중요합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이름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름과 달리 인생의 쓴 고초만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마르”라 불러달라는 것입니다. “마르”는 “쓰다, 괴롭다”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은 혹시 있을 수 있다고 합시다. 세상에 제일 마음 아픈 것이 배우자의 죽음입니다. 한 평생을 같이 살았습니다. 가끔 다투고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지만 살아온 연륜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배우자가 죽은 가정입니다. 정말 힘듭니다. 정말 못 견디게 슬픕니다. 거기다 나오미는 두 아들이 한꺼번에 죽습니다. 이 슬픔도 견딜 수 없습니다. 저희 조카가 무슨 일로 작년 겨울이 죽었습니다. 제 동생부부가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식음을 전폐하다 싶이 삽니다. 너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을 나오미는 한꺼번에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룻기 어디를 읽어봐도 나오미가 절망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 못 살겠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탄식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이 고통스러웠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불굴의 의지, 여기에서부터 나오미의 가정이 하나님께 쓰임빋는 기적이 시작됩니다.
더구나 나오미는 나이가 많습니다. 나이를 추정해본다면 아마도 70은 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가장 약해질 때가 언제입니까? 나이 먹고 늙을 때입니다. 요즘 잰있는 노래 하나가 나왔습니다. 제목이 쇼킹합니다. “너 늙어 봤냐? 나 젊어봤다”입니다. 나이가 먹으면 사람으로 쳐주지 않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있습니다. 세상은 모든 젊고 힘있는 사람만 좋아합니다. 지금 나이 먹어 놀고 있는 노인을 사회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인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노인 자신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한때 잘 나가던 내가 어느날 흰머리에 주름살 많은 노인이 되어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세 가지 심리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분리와 적막감과 자아상실입니다. 분리는 내가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의 출처는 생산성입니다. 노인이 되면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사회적 유익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요즘 고령화의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다루는 방향을 보면 노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데 비용은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회에 있고 나에게 있는 한 노인의 고립은 피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적막감입니다. 고립이 사회로부터 당하는 거절경험이라면 적막감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당하는 거절경험입니다. 그 전에 잘 나갈 때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나이먹고 힘이 없으니까 가까운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그래도 내 아내는, 내 남편은 늘 나와 함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남편이 내 곁을 떠납니다. 나 먼저 간 사람이 불쌍해서 슬프지만 혼자 남겨진 나 때문에 더 슬픕니다. 세 번째가 자아상실인데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자아상실은 내가 내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오는 거절감정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과 내가 늙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죽는다? 글쎄. 다른 사람 죽음은 당연해. 그런데 내가 죽어. 글쎄. 가봐야지”. 잘 안 받아들입니다. 또 하나 “내가 늙어? 조금 주름살이 생기겠지. 그렇다고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돼? 그런 일은 없지. 세월이 지나도 나는 변함이 없어”. 그러다가 어느날 흘끝 흰 머리칼을 봅니다. 감기가 걸렸는 데 몇 주 동안 콜록 거립니다. 그때 “어 내가 늙었나?“ 하고 느끼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인생 헛산 것 겉고 인생 끝난 것 같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늙어가는 것을 부인한다고 안 늙습니까? 세 가지 과정을 통해 늙어가는 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첫째 용납입니다. 자기 나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첫 걸음입니다. 한 사람이 65세에 교장 은퇴하고 등산을 갔답니다. 마침 산에 90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등산하다 말고 잠시 쉬고 있는 데 이 사람을 보자 물었답니다. “어, 저기 오는 젊은이, 나이가 얼마요?” 교장 선생님이 말했답니다. “65세입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말하더랍니다. “참 좋을 때다”. (옆에 있는 분에게). 그래서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옆) (지금 딱 좋은 나이입니다). 받아들인 다음 직면해야 합니다. 직면은 싫지만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내 나이가 얼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 남은 생을 계수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말합니다. 시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 남은 날을 알아야 그 기간에 내가 할 일을 압니다. 마지막이 사명입니다. 내 나이가 몇인지 알았으면 하나님이 남은 기간동안에 할 일을 주십니다. 재미있게도 성경은 “늙었다”는 단어가 없습니다. “쟈켄”이라는 히브리어가 “노인”을 부르는 말로 쓰이지만 이 말의 본래 뜻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익었다”는 뜻입니다. 노인은 나이 많이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 열매처럼 익고 향기나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노인을 보는 기준은 생산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오랜 시간 경험을 통해 많은 지혜의 열매를 맺게 해 준 것입니다. 노인의 시대는 그것을 쓰는 시대입니다. 쓸모없는 시대가 아닙니다. 절대 쓸모있는 시대입니다.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조언할 수 있습니다. 신32: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름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나이가 먹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아무나 나이먹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나이먹는다고 우울해 하시는 분들,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살아 있다면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으십시오. 시92:12,14절입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기 “늙어도”와 “결실하며”가 “쟈켄”, 깉은 단어입니다. 늙으면 결실합니다. 익습니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나이든 분들의 지혜를 흠모해야 합니다. 나이 먹었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아직 여러분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나오미를 보십니까?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고 나이를 먹어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 다윗왕의 증조모가 된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그 감추인 계획을 위하여 나오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연세많으신 성도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부모 여러분, 여러분이 여기까지 살아 있는 것도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요? 나이 먹어 힘은 없지만 하나님은 나를 통해 우리 가정에, 우리 자녀와 손자에게, 우리 교회에, 우리 이웃과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이 나오미 가정을 사용하신 첫 번째 비밀입니다.
둘째가 룻과 보아스의 사랑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오미 가정을 사용하셨나 물으면 두 번째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룻과 보아스의 사랑입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잘 돼서 아들도 낳고 하나님의 쓰임도 받았지만 사실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룻이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모압여자였습니다. 보아스는 정통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둘이 결혼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냐 하면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관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대위 하나가 영국인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조금 더 좋은 교육을 시키고자 유대인 최고의 사립초등학교 입학시키려고 하는 데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이유는 아이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위가 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나는 대대로 유대인이었고 이스라엘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데 어찌 내 아들이 유대인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그 아들이 유대인 아니라고 판결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영국인이고 그나마 크리스쳔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가 유대인이 생각하는 결혼개념입니다. 그런데 룻은 모압여자였습니다. 성경에 암몬과 모압은 자기 아버지와 관계해서 나은 부정한 롯의 두 딸의 후손들입니다. 성경은 이들과는 상종도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룻은 재혼입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룻이 재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초혼입니다. 보아스가 망설일 수도 있었던 대목입니다. 세 번째로 사회적 레벨이 맞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지역 유지이고 부자인데다가 한 가문의 대를 잇는 장손입니다. 룻은 가난한 데다 뿌리도 없이 외국에서 온 나그네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만일 어떤 가정에서 “목사님, 우리는 서로 안맞아서 그만 두겠어요” 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룻기를 읽으십시오. 그리고 룻과 보아스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사람들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요 지속될 수 없는 부부입니다. 그런데도 이들 부부는 모든 조건들을 뛰어 넘어 사랑의 결실을 맺었고 그 뿌리에서 다윗왕이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다윗왕도 없고 예수님도 없을 뻔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사랑과 믿음입니다. 둘 사이의 순수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하셨다“는 믿음, 그 믿음과 사랑이 이 둘을 끝까지 가게 했습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중 구약의 야곱을 좋아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실수가 많아 저하고 비슷하고 또 하나는 아내가 많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아내가 넷이나 있었습니다.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과 함께 두 여종입니다. 왜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렇게 많은 아내를 주셨을까? 하나님이 그 가정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아내들은 오늘 우리 남편이요 아내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자매였지만 야곱과의 관계는 서로 달랐습니다. 레아는 사랑하지 않지만 의무감으로 산 아내였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될 아내였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두 아내일 뿐 아니라 우리 남편과 아내의 다른 모습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 가정에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사랑과 믿음, 믿음과 사랑, 라헬과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라면 레아와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입니다. 부부간에는 세 가지 사랑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좋아해서 사랑하는 사랑과 싫어도 사랑하는 사랑과 사랑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좋아서 사랑하는 사랑이 라헬과의 사랑이라면 싫어도 사랑했던 사랑이 레아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할수록 더 사랑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을 평가하는 기준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살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 둬라”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입니다. 이 경우의 사랑이 뭔가 하면 라헬식의 사랑입니다. 창29:20을 보실까요?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몇일 같이 여겼더라”. 여러분도 이 사랑을 경험한 적 있습니까? 누구나 해보고 싶은 가슴 떨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이렇게 감정적으로만 표현하면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은 다 가정을 깨야 합니까? 그때 성경이 추천하는 또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레아식 사랑입니다. 야곱은 레아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만 두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게 싫어했는 데도 첫날밤에 만난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나님은 굳이 싫어하는 레아를 첫 번째 아내로 주신 것일까? 야곱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라고 묻지 않고 “하나님이 왜?”라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뜻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일단 헤어지지 말고 살아보자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부부가 서로 바라본 다면 어떻게 될까요? 칼 로저스(Carl Rogers)라는 크리스쳔 심리학자가 말했습니다. “만일 부부가 서로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이렇게 바뀔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고칠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자라게 할 것이냐?”. 야곱이 그렇게 생각하고 살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레아와의 사이에 7남매가 태어났습니다. 그중에는 다윗을 낳은 유다 지파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레위지파가 있었습니다. 유다가 없었다면 다윗도 태어나지 못할 뻔 했고 레위가 없었다면 성전제사도 없을 뻔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가 다 레아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도 결국 레아의 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랑의 반전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한 라헬은 일찍 죽고 싫지만 끝까지 산 레아는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 헤브론에 가면 야곱의 무덤옆에 나란히 묻혀 있습니다. 사랑보다 믿음이 오래 간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빌리 그래함 부인이 미국 T.V 토크쇼에 나왔습니다.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두 분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잉꼬부부라고 합니다. 서로 잘 맞았나 요? 둘은 한번도 미워한 적은 없었나요?” 빌리 그래함 부인이 말했습니다. “저는 남편을 미워한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한 가지는 늘 있었어요. 죽이고 싶을 때는 있었어요”.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때로 죽이고 싶은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이란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필요한 것처럼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식더라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오미 가정을 사용하신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었습니다.
셋째 자녀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오미 가정을 사용하셨는가 물으면 마지막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비전때문이었습니다. 룻기의 결론을 보여주는 오늘의 말씀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룻4:13절 이하입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여호아께서 그에게 임신케 하셨으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그리고 17절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룻4:17,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저는 룻기에서 이 마지막 부분이 가장 좋습니다. 이 부분으로 오면 그동안 나오미가 겪었던 수많은 인간적, 정신적 고통이 말끔히 씻기고, 그많은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충분한 보상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분이 좋은 이유는 나오미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이 후손으로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함으로 나오미는 아마도 물질 걱정하지 않는 부잣집 시어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총을 받는 신세에서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를 보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저 나오미 좀 봐. 대단하지 않아? 인생 역전이야. 대박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보상은 나오미 개인에 대한 것으로 그의 당대에만 필요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손자 오벳을 주시고 그를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되게 했다는 것은 그의 당대를 뛰어 넘어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 관한 것이고 그 사건이 생긴지 3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우리가 받은 축복중 가장 큰 축복은 우리 이후의 역사를 책임질 후손들에게 주실 축복임을 믿습니까?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영국 속담처럼 내 촛불에 불이 꺼지기 전에 다른 초에 불을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자녀요 우리 후손입니다.
그러면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벳”이라는 이름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오벳”을 동사로 쓰면 “아바드”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일한다”는 말과 “예배한다”라는 말입니다. 일한다는 말에서 나온 명사 “오벳”에서, “종”이 나오고“예배자”가 함께 니다. 일하는 사람에게서 섬기는 자, 종, 청지기라는 말이 나오고, 섬긴다는 말에서 경배자, 예배자가 나옵니다. 나오미는 그냥 손자를 낳은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바꿀 두 가지 요소를 후손에게 남겨준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섬기는 종,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 저는 인류 역사를 빛냈던 인물들의 특징을 이처럼 한 단어로 드러낸 적이 없다고 봅니다. 세상을 섬기는 종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 “오벳”. 섬기는 종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 세상을 종처럼 섬긴 좋은 지도자들은 많았습니다. 성전에서 주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는 많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섬기는 종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돌아가신 강영우박사 쓴 『오늘의 도전은 내일의 영광』이라는 책에 보면 자기 두 아들을 어떻게 카웠는가가 옵니다. 하나는 자기 아버지같이 실명한 사람들을 고치겠다고 저명한 안과의사가 되고 또 하나는 자기 아버지같은 소수민족의 인권을 위해 일하겠다고 변호사가 되어 아버지를 이어 백악관에서 일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가 자녀교육의 내용을 3C로 이야기했습니다. competence(실력), character(인격), 그리고 commitment(헌신), competence(실력)은 세상을 잘 섬기기 위해 필요하고, commitment(헌신)은 하나님을 잘 예배하기 위해 필요하고 character(인격)은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가 남긴 자녀들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는 갔지만 그의 두 아들들, 며느리들, 손자들이 오늘도 “하나님의 오벳”으로, 한편으로는 세상을 섬기는 종이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로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 축복이나 명성은 그가 살아 있을 때 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빈 자리를 채우며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의 후손들입니다. 이 자녀의 비전을 갖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축복, 나 한 사람 먹고 살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이 나를 대신하여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물이 되는 비전, 그 비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이스라엘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라면 “희망”입니다. 이스라엘 국가 제목도 “티크바”, “희망”입니다. 그들의 가장 큰 희망은 앞으로 이 나라에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그들은 행복한 가정에서 찾고 특히 자녀들에게 찾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아이들을 존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아이가 혹시 메시아가 아닐까 해서 아이들을 존존한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부터 한 주 부모와 자녀와 함께 하는 새벽기도회입니다. 자녀에게 희망을 가지만 부모 여러분, 나와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통해 희망을 만들어 내십니다. 가정의 어른인 가장,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나오미처럼 믿음으로 여러분의 남은 생을 사시겠습니까? 남편과 아내로 가정을 이룬 부부 여러분, 사랑과 함께 믿음으로 가정을 이끌겠습니까? 자녀를 선물로 받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와 손자, 후손들이 오벳이 되어 세상을 섬기는 종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가 되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룻4:13-17 2015.2.22.(일)
행복한 가정에 희망이 따릅니다
“엄마의 밥”(영상).
첫 번째, 나오미의 믿음입니다.
룻1: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르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슴이라”.
룻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아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아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나오미=기쁨, 즐거움.
마르= 쓰다, 괴롭다
나이먹을 때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
① 분리: 세상에서 나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
② 적막감: 가까운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경험
③ 자아상실: 내가 늙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기는 상심
나이먹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① 용납
② 직면
시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
③ 사명
노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쟈켄”은 늙었다는 뜻이 아니라 익었다는 뜻이다.
신32:7, “옛날을 기억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름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시92:12,14,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둘째, 룻과 보아스의 사랑입니다.
라헬은 좋아서 사는 사랑의 가정이고 레아는 좋아하지 않지만 믿음으로 참고 사는 가정이다. 하나님은 레아에게 더 많은 축복을 주셨다.
창29:20“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몇일 같이 여겼더라”.
칼 로저스,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고칠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자라게 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셋째, 자녀의 비전입니다.
룻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여호아께서 그에게 임신케 하셨으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룻4:17,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아바드”=“일한다, 예배한다”
“오벳”은 세상을 섬기는 종이면서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다.
강영우박사,
competence(실력)+character(인격)+commitment(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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