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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0:19-23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2015.4.12(일)

20:19-23 2015.4.12()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부활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부활후 어떻게 지냈습니까? 부활 이후의 삶을 생각할 때 한 노인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남태평양에 괌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작은 섬이 있고 거기에 요코이라는 동굴이 있답니다. 1972년 거기서 노인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는 뒷산 동굴 근처에 사람 모양의 짐승이 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는 데 그가 당시 60세 가까이 된 요코이라는 일본군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나고야에서 징집되어 괌에 배치되었는 데 거기서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혼자 살아온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쟁의 소식이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지고 이긴 소식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아직도 전쟁중인 줄 알고 동굴에서 혼자 지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까운 인생입니까? 30년이면 황금같은 시간인데 짐승처럼 동굴에서 살다니. 이미 전쟁은 끝났는 데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동굴에서 썩다니 얼마나 아쉽습니까?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모르고 여전히 죽음의 동굴속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다 해도 자기 편한대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마 오늘 말씀에 제자들도 평소에 자기들이 모였던 대로 다락방에 모인 것 같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19절입니다.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여기 두려워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한 후 제자들은 더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24장에서 여자들이 그랬습니다.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했으면 기뻐해야 하는 데 지 혹시 두려운 일이 있어도 전날의 한숨 변하여 기쁨의 노래가 되어야 하는 데 예수님이 부활했는 데도 제자들은 더 두려워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때문에도 두려워했습니다. 19,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부활이 죽음을 이긴 사건이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사건인데 왜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 했을까요? 참 중요한 것이 여기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한번도 부활이후에 너희의 모든 고난이 끝났다거나 너희의 모든 두려움을 사라졌다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더군다나 더 이상 마귀가 너희를 시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후 달라진 것은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두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19, 20:19,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우리가 부활절 이후 기억할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절에 부활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다같이 예수께서”. 당연히도 부활의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부활절 이후에 다른 것을 찾으면 부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부활절 첫 주일에 이것을 기억하시겠습니까? “부활절에 부활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부활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지만 부활의 삶의 중심에도 예수님이 계신다”. 아멘.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슨 부활의 선물을 주셨습니까? 세 가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영어 단어 세 개의 p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첫째 peace, 평화입니다. 둘째 power, 능력입니다. 셋째 pardon, 용서입니다. 부활이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의 부활의 선물은 평화와 능력과 용서입니다.

 

먼저 평화를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주신 것이 있습니다. “평화입니다. 21절 보시겠습니까?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왜 예수님이 평화를 가장 먼저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불안한 존재입니다. 칼빈이 말한대로 인간은 불안공장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를 파괴하는 두 개의 영적인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분노와 탐욕입니다. 이 두 적도 다 우리 속에 있습니다. 분노는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탐욕은 다른 사람이 나의 욕심을 채워 주지 않을 때 생깁니다. 모든 나쁜 것이 내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활동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믿음없는 사람들입니까? 두려움은 내 안에서 생겨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참 평안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을 원하지만 주님이 주시기 원하는 것은 평안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없는 데 성공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평안의 반대는 두려움이고 두려움의 반대는 믿음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상호 배타적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두려움의 끝이고, 두려움의 시작은 믿음의 끝입니다. 성경은 두려움을 말할 때 항상 그 반대편에 믿음을 둡니다. 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두려움을 근절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해독제는 믿음입니다.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모든 두려움은 안에서 나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최초로 등반한 짐 와이캐이커가 말했습니다. “자신을 정복하기 전에는 결코 산을 정복하지 못한다”. 어떤 영화에서 감옥을 탈출한 사람에게 어떻게 그 높은 벽을 넘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막은 벽은 실제 벽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습니다. 내가 두려움을 이겨내자 나에게는 더 이상 높은 벽이 없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믿음입니다. 믿음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을까요? 평화의 기초인 믿음을 통해 평화를 주셨습니다. 평화라고 해서 다 같은 평화가 아닙니다. 세계는 지금 평화란 이름으로 거대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IS가 이슬람평화를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이 평화를 말하면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을 만들면서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어떤 집에서 할아버지가 밤중에 일어나더니 할머니에게 말합니다. “할멈, 허리가 너무 아파. 파스 좀 붙여줘.” 할머니는 귀찮았지만 어두운 방을 더듬거려 파스를 찾아 할아버지 등에 붙여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붙여준 파스 덕분에 그날 밤 잘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허리에 붙은 것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중화요리는 칠성각에 주문해주세요. 전 지역 5분내 배달해 드립니다.” 할아버지가 바른 것은 파스가 아니라 중국집 전단지였습니다. 전단지를 붙이고도 파스를 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이 말하는 평안은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평안은 다릅니다. 14:27,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그러면 예수님이 주신 평화는 어떻게 다릅니까? 우선 20절 보시겠습니까?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할 때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앞에 19절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보여주신 것이 손과 옆구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못자국입니다. 평화를 말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단지 평화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평안은 웅변하지 않았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말씀하시고 못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로마 군병이 예수님 손과 발에 못을 박을 때 붉은 피가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사람들은 남의 피를 흘려 평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남의 손에 못박고 남의 옆구리에 창을 박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평화가 있습니다. 남을 죽임으로 내가 사는 평화가 있고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평화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평화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20:27,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있는 자가 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대속적 평화입니다. 자기가 죽어 우리를 살리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예수님이 하신 구원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믿어 구원받습니다. 평화의 기초는 예수님의 희생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받는 믿음을 제공합니다. 결국 믿음이 평화를 가져옵니다. 지금도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이기며 살까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평화가 두려움을 이깁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다음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주신 것은 능력입니다. 22절입니다.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이 두 번째 주신 것은 능력, power입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로 평화를 주셨는 데 왜 다음이 능력일까요? 오늘 말씀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평강을 선포한 주님은 우리를 21절에서 세상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21절 뒷 부분입니다.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길 원하셨습니다. 부활보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우리에게는 부활의 삶이 필요합니다. 부활이 동굴에서 일어났다면 부활의 삶은 세상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제가 어느 교회 갔더니 교회 좌우편에 표어가 붙었습니다. 한쪽에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다른 쪽에 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성경을 두 마리도 잘 요약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오라와 가라입니다. 하나님께 오고,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오면 쉬게 되고 세상으로 가면 주님이 함께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왔으면 항상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믿습니까? 변화산에 올라간 제자들처럼 예수님 만났으면 산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사는 현장입니다. 어느 바다에서 배 한척이 조난직전에 빠졌습니다. 급하게 선장이 구조선에 SOS를 쳤습니다. 연락을 받은 구조선이 배를 띄웠습니다. 이때 젊은 선원이 선장에게 말했습니다. “선장님, 바람이 너무 세고 파도가 너무 높아 배를 띄우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때 선장이 말했습니다. “아닐세, 우리에게는 지금 구조하러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지금 바다에 조난당한 배가 있네. 우리는 가야해“. 겁이 많은 선원이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장님, 우리는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선장이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이 사람아, 우리는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게 아니라 가라는 명령을 받았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오늘 말씀에 우리를 세상으로 가라고 말했지 돌아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면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주님이 우리를 보낸 세상은 마치 이리와 같습니다. 이리는 늑대입니다. 세상이 모두 늑대라는 말이 아닙니다. 늑대가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광야에도 늑대가 있는 데 주로 남쪽 네게브 사막에 거하면서 광야에 사는 새, 토끼, , 심지어 도마뱀, 노루까지 잡아 먹습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베드윈들이 사는 마을까지 내려와 양을 물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늑대는 어디에서나 좋지 않게 평가되는 동물입니다. 이솝의 우화에서나 탈무드에서도 늑대는 늘 나쁜 동물입니다. 잘 속이고 포악할 뿐 아니라 교활하기 까지 합니다. 늑대는 주로 밤에 활동하고 비겁하게 굴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사자가 이깁니다. 그러나 밤에, 그나마도 비겁하게 싸우면 늑대가 이깁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이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2절 다시 보십시오. 20:22,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세상이 늑대같은 데 우리가 무슨 힘으로 살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그 능력입니다. 성령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입니다. 1장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의 잉태를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여기서 성령을 지극히 높으신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the power of the Most High”,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 현대 영어성경은 더 쉽게 번역했습니다. “the most highest power”. “가장 높이 계신 분의 능력”. 그렇습니다. 성령은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요 가장 높이 계시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목할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도 성령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부활이후에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성령님은 예수님안에 계신 신적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으로 기뻐하고, 성령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라이렇게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왜 그랬을까? 지금이 어떤 시점인가 보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하나님과 성령님, 삼위일체로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활하심으로 육신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홀로 남습니다. 그들은 마치 어머니를 떠난 고아들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육신의 어머니가 아닌 영의 어머니입니다. 영의 어머니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요4:1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육신으로 오신 예수니이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그 분이 어머니 성령님입니다.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함께 거하고 속에 계십니다. “He lives with you and in you".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육신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실 성령님, 그 분을 주님은 소개하고 부활,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받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적인 일이 아닙니다. 부활이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숨을 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왜 예수님이 숨을 쉬며 성령받으라 하셨습니까? 성령님은 숨입니다.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 하야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살아있는 바람입니다. “생기입니다. 성령은 곧 루아흐 하야”, 곧 바람이기 떄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리적 환경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비입니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비 한방울 오지 않다가 10월 말경,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비는 서편, 지중해 쪽에서 부는 바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바람이 살랑 살랑불면 사람들은 압니다. “, 비가 오려나 보다”. 과연 며칠 지나면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이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찬송가 172장은 이런 배경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리는 바람이 불면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면 산천초목이 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 “루아흐 하야”, 살리는 영이 임하면 우리 영과 생명이 삽니다. 그 생명이 능력이 되어 이리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을 승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두 번째 선물입니다.

 

마지막으로 용서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신 것은 용서입니다. 23절입니다.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용서를 말씀하셨는 데 어떤 용서냐가 중요합니다. 내 죄를 용서하는 용서가 아니라 남의 죄를 용서하는 용서입니다. 그러니까 사죄입니다.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부활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주님이 원하신 것은 우리가 단지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죄를 용서하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단순히 죄짓지 않기 위해 삽니까? 남을 용서하기 위해 삽니까? 어떤 교인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솔직히 말해 주세요. 담배 피우면 죄입니까? 담배피우면 지옥 갑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담배 피우면 죄는 아니지만 대신 더 빨리 천국 갑니다.” 담배피우면 건강이 나빠져서 일찍 죽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먹으면 죄입니까? 노름 좀 했다고 죄입니까? 당연히 아니라는 전제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가 되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죄짓지 않기 위해 삽니까?” 다시 23절 볼까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죄짓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죄 용서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남의 죄를 용서해며 살아야 합니까? 다시 23절 볼까요?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원문으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하여 질것이요라는 동사는 수동형으로 되어 있고 뉘 죄든지 사하면은 능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죄를 사하는 현실적인 사람은 나인데 죄를 사하는 실제적인 분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자와 죄용서 선포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용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지금 용서할 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의 선포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용서가 참 어렵습니다. 지난 2월에 어떤 한 사건이 있었는 데 그것은 저를 많은 사람앞에서 모욕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두고 두고 저에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상처가 되었습니다. “용서한다”. “용서하자했지만 여전히 제 마음에 응어리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4.3, 성 금요일에 23:34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가상칠언중 첫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는 항상 이 말씀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번 읽으면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이 기도를 한 예수님은 자신이 용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내가 용서하노라가 아닙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직접 용서할 수 없어서 그랬을까? 예수님도 마음으로 그들을 다 용서할 수 없어서 그랬을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지만 용서한다가 아니라 용서해 주옵소서 했는 데 어떻게 죄인인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용서하기 어려웠던 것은 내가 용서하려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인 내가 다른 죄인을 용서할 자격이나 있을까? 용서할만한 사랑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용서할 자격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용서해 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제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인데 그것도 못하냐? 그래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용서에서 중요한 것은 용서자와 용서의 최종 실행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를 위해 기도할 뿐 최종 용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또 하나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는 나 혼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해는 둘이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단독으로 하고 화해는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용서할 생각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용서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용서는 일방적이었지 쌍방적이 아니었습니다. 용서는 했으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너희들이 나에게 와서 용서를 빌지 않으면 나도 용서하지 않겠다 했다면 십자가의 용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잘못한 사람은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잘못 하지 않은 쪽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기다릴 것인가 먼저 용서할 것인가? 네가 용서해달라고 빌지 않으면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면 용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용서하면 화해는 다음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속죄자, 속죄의식이라고 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콩고로 가서 93세까지 의료선교사로 일한 것도 이 속죄의식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유럽을 쑥대밭을 만들고 유대인 600만을 학살하자 독실한 신앙인인 슈바이처는 기도했습니다. “누가 히틀러로 인해 죽은 억울한 영혼들에게 속죄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감동했습니다. ”네가 해라“. 그래서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속죄자가 필요합니다. 내 죄만 자기고 씨름하기 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대신 지고 속죄하는 것입니다. 속죄의식입니다. 가정의 어려움이 있다. 내가 기도하자. 교회가 어렵다. 나를 이 교회로 보내신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내가 십자가 지자. 내가 기도하자. 속죄의식. ”누가 하겠냐?“ ”네가 해라“. 중보기도는 이래서 가능한 것입니다. 내 문제만 위해서 기도하면 중보기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위해 기도하니까 기도가 풍성해지고 오래 기도하고 응답도 것입니다.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절 이후는 여러분은 용서하고 살겠습니까? 자기 죄만 가지고 낑낑대지 말고 남의 죄도 용서하며 살겠습니까? 속죄자, 중보기도자로 사는 것입니다.

 

부활절 이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부르신 주님이 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보내십니다. 세 가지 선물과 함께 보냅니다. 평안하십시오. 평안은 우리가 사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가 평안을 얻었습니다.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그능력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삽니다. 용서를 주셨습니다. 내 죄가 아니라 남의 죄를 사죄하는 자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부활절 이후, 우리의 삶의 세 가지 방향입니다. 주여, 우리로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주님과 승리하게 하옵소서.

 

 

 

 

 

 

 

 

 

 

 

 

20:19-23 2015.4.12()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20:19,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먼저 평화를 주셨습니다.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믿음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다.

 

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14:27,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두 가지 평화가 있다. 남을 죽임으로 내가 사는 평화가 있고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평화가 있다.

 

20:27,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있는 자가 되라”.

 

다음 능력을 주셨습니다.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20:22,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성령=“지극히 높으신 능력”(the power of the Most High)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the most highest power)

 

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루아흐 하야)=살아있는 바람, 생기

 

마지막으로 용서하셨습니다.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1) 예수님은 용서한다고 하지 않고 용서해 주옵소서 기도하셨다.

(2)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누군가 먼저 용서하면 마지막에 화해하게 된다.

(3)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용서를 비는 것이 속죄자의 삶이다.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