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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요20:11-18) 부활, 금요일에서 주일로 2015.4.5(일)

부활절(20:11-18) 2015.4.5()

부활, 금요일에서 주일로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여기 죽었다 깨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한 학생이 교수님께 물었습니다. “교수님, 사람이 죽으면 왜 다시 돌아오지 않죠?” 교수님이 말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네. 천국에 간 사람은 천국이 좋아서 돌아올 필요가 없고 지옥에 간 사람은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온다네”.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러나 저러나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수님만 다시 사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입니다. 거기에 옛날 무덤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굴을 파고 돌로 무덤을 만들기 때문에 무덤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기드론 골짜기에 예수님 이전에 세운 무덤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사진). 이 중의 하나가 압살롬의 무덤입니다. 산헤드린의 무덤이라고 주전 4세기, 5세기, 무덤도 그대로 있습니다(사진).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성묘교회에 가면 예수님이 묻힌 곳을 기념한 작은 건물이 있을 뿐입니다(사진).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 무덤 옆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사진). 아마 예수님의 무덤도 이와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제 무덤이 남아 있어도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묻히고 부활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묻힌 많은 무덤들이 많습니다. 감람산에 묻힌 무덤들이 그들중의 하나입니다(사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의 현장을 보려고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미국의 한 노부부도 결혼 40주년을 기념하여 성지순례를 떠났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음날, 아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을 당한 할아버지는 허둥대다가 현지 장의사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장의사가 말했습니다. “미국으로 시신을 옮기려면 2만 달러 이상이 듭니다. 그러나 이곳에 묻히면 5백 달러밖에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지에 묻히니 얼마나 좋습니까?” 할아버지가 한참 생각하더니 물었습니다. “다 좋은 데 여기에 옛날에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혹시 여기 묻으면 사흘만에 부활하는 것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결국 2만 달러를 내고 미국으로 아내를 데리고 갔습니다. 이런 남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도 대단하지만 그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도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여자였고 그나마도 문제가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 성경은 이 여자가 일곱 귀신 들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귀신들려 머리를 산발하고 다니는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어릴 때는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주로 인생의 큰 충격을 받았거나 불행하게 살던 사람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귀신 들렸다면 그에게 그럴만한 아픔과 상처가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가 남자를 상대하는 창녀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왜 창녀가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매우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여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12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7귀신들리고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 그가 인류 최초로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그 많은 사람중에 하필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으로 부활을 목격했을까? 12제자가 아니고 사도 바울이 아닐까?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을 목격했다면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말씀을 따라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부활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는 상처를 안고 있었습니다.

11절 볼까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안을 드려다 보니”. 예수님의 무덤앞에 앉은 막달라 마리아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아직 어둑 어둑한데 그렇게 일찍 무덤에 나와 마리아는 왜 울고 있었을까요? 우선은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입니다. 24:1-3입니다.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그런데 무덤에 가까이 오자 무덤에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에 시신을 넣고 고랄이라는 둥근 돌로 막아 놓습니다(사진). 짐승이나 사람이 시신을 가져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돌은 굴려져 있고 속을 구푸려 보니까 거기 있어야 할 시신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너무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도 마음이 아픈 데 시신까지 없으니 이것은 큰 일 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마태복음으로 갑니다. 마리아는 이 비상상황을 알리기 위해 제자들이 모든 곳에서 달려갑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와서 보니까 과연 거기 있어야 할 예수님 시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요한복음으로 오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울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했던 예수님은 안 계시고 자신은 또 다시 상처받은 자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 있을 때는 많은 위로와 평안을 얻었었는 데 이제 예수님도 없고 자신은 여전히 상처받은 자로 거기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상처받은 자로 거기 있지 않습니까? 사실 모든 사람들이 상처속에 삽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대로, 기업가는 기업가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상처 때문에 웁니다. 8:22절을 아십니까?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탄식은 곧 비명소리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면서 지르는 외마디 소리입니다. 다시 11절을 보시겠습니까?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안을 들여다 보니”.

 

이제 마리아의 눈물이 보입니까? 마리아의 눈물은 2천년전에 살았던 한 불행한 여인의 눈물만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없으면 이렇게 울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난 성 금요일, 이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부활의 아침, 예수님 무덤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 이 말씀을 묵상하는 데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 마리아는 우리 자신이다. 예수님 없으면 우리는 다 울고 살아야 한다. 인간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니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닌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지셨는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다”.

 

왜 이것이 중요한지 아십니까? 부활은 반드시 죽어야 온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은 사람이 살아난 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입니다. 오래 전 서울의 모 교회에서 한 여자 성도가 간증했습니다. “나는 죽은 후 냉동고에 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신문들이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자가 집요하게 추적해 본 결과 그것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불노장생은 부활이 아닙니다.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부활도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돈많은 귀족 네플류도프가 자기 때문에 창녀가 된 카츄샤로 인해 결국 갱생한다는 내용입니다. 제목은 부활이지만 이것도 부활은 아닙니다. 정신적 재생을 다룬 책입니다. 귀족도 카츄사도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봄철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도, 진달래도 부활이 아닙니다. 죽었다 산 것이 아니라 땅속에 숨어 있다가 다시 돋아 났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부활이요 죽었다 다시 살아야 부활입니다. 몇 년 전에 미국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하바드 대학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습니다그래서 기자가 왜 하필 하바드 대학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가 대답했답니다. “내가 죽기 전에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하바드도 죽어야 들어가고 천국도 부활도 죽어야 얻습니다. 그러나 육신적 죽음만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안에 자신의 정과 욕심을 죽이면 언제나 부활입니다. 자신의 정과 욕심을 결과적으로 죽이는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나쁜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죽어 부활로 나아갑니다.

 

프랑스 여성 잔느 귀용이 그 사람입니다(사진). 잔느 귀용은 1648년 프랑스 파리 몽타르지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7개월 조산아로 태어난 그는 평생 연약한 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불행은 16세의 나이에 22살이나 연상인 귀족 자크 귀용과 결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결혼 첫날부터 귀용은 남편 병 수발과 괴퍅한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뎌내야만 했고 곧 무서운 전염병으로 두 아들과 딸을 잃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죽자 재산까지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귀용의 가장 큰 고난은 그를 이단으로 몬 사람들 때문에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 것입니다. 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귀용은 다시 붙잡혀 프랑스 작은 시골로 아들과 함께 유배를 떠납니다. 1717, 69세의 나이로 죽은 귀용은 오랜 고난의 생활을 통해 예수님안에 정과 욕심을 못박는 삶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고난중에 자기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야 말로 부활로 가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활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완전히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잊어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현재의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고난이 있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마음대로 안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부활의 은혜를 입을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몸과 마음이 아픕니까? 잔느 귀용처럼 인생이 힘듭니까? 고난은 곧 부활 연습입니다. 고난을 재난으로 받아들이지 말로 자기 죽음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나 부활이 앞에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묶여 있었습니다.

한참 울고 있던 마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무덤을 바라보았더니 예수님이 있었던 자리에 수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가가 자세히 보았습니다. 6-7절입니다. 20:6-7,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쌋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여기에 예수님을 쌓았던 수의가 어떤 형태로 놓여 있었는가가 나옵니다. 크게 둘입니다. 수의는 놓여 있었고”, 수건은 개켜 있었습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합니까? 먼저 수건부터 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날씨가 덥기 때문에 수건을 늘 머리에 감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중동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개켜 있었다는 말은 돌돌 말아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 돌돌 말아져 있습니까? 본래 수건은 머리에 돌돌 말아 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썻던 모양대로 수건이 돌돌 말린 채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옷은 어떻습니까? 옷은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놓여 있었다는 말은 사람이 입은 옷에서 몸만 쏙 빠져 나오고 옷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나비나 매미가 빠져나간 껍질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릴 때 매미껍질을 본 적이 있는 데 몸이 빠져나가고 움푹 꺼진 껍질만 남아 있었습니다. 나비나 매미가 부화하고 껍질만 남기고 쏙 빠져 나온 상태, 그것이 놓여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 놓인 것은 옷뿐이 아니라 죽은 자를 동여맨 밧줄과 노끈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합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함께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부활하지 않고 반대자들의 말대로 기절했다가 깨어 났거나 아니면 예수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면 그 옷이 그대로 있을리 없습니다. 수건이나 옷의 모양이 달라졌거나 없어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건과 옷이 사람이 처음 입었던 대로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의 사실성이 아니라 부활의 의미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풀리는 것입니다. 묶인 상태로부터 풀린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매장법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두 번 매장했습니다. 이것을 1차 매장, 2차 매장이라고 합니다. 1차 매장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에 수의를 입히고 밧줄로 꽁꽁 묶어 동굴에 방치합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자들은 죄가 있기 때문에 밧줄로 꽁꽁 묶고 함부로 대할수록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에 히스기야왕이 아버지 아하즈왕이 죽었을 때 시신을 끈으로 묶어 거리에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생각에 그런 불효가 없지만 믿음좋은 히스기야는 그렇게라도 해야 악한 왕이었던 아버지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1년쯤 지나 무덤에 가면 더운 날씨 때문에 시신이 다 해체됩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유골만 건져 항아리에 넣고 코킴이라고 부르는 무덤에 제대로 장사합니다. 이것이 2차 매장입니다.

 

, 예수님의 사건을 이런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은 2차 매장이 필요없습니다. 1년동안의 긴 속죄기간도 필요없습니다. 그를 묶었던 모든 부자유로부터 자유했습니다. 수건과 수의는 그를 마지막으로 묶은 세상적 속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이제 자유를 얻었습니다. 나사로의 사건을 아십니까? 나사로의 시신이 동굴에 있었습니다. 1차 매장을 막 끝낸 것입니다. 적어도 나사로는 1년간 동굴에서 속죄의 긴 시련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다가갔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세 번 외쳤습니다. 11:39, “돌을 옮겨놓으라”. 또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11:43, “나사로야, 나오라”. 세 번째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11:44,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부활의 주님이 묶여 있던 나사로를 푸셨습니다.

 

부활은 푸는 것입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이렇게 살리신 예수님은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누가 예수여, 무덤에서 나오라소리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살아 났습니다. 죽음의 노끈과 속박으로 묶인 사슬을 스스로 풀었습니다. 일생동안 그의 머리를 묶었던 수건, 그의 몸을 어거했던 인간적인 굴레, 그리고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모든 종류의 노끈, 밧줄, 속박이 그로부터 벗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그렇게 부활한 것을 믿습니까? 부활은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가난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중독에서 풀리는 것입니다. 고치지 못한 나쁜 습관으로부터 풀리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죄로부터 풀리는 것입니다. 자기학대와 우울증으로부터 풀리는 것입니다. 생의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풀리는 것입니다. 안되는 일로부터 풀리는 것입니다. 오늘 막달라 마리아처럼 병에 묶이고 가난에 묶이고 우상숭배에 묶이고 염려에 묶은 우리에게 주님이 명하시기 바랍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나사로야, 나오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 16절을 보면 마리아야하고 불렀다고 말합니다. 제가 몇 분에게 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그랬더니 첫째 분은 마리아야, 너 나를 알아보겠니?” 했을 것이랍니다. 두 번째 분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했을 거랍니다. 세 번째 분은 아마 까꿍했을 것이랍니다. 마태복음 28:9절에는 평안하냐?”하고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히브리어로 샬롬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나타났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사모하는 사람을 오랜 만에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꿈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보았다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양 쪽에 천사와 함께 나타난 친정어머니가 환한 얼굴로 딸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을 때 이 집사님은 엄마”, “엄마하며 어머니쪽으로 가다갔답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가갔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어머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도 아마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바짝 다가가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하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마리아 입장에서는 사모하는 예수님과 함께 거기 있고 싶었는 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네 형제들에게 말해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간다고“. 예수님의 말씀은 한편 서운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있기를 원하는 마리아를 반강제로 떼어내서 이제 그만 울고 일어나 내가 보내는 곳으로 가하고 말씀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모든 고난이 끝났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하고 나타나서 보라. 나는 지금 부활했다. 나를 보아라. 이제 너희에게 더 이상 고난이 없다. 아픔도 없다. 마귀의 공격은 이제 끝났다. 더 이상 시험도 없다. 나만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다이렇게 말씀했다면 우리가 크게 아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신비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영적으로만 해석하여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을 주님은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대신 예수님이 하신 중요한 말씀은 형제입니다. 17,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부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친구혹은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형제, 내 형제라고 부릅니다. 제자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표현할 때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제자의 관계에서 형제의 관계로 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예수님만의 아버지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요 세상 사람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17절의 이 말씀은 비록 짧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하셨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달라진 것은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 우리가 할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비한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중요한 만큼 부활의 삶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달라진 것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함으로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부활함으로 세상의 죄가 없어졌다거나 악이 소멸되었다거나 고난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래서 그 길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웅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어떤 설교자가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는 드디어 백설공주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 ‘백방으로’, , ‘설치고 다니면서’, , ‘공포의’. , ‘주둥이를 놀리는 사람’. 그 전의 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한과 자기 연민에 빠져 툭하면 쓰러지던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며 하늘의 공주가 되어 거룩한 입을 놀려대는 사람,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는 그 후에도 그의 고난에 찬 인생고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프던 몸도 아직 다 안 나았을 수도 있고 가난도 거의 그대로 갔을 것입니다. 로마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배했을 것이고 사람들은 계속 자신들의 일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달라졌습니다. 마리아가 사는 이유입니다. 마리아가는 사는 목적입니다. 미국 외싱턴에 가면 한국전쟁용사의 무덤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아마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이후 일생을 걸고 외치며 살았을 구호가 이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유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신비한 하나님의 기적이지만 부활과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은 늘 신비하지도 않고 늘 기적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적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안에 있습니다.

 

몇 달전에 Unbroken(불굴)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루이스 잠페니라는 프랑스 남자의 믿을수 없는 실화입니다. 루이스는 30년대 올림픽에 출전한 달리기 선수였습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비행사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격추되어 태평양에 표류합니다. 47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다 간신히 구조되었는 데 또 일본인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거기서 모진 고생을 합니다. 그러다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는 데 그때 저는 이제는 살았군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인생고가 또 시작됩니다. 그는 전쟁의 상처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결혼생활은 깨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살린 것은 그의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필사적으로 그를 빌리 그래함집회에 끌고 갔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는 끌려가듯 따라갔는 데 빌리 그래함이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모진 금요일이 있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 죽은 처절한 금요일, 그러나 금요일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주일을 준비하셨습니다. 인생의 금요일이 있는 것은 주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금요일을 통과하면 누구에게나 주일이 옵니다. 이 시간 고난의 금요일을 지나 부활의 주일로 나가려는 사람들, 앞으로 나오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이때 루이스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에게는 너무 긴 금요일이었습니다. 생사를 넘어드는 금요일, 그의 생애에 고난의 금요일은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고난의 금요일은 부활의 주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 그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은 금요일입니까? 언제 내 인생의 금요일이 끝나나? 정말 힘들고 포기하고 싶습니까? 금요일이 있는 것은 주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일은 반드시 고난의 금요일을 지나야 옵니다. 저는 이 희망을 작년 세월호에서 죽은 한 학생의 글에서 보았습니다.

 

작년 세월호사건때 갑판까지 나왔다가 친구들을 구하겠다고 다시 선실에 들어갔다 끝내 나오지 못한 단원도 2학년 2반 반장 양온유 양이 생전에 페이스북에 남긴 글입니다. 읽다가 울고 또 울었습니다.

 

겁내지 마라, 아직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기죽지 마라.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도 없다.

걱정하지 마라. 아직 아무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슬퍼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조급해하지 마라. 멈추기엔 이르다.

울지마라. 너는 아직 어리다.

 

이 시를 작년에 세월호에 희생된 우리의 학생들, 부모들, 그리고 아직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인생의 금요일에 고난받는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선물로 드립니다. “겁내지 마라, 아직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기죽지 마라.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도 없다. 금요일은 주일이 있기 때문에 금요일이다. 고난의 금요일이 지나면 반드시 부활의 주일이 온다. 슬퍼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조급해하지 마라. 멈추기엔 이르다.” 아멘.

 

부활절 (20:11-18) 2015.4.5() 부활, 금요일에서 주일로

 

기드론 골짜기무덤(사진).

산헤드린의 무덤(사진).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사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사진).

감람산 무덤들(사진).

 

먼저 막달라 마리아는 상처를 안고 있었습니다.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안을 드려다 보니”. 24:1-3,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유대인 무덤(사진)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안을 들여다 보니”.

 

부활은 반드시 죽어야 온다

 

잔느 귀용(사진).

 

부활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완전히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잊어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현재의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묶여 있었습니다.

20:6-7,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쌋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개켜 있었다= 돌돌 말아져 있었다.

놓여 있었다= 사람이 입은 옷에서 몸만 쏙 빠져 나오고 옷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

 

부활은 풀리는 것이다.

 

11:39, “돌을 옮겨놓으라”.

11:43, “나사로야, 나오라”.

11:44,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하라 하시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고난은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명이다.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겁내지 마라, 아직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기죽지 마라.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도 없다. 걱정하지 마라. 아직 아무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슬퍼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조급해하지 마라. 멈추기엔 이르다.

울지마라. 너는 아직 어리다“. (단원고 2학년 2반 반장 양온유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