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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13-16 산위에 선 동네 2015.4.19.(일)

5:13-16 2015.4.19.()

산위에 선 동네

부활절 이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한 주간동안 평안 하셨습니까? 저는 지난 주 수요일, 진도 팽목항에 다녀왔습니다.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하여 한국교회가 연합으로 드린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팽목항은 봄의 기운이 완연했고 바다는 잔잔했습니다(사진1). 1년전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죽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이 안되는 날씨였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에 파문을 던진 것은 유족들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자식잃은 부모의 눈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기 저기 눈물의 자국들이 짙게 배인 가운데 한 어머니가 쓴 글이 제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단원고 2학년 1반 김현정양 어머니의 글이었습니다. 현정이는 그날 세월호 4층에 있다가 미쳐 탈출하지 못하고 실종되었고 시신은 421일 날 엄마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글을 썻습니다. “현정아, 엄마가 미안아. 모든 게 미안해. 이렇게 이쁜 바람 엄마만 맞아서 미안해. 따스한 햇살 엄마만 받아서 미안해. 좋은 음악 있다고 엄마 귀에 이어폰 꽂아주던 내 딸. 이젠 엄마 혼자 들어서 미안해. 밥도 엄마만 먹어서 미안해. 아침에 깨워서 내 딸 현정이 밥 먹여야 하는데 못해서 미안해. 내 딸 영영 볼 수 없는데 엄만 먹고 자고 이러고 있는 거 미안해. 이젠 내 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미안해. 수학여행 갔다 오면 하복 입혀야 하니까 입혀주지 못해 미안해. 내 딸은 없는데, 이곳에 나만 살아 있는 것이 미안해”. 글을 읽는 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자식이 죽은 바다는 잔잔했지만 부모의 마음은 여전히 거센 풍랑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진도를 떠나면서 생각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죽었고 우리는 살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 순간의 거품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 있다면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아직도 살 시간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 생의 최고의 감사가 아닐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부활절 둘째 주일에 잘 살기 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세상은 여전히 험하고 세찬 풍랑이 몰아 치지만 그래도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20: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절 이후,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면서 세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입니다.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험한 세상을 이길 힘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능력입니다. “뉘죄든지 사하면 내가 사할 것이요”. 용서의 은총입니다. 세상을 품었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을 품은 속죄자로 보냄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 가지 선물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이 보내신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삶의 진수를 보여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산상수훈이요 다음은 십자가입니다. 산상수훈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고 십자가는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한 것이 산상수훈이고 그렇게 사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둘은 나뉘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죽여 세상을 살린 하나님의 사랑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그 사랑을 말로 표현했고 십자가는 그 사랑을 죽음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의 최종적인 결론은 부활입니다. 저는 부활절 이후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다가 마5-7장의 산상수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 100% 그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위대한 말씀과 교인들과 나누기로 다짐했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산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갈릴리의 팔복산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5장에서 7장에 나타난 산상수훈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일반인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5:1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선포할 때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까이 온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추종자와 제자는 다릅니다. 추종자는 자기 유익을 위해 따르고 제자는 주님의 뜻을 위해 따릅니다. 우리가 무리가 아니라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두 번째는 단순히 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복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복있는 사람보다 복자체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관심은 복이 아니라 복있는 사람입니다. 53절에서 10절까지 8번 반복되는 것은 복있는 사람은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교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삶을 가르쳤습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 삶과 관련됩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고 연구하라고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이 7:2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다같이 듣고 행하는자는”. 연구가 목적이 아니라 순종이 목적입니다. 진리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부활이후, 우리가 세상에서 붙잡고 실천할 말씀, 산상수훈, 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부활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세상에 사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큰 그림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크게 둘입니다. 소금과 빛입니다. 13절 보시겠습니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 5:14, “너희는 세상의 빗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기대하는 삶은 소금과 빛의 삶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드러납니다

많은 특징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은 어떤 경우든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 존재가 드럽니다. 소금은 녹고 빛은 비춥니다. 소금은 음식을 짜게 하고 빛은 어둠을 밝게 합니다. 소금이나 빛은 어디에 있든지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특징이 14절에 잘 나타납니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여기에 산위의 동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독특하게 집을 짓습니다. 우리는 보통 평지나 골짜기에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높은 데 집을 짓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대부분의 동네가 산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높은 산위에 서 있습니다(사진2). 사마리아에 있는 실로도 높은 데 서 있습니(사진3). 유대인 정착촌인데 이렇게 높은 언덕에 집을 지었습니다. 갈릴리 티베리우스도 높은 산위에 잇습니다(사진4).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집을 짓느냐고 이스라엘 사람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크게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우선 덥기 때문에 높이 올라가면 시원합니다. 기후적인 이유입니다. 다음은 이스라엘 산은 대부분 단단한 바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산에 집을 세우면 안전합니다. 지질적인 이유입니다. 세 번째는 전쟁이 나면 적군이 골짜기를 통해 올라오기 때문에 방어할 시간을 갖게 됩니다. 전략적인 이유입니다. 마지막은 산에 올라갈수록 하늘이 가깝고 기도가 빨리 응답됩니다. 영적인 이유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관습을 통하여 또 하나를 말씀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삶입니다. 세상에 사는 제자의 삶은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집이 있으니 누가 안 보겠습니까? 다 봅니다.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세계 어디를 가도 튀어납니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가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그래서 많은 미움도 받았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600만이 학살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들이 이 기능을 합니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주목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목을 받습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어렵습니다. 작년 말에 한국갤럽이 한국종교실태를 조사했습니다. 한국인중 얼마나 종교를 믿고 어떻게 믿나를 조사한 것입니다. 한국인중 종교인은 약 50%입니다. 50%는 종교를 믿고 약 50%는 아무 종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종교로 평가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예배, 헌금,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월등하게 앞섭니다. 문제는 호감도입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무종교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종교에 호감을 갖고 계십니까?” 2004년과 2014, 10년 사이를 비교했습니다. (도표1). 불교 200437%, 201425%, 천주교 17%, 18%, 기독교 12%, 10%, 호감이 가는 종교가 없다는 늘었습니다. 33%, 46%. 특징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교에 대한 호감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호감이 12%에서 10%로 줄었습니다. 종교인구는 기독교가 20%정도 되는 데 호감도는 10%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왜 이렇게 호감도가 떨어집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잘 못 살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사람 눈으로 볼 때 교회와 교인들이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을 섬기지 않는가?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니 않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밖으로 잘 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가 내놓은 자료가 있습니다. 이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습니다(도표2). 기독교가 세상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볼까요?

 

종교관련 사회복지법인 총 372. 기독교 194(52.15%)

전국 종합사회복지관 총414. 기독교 188(45%)

노인복지시설 88. 기독교 54(62.85%)

전체 지역아동센터 3013. 기독교 1601(53.13%)

전국 사립 초, , 361. 기독교 259(72%)

대북지원민간단체 79. 기독교 22(36%)

지난 3년간 총지원액중 기독교 40.29%

해외원조단체 협의회 47개중 기독교 17(36%)

전국 종교병원 169개중 기독교 49(29%)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장기기증신청자 586,407명중 기독교 363,496(62%)

서해안기름유출 봉사 1,226,730명중 기독교 700,000(57.06%)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기독교가 세상에서 큰 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정부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복지, 학교, 병원, 봉사, 어떤 분야에서도 기독교는 월등하게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교회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거나 항상 잘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는 정도 이상 하고 있고 분에 넘치게 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비판받고 있습니다. 왜 비판받느냐? 우선 교회는 자신이 한 일을 홍보하지 않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한번도 우리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광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도 하나님만 아시면 되지 하고 숨겨왔습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면 불쑥 불쑥 터져나오는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다른 집단이나 개인은 잘못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더 잘못을 많이 합니다. 문제는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장관이나 총리 청문회할 때 보십니까? 겉으로 볼 때는 멀정한 데 속을 뒤집어 보니까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온갖 비리가 다 나옵니다. 이번에도 보십시오. 한 기업의 회장이 그렇게 많은 정치인에게 돈을 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안 받았다고 하는 데 우리 국민중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비리, 어떤 부정이 아무도 모르는 데서 저질러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고 합니다. 잡힌 죄인과 아직 잡히지 않은 죄인입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나빠서 비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깨끗한 데 교회만 유달리 더러워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교회는 훨씬 깨끗하고 좋은 일도 훨씬 많이 합니다. 다만 이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죄는 잘 안 드러나고 교회의 죄는 잘 드러납니다. 세상은 죄가 드러날 때까지 숨기다가 드러나면 끝까지 오리발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공개되어 있고 드러나면 숨길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본래 죄짓는 곳이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본래 죄없는 곳으로 생각하다가 무슨 죄가 드러나면 사람들이 아니, 교회가?” 하고 놀랩니다. 일반인은 죄를 지어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죄를 지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비판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산위에 선 동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라보고 있고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은 골짜기에 있고 교회는 산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늘 표적이 됩니다. 교회의 잘못이 없어야 하지만 혹시 잘못이 있어도 교회를 부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교회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허물면 들어가 회개할 집도 없습니다.

우리는 소금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산위에 있는 집이기 때문에 교우리가 짓는 죄가 정당화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보다 덜 죄를 짓기 때문에 가끔 짓는 죄가 용납된다는 것 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에 드러난 존재로서 교회는 어떻게 하며 세상사람들에게 노출된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빛과 소금입니다. 13-14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 5:14, “너희는 세상의 빗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중요한 것은 왜 주님이 세상에 드러난 존재로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할 때 소금과 빛을 이야기하셨느냐입니다. 왜 한 가지가 아니고 두 가지냐 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의미하는 것과 빛이 의미하는 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우리의 삶을 이루길레 두 가지를 말씀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의 순서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빛과 소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빛이 먼저가 아니라 소금이 먼저입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합니까? 세상에서의 제자의 삶은 소금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왜 소금이 먼저여야 할까요? 소금은 우리의 존재를 말하고 빛은 우리의 사명을 말합니다. 소금은 우리가 어떤 존재여야 하느냐를 말하고 빛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를 말합니다.

 

소금은 녹는 것입니다. 소금의 영성은 곧 자기 죽음의 영성입니다. 자기 깨뜨림의 영성입니다. 자기를 깨뜨리지 않고 세상을 살리는 방법은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깨뜨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마음입니다”. 이 글을 어디에선가 보고 책상앞에 붙여 놓았습니다. “주님, 나를 내가 원하는 곳에 두지 마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두소서. 나를 영광의 자리에 두지 마시고 주님을 위한 수고의 자리에 두시며, 나를 사용하시되 주님이 필요한 만큼 구별해서 사용하소서. 주님, 제가 높아지는 길로만 가지 말게 하시고, 높거나 낮거나 주님을 위한 길로만 가게 하소서. 주님 나를 채우시지만 마시고 채우건 비우건 주님의 필요대로 하시며 내가 무조건 갖지 말게 하시고 갖거나 잃거나 오직 주님만 잃지 않게 하소서”.

 

한국교회는 세상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봉사, 학교, 병원, 구제, 북한 선교, 해외사역등에서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으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잘못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성경을 보십 시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했습니다. “소금처럼 되어라가 아닙니다. 본래 소금은 아닌데 소금 노릇을 하라가 아닙니다. 소금의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 되라는 것입니다. 기능이 아니라 존재입니다. 소금의 존재는 음식속에서 녹는 것입니다. 소금의 일은 죽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해바다에 가면 많은 소금들이 있습니다(사진5). 그 소금에서 마그네슘, 칼슘, 화학재료 대 추출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용도가 없습니다. 그러면 버립니다. 겉으로 볼 때 희어서 소금인가 하지만 입에 대보면 아무 맛이 없습니다. 짠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옛날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은 소금을 치게 했습니다. 곡식으로 드릴 때 곡식에도 뿌리고 동물로 드릴 때 동물에 뿌렸습니다. 제사한 후에 먹을 때 맛을 내기 위함이었지만 더 중요한 뜻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라 함입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은 동물이나 식물은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카톨릭교회에서도 세례베풀 때 입에 소금을 넣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안에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를 일컬을 때 가장 많이 비판받는 것이 말만 많이 하고 행동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백설공주라 불렀습니다. , ‘백방으로’. , ‘설치고 다니면서’. , ‘공포의’. , ‘주둥이를 놀리는 사람’. 예수님 제자는 말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잘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입니다. 송길원 목사님이 쓴 책에 배추는 5번 이상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는 글이 있습니다. 배추는 다섯 번 죽어 우리 입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통째로 뽑힐 때, 칼로 배추의 배를 가를 때, 짜디짠 소금에 절일 때, 매운 고추와 젓갈과 마늘의 양념에 버무러질 때, 그리고 입 안에서 씹힐 때”. 그렇게 죽은 김치가 우리 입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배추도 죽어야 맛을 내는 데 예수님 제자는 늘 자신속에 소금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맛이 있고 맛을 냅니다. 우리는 소금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금입니다.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소금일 뿐 아니라 빛입니다. 소금이 존재를 말한다면 빛은 사명을 말합니다. 소금이 우리가 누구냐의 문제라면 빛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비추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5:15, “사람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등이 있는 것은 비추기 위함입니다. 빛을 내는 등경은 말 위에 두지 말 아래 두지 않습니다. 높은 데 있어야 집안 모두를 비춥니다. 16절입니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람들에게 비출 빛은 성도의 착한 행실입니다. 소금이 자기죽임을 기본 존재로 한다면 빛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일을 사명으로 합니다. 자기만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 구석 구석을 비춰야 합니다. 어두운 밤 바다 구석 구석을 비춰야 합니다. 세상의 여기 저기 어두움을 비춰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두가지 사역을 교훈으로 담았습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사역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죽고 부활은 사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는 이 두 가지가 흐릅니다. 죽고 살리고. 소금이 죽는 것이라면 빛은 살리는 것입니다. 죽고 살리고의 도식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예수님이 가르친 모든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자기가 해야 할 의무적인 일에만 멈추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죽여 세상을 살리기 위해 우리는 비추고 싶은 곳만 비춰서는 안됩니다. 집안 구석 구석을 비춰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 학교, 직장, 일터, 사회, 세상, 이디나 미칩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교회는 의무감을 넘어 서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의 사명자로서의 성도의 삶의 영역을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할 때 형제만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유대인은 자기 동족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세상 구석 구석을 비출 수 없습니다. 구제로 그렇습니다.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람에게 자에게 주는 것이 구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 구제라고 말합니다. 구제의 영역이 확 넓어집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꼭 돈으로만 주라는 말도 없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속에 돈은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종교적 의무를 넘어서야 세상에 빛을 비춥니다. 단지 예배드리고 기도한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주인공 레드가 친구에게 감옥의 벽을 두고 한 말이 있습니다. “벽은 참 흥미로워. 처음에는 벽이 싫지만 나중에는 이것들에 익숙해지거든.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벽을 의존하게 되지. 수감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야.” 우리는 예수믿으면서 교회생활에 익숙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에 익숙하다고 예수님과 친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할 것은 우리가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 가면서 예수님의 정신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가 여기 있고 우리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정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십니까? 우리 제대로 한번 믿어 볼까요? 우리 모두는 산위에 선 동네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믿어 보지 않겠습니까? 소금처럼 날마다 죽읍시다. “나는 매일 죽노라”. 이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빛처럼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구석 구석을 비춥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의무감을 넘어 섭시다.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예수님을 소금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빛처럼 온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교회, 십자가에서 죽고 사신 예수님을 따라가듯이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삽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세상을 살립니다. 우리는 산위에 선 동네입니다. 우리는 소금이요 빛입니다.

 

 

 

 

 

 

 

 

 

 

 

 

 

 

 

 

 

5:13-16 2015.4.19.()

산위에 선 동네

진도 바다(사진1).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산상수훈의 특징

(1) 일반인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셨다.

 

(3) 교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삶을 말씀하셨다.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5:14, “너희는 세상의 빗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우리는 드러납니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예루살렘(사진2).

사마리아 실로(사진3).

갈릴리 티베리우스(사진4).

 

어떤 종교에 호감을 갖고 계십니까?”(도표1).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자료(도표2).

 

종교관련 사회복지법인 총 372. 기독교 194(52.15%)

전국 종합사회복지관 총414. 기독교 188(45%)

노인복지시설 88. 기독교 54(62.85%)

전체 지역아동센터 3013. 기독교 1601(53.13%)

전국 사립 초, , 361. 기독교 259(72%)

대북지원민간단체 79. 기독교 22(36%)

지난 3년간 총지원액중 기독교 40.29%

해외원조단체 협의회 47개중 기독교 17(36%)

전국 종교병원 169개중 기독교 49(29%)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장기기증신청자 586,407명중 기독교 363,496(62%)

서해안기름유출 봉사 1,226,730명중 기독교 700,000(57.06%)

 

교회가 세상보다 더 나빠서 비난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금입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5:14, “너희는 세상의 빗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해 소금(사진5)

 

우리는 빛입니다.

5:15, “사람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소금 빛

십자가 부활

죽고 살고

존재 사명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