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5:1-13 2015.3.1(일)
민족의 자유와 희망
오늘은 3.1절 기념주일입니다. 1919년.3.1,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이 민족이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전 국민이 만세를 불렀던 날입니다. 특히 올해 3.1절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뜻깊은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70년만에 해방된 것처럼 우리도 광복 70년을 맞이하여 평화 통일을 이루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광복 70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에 조직된 초교파 조직이 한국교회평화통일기도회입니다. 이 기도회는 한국교회 진보와 보수, NCC, 한기총, 한교연등 모든 단체, 기관이 한 마음으로 모여 한국교회 평화통일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구에서 집행위원장으로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어머니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누구도 민족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경은 없으나 반드시 조국은 있습니다.
변호사중에 유명한 한승헌 변호사가 있습니다. 이 분이 어떤 책에서 쓴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한번은 그가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최근에 출판된 책 한권을 기증받았습니다. 제목이 <한국사 입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비에 많이 젖어 있었습니다. 출판사 사장이 말했습니다.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비가 많이 와 창고에 물이 새는 바람에 책이 얼룩졌습니다. 깨끗한 책을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이때 한 변호사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나라 역사는 비로 얼룩진 역사가 아닙니까?”. 비로 얼룩진 역사, 비로만 얼국진 것이 아니라 피와 눈물로 얼룩진 역사, 그 역사가 우리 역사입니다.
저는 3.1운동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 가슴에는 3.1운동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할아버지 때문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3.1운동 세대입니다. 그가 중학교를 다녔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할아버지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의 수배를 받게 되었고 만주로 피신가게 되었습니다. 먼 훗날 그가 돌아야 고향에 교회를 세우고 야학을 열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고향집에서 우연히 사진을 뒤적이다가 태극기를 들고 있는 한 소년을 보았습니다(사진). 할아버지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전전하면서 조국독립과 광복의 희망을 안고 태극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이 사진은 저에게 큰 감동과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자라서 조국을 위해 일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오늘 광복 70주년에 맞은 3.1절 기념주일, 이 뜻깊은 날에 우리 모두를 여기 있게 한 조국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애국심을 갖고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성경으로 그 주제를 “자유”로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는 지금은 터키 중부지역입니다. 이 지역의 교회가 당시 당면한 문제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에 와 예수를 믿되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뒤늦게 이 지역에서 예수를 믿은 이방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믿어왔던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인해 얻은 자유를 빼앗길 위기에 놓였습니다. 율법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복음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큰 혼란과 짐을 제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은 이 때였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유대인 교사들이 이런 비복음적인 소식을 오래 퍼뜨리게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분연히 일어나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1장에서 아주 전투적인 자세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갈1:6-7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란 유대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변질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8절 뒷 부분에서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쏘아 붙입니다. 한번으로 모자라 바울은 9절에서 또 말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리고 5장으로 옵니다. 5장에서 바울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이 주는 능력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으면 자유가 없습니다. 힙듭니다. 내 힘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제 구원받아야 그가 주는 자유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복음이 주는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3.1절에 우리가 받은 자유가 이 민족의 자유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자유를 얻었다면 우리 민족도 예수님 때문에 자유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시겠습니까?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바울은 첫 번째로 우리가 예수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자유를 얻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 “주셨다”라는 동사의 형태에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 시제로 부정과거시제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과거에 끝난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이미 주셨습니다.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세히 보면 동사와 명사가 같이 쓰였습니다.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주셨다”. 명사로서 “자유”는 우리가 받은 자유입니다. “자유롭게 하시려고”는 자유를 위하여 예수님이 하신 행동입니다. 자유는 우리의 존재 목적이며 예수님의 행동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유를 위한 행동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얻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자유를 얻었습니까? 롬5:1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예수님 믿어서 우리에게 온 첫 번째 변화는 화평입니다. 화평은 곧 관계개선입니다.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님 때문에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자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짓고 신부앞에 고해성사를 했답니다. 신부가 말했습니다. “3일동안 회개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오세요”. 3일후에 다시 왔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뭐하고 하던가요?”. 신부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제 죄를 다 잊어버렸다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잊어 버립니다. 이미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보시겠습니까?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다같이 “화평을 누리자”. 구원받는 것은 간신히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것은 간신히 지옥형벌 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합니까? 자유얻은 사람만 진정으로 자유를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3.1운동은 보면 기독교인의 활동에 놀라게 됩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우리나라의 인구는 약 1600만이었습니다. 그 중 천도교는 200만, 불교와 유고가 각각 300만이었는 데 기독교는 29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 인구의 1.8%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3.1운동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들을 보면 기독교인인 2,039명, 천도교인이 1,063명 유교인이 55명, 불교인이 41명으로 기독교인의 수가 전체의 60%였습니다. 기독교 인구는 1.8%인데 붙잡힌 사람은 60%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기독교가 민족의 고난에 가장 많이 앞장섰다는 말입니다. 처음 3.1운동의 민족 대표 48명중 23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나중에 서명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전 국민의 1.8%에 불과한 기독교 민족대표가 50%가 넘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기독교는 본래 자유의 종교라는 말입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말입니다. 1919년 3,1부터 5.27일까지 시위로 법원에 기소된 피고인 수를 봐도 기독교인이 압도적입니다. 모두 7,835명이 기소되었는 데 기독교인은 22%에 해당하는 1,719명입니다. 그 다음이 천도교인으로 15%에 해당하는 1,207명입니다. 그렇게 해서 최종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간 사람이 기독교인이 2,032명으로 전체의 22.4%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자유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1절 보시겠습니까?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귀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그 자유를 뺏앗기지 않으려고 자유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유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운명인가 해서 그냥 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희생으로 값비싼 자유를 얻은 우리는 그 자유가 헛되지 않기 위해 자유를 지킵니다. 이것이 3.1절 뿐 아니라 6.25 공산치하, 그리고 70년대 독재치하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희생한 이유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자유를 얻었습니까? 예수님이 부자유하심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자유는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두 번째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1절 보면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굳건하게 서다”라는 말은 군사용어입니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완전무장하고 철통같이 수비한다는 말입니다. 공격앞에 긴장하고 똘똘 뭉쳐 수비한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자유는 얻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일랜드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날 이후>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지상에 계실 때 은혜를 베푼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땅에 내려오셨답니다. 예수님이 한참 가자 가장 먼저 술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그는 거의 폐인이 되어 손과 발이 심히 떨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세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입니다. 자세히 보니 바디메오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되었소?” 라고 묻자 바디메오가 말합니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절름발이일 대는 구걸하며 살아도 부끄럽지 않았는 데 고참받은 후에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져 이렇게 되었습니다”. 말했습니다. 또 한참 가다보니 선창가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사람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게 한 장님이었습니다. “아니 대낮부터 무슨 일이요?” 예수님이 묻자 그가 말합니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눈뜨기 전에는 제가 아무 욕심이 없었으나 눈 뜨고 보니까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제가 욕심을 부리다 보니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싸워야 할 자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자유는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깨뜨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죄입니다. 우리가 삼일운동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삼일운동을 집단적인 시위로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으니 우리에게 독립을 달라고 외친 독립만세운동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물론 삼일운동은 당연히 독립운동이었고 그것의 형태는 집단적인 만세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삼일운동을 조금 더 깊히 드려다 보면 단순한 시위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지배하던 상황입니다. 제국주의란 대략 1880년대 중반부터 1910년대 말까지 산업화를 이룬 서유럽 강대국들이 자국의 세력을 해외로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생긴 지배체제였습니다. 제국주의의 지배는 결국 식민지배로 연결되어 약소국을 정치, 군사적으로 통제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한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영국이 처음에 독점적 우월권을 차지했고 이어 프랑스와 독일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제적 갈등이 조성되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은 4년 4개월 동안 28개국 약 8억 인구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쌓이게 했고 전쟁에 투입된 병력만 7천만이요 사상자만 3천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전쟁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죄였습니다. 힘으로 다른 나라를 억압하여 땅과 힘을 얻자는 생각으로 결국 인간의 탐욕과 죄가 빚어난 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일운동은 바로 이 인간의 타락한 세계사조에 대한 전면적 거절이었습니다. 기미 독립선언서에 보면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하야” 했습니다. 침략주의와 강권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일본 침략의 가장 큰 문제를 영토확장이 아니라 탐욕이라고 지적합니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한갓 정복자의 쾌를 탐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독립선언서 끝부분에 보면 이렇게 끝납니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 제가 이번에 독립선언서를 자세히 읽어보니까 거의 신학 선언입니다. 그 안에 성경적 사고로 가득합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았더니 기독교들이 쓰고 기독교인들이 다듬었습니다. 2.8 동경에서의 독립선언부터 모든 과정에 믿음의 사람들이 관여햇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일본의 문제는 세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편승한 탐욕과 죄악의 문제였습니다. 단순한 독립요구가 아니라 일본과 세계의 인간적 죄악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신학자 불름하르트가 1차대전의 비극을 보면서 그것은 맘몬의 전쟁이요 인간 탐욕과 죄악이 빚어낸 참상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일제에 눌려 있으면서 그것을 감정적 차원에서 반응한 것이 아니라 좀더 성경적, 신학적 차원에서 대응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삼일운동은 우리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싸울 대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자유에도 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freedom from입니다. 무엇 무엇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가령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부터, 바로의 압제로부터 자유입니다. 이 자유가 일차적으로 필요합니다. 삼일운동때 우리가 외쳤던 자유가 일본의 압제로부터 자유였습니다. freedom from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자유가 있습니다. freedom for입니다. 무엇 무엇을 위한 자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는 가나안을 향한 자유입니다. 빠져 나온 것이 능사가 아니라 도착할 곳이 있어야 합니다. 목표는 가나안입니다. 이를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며 자기와 싸워야 했습니다. 광야 40년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삼일운동은 무엇입니까?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주의, 강권주의, 식민주의와 싸워 민족의 독립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차적 목적입니다. 그러나 다만 정치적으로 독립하면 끝나는 것입니까? 계속 싸워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 freedom for입니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 신천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시대가 거해야 합니다. 구시대는 죄로 대표되는 우리의 옛 사람입니다, 구시대가 거하지 않았는 데 신천지가 내할 수 없습니다. 애굽을 떠났어도 광야에서 40년을 싸우지 않으면 가나안 땅은 없습니다. 이번에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죄를 없앴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죄악성을 간과한 판단입니다. 물론 법률적 장치가 없이도 간통하지 않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성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법적 제약이 있었어도 그동안 10만 여건의 간통죄가 법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시골의사 박경철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보면 그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나옵니다. 외과의사이면서도 시골의사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박경철은 유명한 의사이면서 또한 경제평론가입니다. 그는 우리 시대에 잘 나가는 의사입니다. 매일 아침 2시간씩 라디오 방송을 하고 주 1회 TV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신문과 잡지에 쓰는 고정칼럼만 15개를 씁니다. 전국을 누비며 하는 강연이 월 평균 30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토요일에는 안동에 있는 병원에 내려가 진료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는 2000년도까지 다섯 가지 멍에에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술, 담배, 골프, 유혹, 도박입니다. 그중 금연이 가장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새천년이 시작된 날, 마음에 굳게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 멍에에서 벗어나기로. 물론 처음에는 잘 안됐습니다. 그런데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술 안먹고 골프 안 치고 딴 마음 안 먹으니까 시간이 많이 남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책을 보기 시작했답니다. 하루에 못 읽어도 한 권은 읽었답니다. 화장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계속 책을 읽었답니다. 그리고 일년에 한 권 책을 내기로 마음 먹고 매일 200자 원고지 20-30장 분량의 글을 써서 저장해 두었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의 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시간 없다”는 말이랍니다. 사실 우리는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붙잡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갈5:1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고 또 13절입니다.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얻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을 짓누르는 죄의 멍에, 잘못된 습관의 멍에를 끊겠습니까? 자유는 얻는 것이면서 싸우는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의에 이르러야 진정한 자유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자유를 주제로 말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디. 5절입니다. 갈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바울이 자유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의” “의의 소망”을 이야기해서 우리는 조금 당황됩니다. “의”가 자유와 무슨 상관이어서 갑자기 “의”를 이야기합니까? 성경에서 “의”하면 보통 “정의”를 말합니다. 이 두 말이 함께 쓰인 경우가 있습니다. 시89:14절입니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여기에 “의와 공의”가 함께 나옵니다. 이 둘은 하나님이 가진 속성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속을 깊히 들어가 보면 뜻이 조금 다릅니다. 정의는 인간관계에서 쓰는 말입니다. 주로 약자를 돌보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쓰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정의가 인간과의 관계에서 행동으로 나타난 무엇이라면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다 내면적이고 영적인 관계입니다. 영어로도 다르게 씁니다. 정의는 justice라고 쓰고 의는 rightousness라고 합니다. 법정에서 쓰는 단어가 정의라면 교회에서 쓰는 단어는 의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갈5장에서 자유를 말하면서 그것을 정의와 관련시키지 않고 의와 관련시킵니다. 다시 5절 볼까요? 갈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다같이 “의의 소망”. 정의의 소망이 아닙니다. 의의 소망입니다.
보통 “정의롭다”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강재구 소령, 천안함의 한주호 준위, 고대생 이수현, 이런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의”는 행위로 옳은 일 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옳아서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한 사람입니다. “정의”가 인간의 옳은 행동으로 말미암는다면 “의”는 하나님의 옳은 행동으로 말미암습니다. 성경은 한 가지 점을 끊임없이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롭다. 하나님앞에서 더 이상 의로운 자는 없다. 인간의 모든 의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C.S.루이스가 말한대로 우리는 하나님앞에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야할 죄인들입니다.우리는 reform, 개선되어야 할 자들이 아니라 transform, 변화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롬3: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5장에서 계속해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12절입니다. 대표적으로 6절입니다.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왜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 질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의로워 진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6절을 탁월하게 번역한 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6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했다고 더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실패했다고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와, 대단합니다. 마치 부모와 같습니다. 부모는 우리가 성공하면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실패했다고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잘하면 좋알하십니다. 그러나 잘못했다고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동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이 말씀은 어떻게 적용됩니까? 삼일운동 이후 해방과 6.25를 지나면서 우리 민족은 급격히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북쪽은 공산주의를 택하고 남쪽은 자본주의를 택했습니다. 둘 다 다 물질 없으면 못산다는 사상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보다 이질성을 강조했고 둘은 지구상에서 가장 대결적인 구도로 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삼일운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삼일운동이 정치운동이 아니라 정신운동이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 민족은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삼일운동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거절하는 운동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식민주의가 그 배후에 인간의 탐욕과 죄가 있었던 것처럼 공산주의, 자본주의도 그 배후에 물질만능, 맘모니즘과 탐욕, 죄악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길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남이건 북이건 희망은 하나님의 의에 있습니다. 다시 5절, 갈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우리의 희망은 여기 있습니다.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의로우신 하나님께 돌아와 남이건 북이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되고 “믿음으로” 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why not. 왜 없겠습니까? 남북 문제의 원죄인 3.8 장벽이 베를린 장벽처럼 헐리고 남북이 함께 손잡고 백두산에서 기쁨의 통일 축제를 할 날이 올까요? 왜 안 오겠습니까? 보안법, 반공, 공산괴뢰, 미제, 간첩 운운하며 좁아질대로 좁아진 우리의 마음이 통일과 함께 태평양처럼 열려져 세계를 향해 위대하게 뻣어갈 한민족의 영광이 올까요? 왜 안 오겠습니까? 1600만 백성중 불과 29만 밖에 없었던 소수의 기독교가 되지 않았던 33인중 16인, 체포되고 감옥간 사람의 60%를 차지햇던 영광스러운 기독교의 날이 또 올까요? 왜 안 오겠습니까? 한국 최초의 신학교 평양 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북한의 불타는 젊은이들이 헌신을 다짐하고 아름다운 묘향산, 금강산에 수천, 수만만이 모여는 기도원이 생겨 원산에서 온 감리교인과 제주에서 온 장로교인과 LA에서 온 순복음 교인이 함께 손잡고 목을 놓아 기도할 날이 우리에게 올까요? 왜 안 오겠습니까?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자우와 희망의 민족,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돌아가 그의 의를 힘입기만 하면 우리는 성민국가, 동방의 제사장 나라, 하나님의 축복받은 민족이 될 것을 믿습니다. “거룩한 삼일절에 민족이여, 자유하라. 민족이여 자유를 지키라. 민족이여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축복합니다.
갈5:1-13 2015.3.1(일)
민족의 자유와 희망
태극기 든 소년(사진).
갈라디아서?
갈1:6-7,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1919년 우리나라의 인구: 약 1600만
기독교: 29만(1.8%)
체포된 사람: 기독교인 2,039명(60%)
민족 대표 48명중 기독교인 23명(49%)
33인중 기독교인 16명(49%)
피고인 수: 7,835명중 기독교인 1,719명(22%)
최종 유죄판결: 기독교인 2,032명(22.4%)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자유는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갈5:1,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자유는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두 가지 자유
freedom from
freedom for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얻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의에 이르러야 진정한 자유입니다.
갈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시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정의 의
인간관계(약자를 돌보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하나님과의 올바른 행동)
행동적 내면적, 영적
justice rightousness
법정 교회
갈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유진 피터슨,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했다고 더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실패했다고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갈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거룩한 삼일절에
민족이여, 자유하라
민족이여, 자유를 지키라
민족이여, 하나님께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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