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18-31 2015.3.15(일)
십자가로 가까이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 고난주간에 바짝 다가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셨고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번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다른 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저는 어릴 때 습관적으로 교회 다닐 때를 제외하고 조금 철이 든 다음부터 항상 이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믿는 신앙의 핵심이 무엇일까? 믿는다, 믿는다 하는 데 나는 무엇을 믿는 사람이고 무엇을 믿어 하는가?”
그러다가 이스라엘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로 간 것은 처음에는 미국으로 못 가서 어쩔 수 없이 간 것이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있었슴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저는 처음부터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배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도대체 기독교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구약으로부터 이어져 유대교의 뿌리에서 생겨난 기독교는 어떤 본질적인 특징을 가진 것인가? 그렇게 뿌리를 찾다 보니 점점 유대교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문헌을 읽게 되고 유대인의 역사, 생각, 정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거의 유대교신자처럼 되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아,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연구가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가 마침 사순절이어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묻힌 “성묘교회”나 둘러 보고 가자 하고 성묘교회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성묘교회에서 제 인생에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적이 감도는 교회에서 한참 무덤쪽을 바라보고 있는 데 짧은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저에게 다가오더니 저를 어디론가 데리고 갑니다. 저도 모르게 따라 갔는 데 그가 강단위로 올라가 큰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보았는 데 웬일입니까? 그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분의 옷은 찟기어 있었고 몸은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사라졌습니다. 그때 제가 퍼뜩 깨어나면서 제 머리에 전광석화같이 한 말씀이 스쳐갔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저는 성경에 이 말씀이 있는지는 알았지만 정확한 장절은 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곧바로 집으로 달려왔고 그리고 성경을 뒤적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고전1:22-24절에서 찾았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이 사건으로 저는 성경의 핵심을 재발견했습니다. 몰랐던 것은 아닌데 확신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 특히 유대교 문헌에 없는 유일한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유대교 역사에는 훌륭한 랍비도 있고 기적과 능력도 있고 부활신앙도 자주 나타나지만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유대인 지도자중 누구도 남을 위해 십자가 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목회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제가 평생 씨름해야 할 과제임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우리가 믿고 붙잡아야 할 신앙의 핵심인지? 거기에 집중해야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십자가와 관련하여 고민이 많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십자가 신앙이 성경적 십자가 신앙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는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에 두지 않거나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십자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만 성경과 많이 다른 십자가 신앙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느냐?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십자가 신앙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십자가 신앙의 세 가지 핵심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약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요 다른 하나는 헬라인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세계를 말하는 이스라엘식 표현방식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사고에 의하면 세계는 선택받은 유대인과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방인을 대표하는 사람이 헬라인입니다. 그러니까 세계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있고 헬라인이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고전1:23,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유대인들은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리낀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거리낀다”는 말은 “넘어지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길거리에 있어서 발뿌리에 채여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돌맹이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거리끼는 돌, 거침돌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십자가를 싫어하는지 한번은 제 딸이 히브리 유치원을 다니다가 산수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았더니 플러스 표기를 잘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하기 표시를 +로 하지 않고 우리 말 오자의 밭침만 따서 ㅗ로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하기 표시를 그렇게 하면 안돼” 했더니 딸이 말합니다. “아빠, 선생님도 그렇게 쓰고 친구들도 그렇게 써” 합니다. 제가 깜짝 놀라서 다음 날 히브리 대학에 다니는 학생에게 “플러스 표시를 어떻게 하느냐?” 물었더니 그 학생도 ㅗ로 표시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대학생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플러스 표기를 하다가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도 싫다”. 이 정도가 유대인이 생각하는 십자가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하는 공통적으로 하는 플러스 포시를 이스라엘만 다르게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 보신 분은 아십니다. 도로마다 교차로가 있습니다. 보통은 그 교차로에 신호가 있고 신호에 따라 차들이 다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사거리는 신호도 없고 모두 원형입니다. 십자가 형태가 아니고 원형입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십자가 모양도 싫어서 그런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메시아관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까?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이 짧은 한 마디가 유대인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해줍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좋아합니다. 표적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원형은 다윗입니다. 다윗처럼 골리앗도 이기고 천하 대적을 이긴 후 시온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입니다. 다윗같이 초월적인 지혜와 불가사의한 용기를 가진 전쟁용사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반드시 죽어서도 안되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메시아로 믿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33년 살다가 어느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토록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믿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죄수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를 저주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신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다윗 같은 전쟁용사는 그만 두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유대인 같으면 그렇게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 이해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힘”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을 추구하며 삽니다. 경쟁사회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돈도 힘이고 권력도 힘이고 심지어 스펙도 힘입니다. 그렇게 힘을 추구하다가 교회오면 사람들은 더 힘이 들어갑니다. 옛날 교회에서 그런 교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직책도 높았습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고마워서 심방가서 물었더니 아주 어릴 때 교회 나갔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떠나 세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성공은 바닷물같이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납니다. 그래서 어릴 때 다닌 교회가 생각나 다시 교회 나왔습니다. 교회나와서 온갖 봉사를 다 했습니다. 궂은 일은 도맡아서 하고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안 보입니다. 처음에는 아파서 그러나 바쁜 일이 있나 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님이 하는 말이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면서 담임목사님이 만나 보라고 합니다. 제가 어렵게 만났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때 그 분이 대답합니다.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재미가 없어서 그렇지요”. 그는 끝내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생각했습니다. 왜 그는 스스로 왔다가 스스로 떠났을까?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도 성공했지만 교회에서도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힘은 다 가졌지만 교회의 힘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면 교회의 힘이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고 금방 사람들앞에 세워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종류는 달랐지만 힘을 추구하고 살아온 그의 일생은 교회 밖이나 안이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처럼 그는 이미 다 가졌지만 교회에서 또 하나의 힘을 갖기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지치고 잘 안되니까 그만 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예수믿는 목적을 자기 성공에 둘 때 이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회직분을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을 때 이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약한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옛날 십자가는 노예나 종이 졌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약함의 신앙입니다. 강한 자가 되려고 십자가 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가 되려고 십자가 집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으로만 가는 신앙은 마틴 루터는 “영광의 신앙”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을 요즘 용어로 “승리주의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약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강해질 수 없고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은 진정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가 나약해서 싫다고 떠났지만 정말 이 시대 교회의 문제는 약해지지 않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너무 강해져서 세상을 정복할 것처럼 소리치지만 세상은 교회가 강해지라고 소리치지 않고 약해지라고 소리칩니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하다면 자기를 죽이는 힘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힘은 남을 무릎꿇게 하는 힘이 아니라 내가 무릎을 꿇는 힘입니다. 교회는 더 부드러워져야 하고 신자는 더 약해져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아버지 교회에서 어머니 교회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잃었던 자식들이 돌아옵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헬라인입니다.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다시 22절 보면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했습니다. 헬라인은 곧 그리스인입니다. 헬라인들은 당시 가장 지혜로운 백성에 속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이 그리스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란 “필로소피아” 곧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철학은 곧 “애지(爱知)”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리스토텔레스등이 그리스 철학의 황금시대를 열였습니다. 철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합리성입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자주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합니다. 어떻습니까? 그 합리적인 눈으로 보면 십자가 달린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겠습니까? 어떻게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시 십자가형은 노예나 종들에게만 허용된 처형방식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만 있어도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십자가형에는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요? 노예만 아니면 십자가형을 면제받을 수 있었는 데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분이 죄도 없이 십자가에 죽습니까? 그것이 합리적인 이야기입니까? 미련한 짓 아닙니까? 23절에 “미련한 것이로되”했습니다. “미련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모리아”입니다. 이 말은 “웃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신나간 것”이란 뜻입니다. 아니 제 정신이면 괜히 십자가에 죽습니까? 그나마 죄도 없다면서 왜 죽어요? 이해가 가는 이야기입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그렇게 어리석게 죽지 않았습니다. 제우스를 중심한 12주신들은 인간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도 갔습니다. 싸우기도 하고 심지어 중상, 모략, 거짓말도 했습니다. 서로 치고 박고 싸워 끝까지 이기는 자가 최후 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어떤 신을 소개합니까? 빌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스스로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죽은 신을 소개합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옛날 헬라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제우스같은 강한 신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령하고 통치하고 다스리고 지배하는 신, 그런 신을 찾고 있습니다. 정부나 기업이나 학교가 요즘 공통되게 외치는 말이 “경쟁력”입니다. 경쟁력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 하든 남을 제치고 끝까지 살아남는 세상적 처세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것입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바보같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살면 이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고 최후 승자가 되겠습니까?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일생 바보같이 살던 일생이었습니다. 어느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제자 하나가 장박사에게 세배를 올렸습니다. 장 박사는 웃으며 이렇게 덕담을 했습니다. “금년엔 나를 좀 닮아서 살아봐”. 제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처럼 살게요”. 그러자 장기려 박사가 말했습니다. “그래. 바보처럼 산다는 소리를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처럼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바보처럼 사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기 위해 처세술을 배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처럼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애플사의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굶주리며 살고 바보처럼 살아라“. 그는 그 말대로 살다가 갔습니다. 잘 먹기 위해서는 좀 더 굶주려야 합니다. 더 잘 살려면 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말 ”바보“는 ”밥보“에서 왔디고 합니다. 이 말은 밥만 축내는 ”밥통“이란 뜻입니다. ”식충이“와 같은 망입니다. 똑똑한 사람과는 반대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영약한지 도무지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툭하면 교회문제를 가지고 법정으로 갑니다. 사건만 나면 목사고 성도고 없습니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 죄입니다”하고 국민일보에 신문내는 사람도 없습니다. 뻔히 잘못 해놓고도 변명을 일삼습니다. 희생하는 교인들 보기 힘듭니다. 희생도 내가 할만한 수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야 희생입니다. 교회 중진이 수요일, 금요일에 나와 기도하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하루 결근하고 여수에 교인 어머니 돌아가신 집에 문상가는 것이 희생입니다. 부자가 매달 10만원씩 감사헌금하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일용근로자가 매주 10만원씩 헌금하는 것이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머니가 위대한 것은 희생때문입니다.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선생은 직업 선택의 10계명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첫째 월급이 적은 쪽으로 가라. 둘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셋째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으로 가라. 직장생활도 그리스도인은 어리석게 해야 합니다. 아무도 안 가는 데로 가고 아무도 안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한양행의 유일한 사장은 그런 의미에서 바보였습니다. 그 큰 기업의 회장이 19년 동안이나 쉐퍼 만년필 하나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만년필뿐 아니라 무슨 물건이든지 사면 좀처럼 새것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식사할 때는 반찬을 다섯가지 이상 차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가 76년을 일기로 죽음을 맞을 때, 유품으로는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 몇 가지와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회사의 용품 하나 쓰는 일에도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일하지 않는 주말에는 회사차를 개인용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서를 비롯한 간부진도 일절 부르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연필 한 자루도 개인용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프면 사우공제회에 가서 직접 약을 사서 먹었습니다. 죽은 뒤에 공개된 유언장에는 손녀에게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학비 1만 달러 주고 딸에게 유한중고등학교 안에 있는 땅 5000평을 주어 유한 동산으로 꾸미는 것 외에 모두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아들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라고 유언했습니다. 정말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업정신을 이야기할 때마다 유일한을 말합니다. 그 기업정신이 곧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도 하나님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리석게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죽는 것입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나마도 가장 잔인하게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형은 인도, 수그디아인같은 야만인들에게서 처음 시작되어 주전 2-3세기, 로마에 의해 가장 잔인한 사형 수단으로 정착했습니다. 이 형벌이 무서운 것은 사람을 육체적으로만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게 죽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금방 죽지 않고 수 시간동안 고통하다 죽기 때문에 최대한 오랫동안 형벌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6시간이나 고통을 당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엄청난 모욕과 온 몸의 옷을 벗겨 수치를 당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으로까지 고통을 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반드시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 법적으로 죽었습니다. 십자가가 시인과 화가에 의해 자주 미화되었지만 십자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사형 도구입니다. 십자가의 가장 큰 기능은 죽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기 보다 빨리 부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집을 팔고 차도 팔고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걸 팔아서 교회에 헌금한다면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아니요”. 선생님이 또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동물을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생각보다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판단을 하고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지요?” 그때 저 뒤에서 맹구가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먼저 죽어야돼요”. 맹구는 성경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죽어야 천국간다“. 우선 죽어야 부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는 것이 어디 쉽습니까? 어느 암 병동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열흘을 넘길 가망이 없군요. 마지막으로 만나보고 싶으신 사람은 없나요?” 눈을 지그시 감았던 환자가 눈을 뜨고 말한다. “왜 없겠습니까?” “그렇군요, 물론 가족들” “아닙니다.” “예? 그럼 누구?” 환자가 말했습니다. “다른 의사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영적인 죽음도 우리가 무서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지 않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약 100년전에 살았던 토저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그의 책 <철저한 십자가>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한 방향밖에 바라볼 수 없다. 옆을 보거나 뒤를 돌아 볼 수 없고 오직 앞만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과거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아침에 길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여보, 5시에 다시 돌아오겠소”라고 한 말의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못박혔기 때문에 꼼짝 없이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새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자기 계획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계획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일은 죽는 일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침체와 일탈은 십자가에 죽으라는 복음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너무 쉽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두 가지를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아멘. 둘째 “나는 이제 육체가운데서 매일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살겠다”. 하나는 죽었다. 또 하나는 “죽여라”. 목회자는 교회성장을 자기 성공의 척도로 삼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사는 나의 성공과 행복의 수단으로 삼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 비안네의 다음 기도를 좋아합니다. “거룩하신 주여! 저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저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살게 하시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감사하고 또한 나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살게 하시니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어야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순절, 십자가에 가까이 갑시다. 눈에 보이는 저 나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가까이 갑시다. 십자가에 약한 자로 달린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약해야 강해집니다. 십자가에 어리석은 자로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어리석어야 지혜로워 집니다. 십자가에 죄없이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 갑ㄱ시다. 죽어야 삽니다. 22절부터 다시 읽어보시겠습니까? 고전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리석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이렇게 글을 써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주여,
저로 하여금
십자가 나무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분에게로 가까이 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약해져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어리석어져 주님의 은혜로 지혜로워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님과 함께 매일 다시 살게 하소서
십자가로 가까이
십자가로 가까이
내 생의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주님의 십자가에 더 가까이 가게 하소서.
고전1:18-31 2015.3.15(일)
십자가로 가까이
고전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십자가는 약한 것입니다
고전1:23,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유대인의 플러스= +가 아니라 ㅗ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신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약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강해질 수 없고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은 승리할 수 없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고전1:22,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빌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스티브 잡스, “Stay hungry, stay foolish.”
십자가는 죽는 것입니다
토저,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할 수 없는 세 가지”(철저한 십자가)
(1)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없다.
(2)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과거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없다.
(3)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자기 계획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요한 비안네
“거룩하신 주여! 저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저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살게 하시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전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십자가로 가까이
주여,
십자가 나무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분에게로 가까이 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약해져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어리석어져 주님의 은혜로 지혜로워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님과 함께 다시 살게 하소서
십자가로 가까이
십자가로 가까이
내 생의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주님의 십자가에 더 가까이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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