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7-20 2015.4.26(일)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부활절 이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한 주간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예배후 여신도회 바자회가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 열리는 전교인 바자회입니다. 많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서도 우리처럼 바자회가 열렸답니다. 담임목사가 교회앞에 광고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여선교회 주최로 각 가정에서 필요 없는 물건들을 가져와 싸게 판매하는 바자회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잊지 마시고 남편들도 꼭 데리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쯤 했으면 웃음이 나와야 합니다. 남편이 필요없어서 팔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절 이후 주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가 사는 현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세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입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성령입니다.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질 것이요”. 사죄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선물을 이미 받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이 세 가지 선물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에서 삽니까? 그것이 산상수훈입니다. 마5장에서 7장에 나타난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살 것인가를 가르친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는 서론적으로 소금과 빛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소금처럼 자기를 죽여 빛처럼 세상을 살려야 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서 그러면 무엇으로 소금처럼 죽고 무엇으로 세상에 빛을 비춥니까? 주님은 오늘 1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했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해답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해답입니다. 다같이 하겠습니다. “말씀이 해답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씀을 볼까요?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폐하지 말라.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리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율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율법과 넓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좁은 의미의 율법은 구약에 나오는 모세 5경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 중에서도 출애굽기 19장부터 레위기 그리고 신명기에 이르는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여기 나오는 율법의 수를 모두 613가지로 봅니다. 그 613가지의 율법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하라”하는 계명으로 248개 입니다. 다음은 “하지 말라”하는 계명으로 365개입니다. 재미있게도 248은 인간에게 있는 모든 뼈와 마디의 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365는 1년을 나타내는 날 수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몸 전체와 같고, 일년 365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좁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그런가 하면 넓은 의미의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 전체입니다. 모세 5경, 선지자들의 말씀, 시편등 모든 구약성경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율법은 주로 모세오경입니다.
모세 5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받으려고 시내산을 8번이나 올라갔습니다. 이 말씀은 작게는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실천하고 지켜야 할 삶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더 나가면 이것은 모든 인간이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그들의 평생 사명은 이 율법을 매일 배우고 그대로 지키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탈무드에 보면 한 제자가 랍비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앞에 선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하실까요?”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아마 네 가지를 물을 것이다. 첫째 너는 이 땅에서 자신의 일을 정직하게 행했는가?”. 두 번째는 너는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율법을 공부했는가?“. 셋째는 “너는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가?”. 그리고 마지막이 “너는 세상이 구원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가?”. 첫째 일, 둘째 율법, 셋째 가정, 넷째 구원.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율법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잘 되려면 율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다 보면 까만 모자,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다띠”라고 부르는 종교인입니다(사진. 이스라엘 다띠). 이들은 반드시 까만 옷을 입습니다. 자신을 과거의 제사장의 후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심지어 목욕탕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습니다. 모자를 안쓰면 키파라는 빵모자같은 것을 쓰고 다닙니다(사진). 왜냐하면 하나님이 머리위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육도 아무 데서나 받지 않습니다. “예쉬바”라 부르는 율법학교에서 6살때부터 율법과 탈무드를 배웁니다. 군대도 가지 않으며 일하지 않아도 각종 세금이 면제됩니다. 생활비, 교육비도 다 지급합니다. 전체 인구 780만중 70만명, 약 10%입니다. 군대도 가지 않고 일도 하지 않아 이스라엘 경제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정부가 그대로 두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입니다. 율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민이 다 그렇게 하지 못해도 소수의 사람이라도 그 전통을 이어가게 하는 것, 그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정신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오로지 밥만 먹고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공부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식은 누가 가르치며 소는 누가 키웁니까? 못합니다. 생활때문에도 못하지만 또 하나 못하는 이유는 그 많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 했습니다. 가정의 울타리를 떠나 다른 남녀와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그렇게 안 하지만 세상이 우리가 그것을 못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습니다. 정신차리고 살기에 너무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목숨걸고 노력해서 간음을 안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613가지 율법중 겨우 하나 지킨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십계명을 지켰다고 합시다. 603가지가 더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율법을 다 지키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나온 것이 율법무용론입니다. “율법 필요없다. 누가 율법 다 지키겠느냐? 못한다. 지킬 수 없는 율법 필요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17절을 보십시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 필요없다”. 소위 율법폐기론입니다. 너무 지키기 힘들기 때문에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8절입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일점 일획”은 히브리어의 특징에서 나왔습니다. 히브리어는 점하나 줄 하나 잘못 치면 다른 전혀 뜻이 됩니다. “호림”하면 부모입니다. “오림”하면 “빛”입니다. “하림”하면 “산”입니다. “모림”하면 선생입니다. 자음 한 자만 바뀌었는 데 완전히 뜻이 달라집니다.
오래전에 한 사람이 지방에서 하는 친구 결혼식에 바빠서 못가서 축전을 쳤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말씀으로 축전을 보냈는 데 요일4:18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람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슴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당시는 우체국에서 전보내용을 받아 쓸 때입니다. 우체부가 요일4:18절을 요4:18절로 잘못 받아 적었습니다. 결혼식날 사회보는 사람이 축전을 크게 읽었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신랑신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요일4:18을 요4:18로 읽은 것입니다. 이것이 “일점 일획”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깁니까?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합니까? 그것이 예수님 제자의 삶입니다.
왜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그러면 두 번째 질문입니다. 왜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 지키기도 왜 그 많은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지켜야 합니까? 기독교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사도 바울의 영향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자주 나타납니다. 먼저 롬3:28을 봅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의롭게 된다”는 말은 요즘 말로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갈2: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구원은 율법을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힘이 없습니다. 죄를 깨닫게 할 수는 있습니다. 말하자면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사람의 얼굴에 묻어 있는 오물을 보게 합니다. 그러나 오물을 제거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비유하면 건물의 비계와 같습니다. 비계는 건물을 짓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비계가 건물은 아닙니다. 건물이 완성되면 비계는 철거됩니다. 그러면 율법은 왜 있습니까? 롬3:20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필요하지만 우리 죄를 없애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없애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율법으로 고칠 수 없는 본질절인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마귀가 하나님앞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었습니다. “너왜 오늘 그렇게 풀이 죽어 앉아 있느냐?” 마귀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따분합니다. 요즘 제가 할 일이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자니 정말 미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아니, 빈둥거리다니. 네가 얼마나 할 일이 많으냐? 부지런히 다니면서 사람들을 죄짓게 하지 그러냐?” 이때 마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말도 마십시오. 제가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죄짓게 하기 전에 사람들은 벌써 죄를 짓고 있잖아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마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이 스스로 알아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율법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종합적으로 말하면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율법은 구원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와 관계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 율법을 지킵니다. 유대인 학자 요셉 크라우스너(Joseph Klausner)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태어나면서 구원받은 백성이다. 그들은 태어나는 것 자체를 구원으로 본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 기독교의 신학과 유대교의 신학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론에서 출발하지만 유대교는 성화론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느냐가 기독교의 관심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느냐가 유대교의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말한 것은 율법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구원받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 성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레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아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그 백성이 거룩하게 되라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거룩한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죄에 빠집니다. 그래서 율법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닮아 거룩하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도표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십시오.
구원 거룩
예수님 율법(말씀)
믿음으로 행함으로
갈2:16 약2:22
자, 구원은 예수님이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율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을 지키고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하나님을 닮아 더 거룩해 집니다. 제가 미국의 어느 공동묘지에 갔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무덤이 나란히 누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묘비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아가일. 시인, 발명가, 화가, 음악가, 그리고 철학자”. 참 이력이 화려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그 아내가 누어 있었습니다. 묘비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에드너 T. 아가일, 평생 고생만 하다 죽은 에드워드의 아내”. 남편은 시인으로 발명가로 음악가로 명성이 높았지만 아내는 에드워드의 아내로 평생 고생만 하다 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묘비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의 성공은 그냥 된 것이 아니구나. 아내의 희생과 헌신으로 되었구나“. 평생 한 몸으로 살다 간 남편과 아내, 아내의 희생이 남편의 성공을 만들고 남편의 성공 때문에 아내도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부부가 이렇게 살았던 것처럼 우리 영적 생활도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고 말씀을 실천함으로 거룩한 삶에 이르고. 믿음과 행함의 조화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바울은 구원이 시급한 이방인들이 우선 예수믿어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도표를 보십시오.
예수님 바울
유대인 이방인
율법을 지키며 살아라 예수믿고 구원받아라
예수님과 바울의 청중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말씀하시고 바울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유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전도했습니다. 이방인이 우선 할 일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종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믿음과 예수님의 율법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같이 가야 합니다.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만일 구원받지 않았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줍니다. 이 경우에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았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킵니까?
세 번째 질문은 그러면 거룩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마5:19-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가 율법을 지키되 서기관과 바리새인같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바꾸면 은혜가 훈련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가고, 훈련은 은혜로 갑니다. 은혜는 훈련을 낳고 훈련은 은혜를 완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베푸신 호의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피흘리게 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받으면 반드시 갚게 됩니다. 은혜란 말은 헬라어로 “빚”입니다. 빚을 지면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우리는 더 많은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탈무드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랍비님, 우리가 언제 회개해야 합니까?” 랍비가 말했습니다. “반드시 죽기 전에는 회개해야 합니다”. 제자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잖습니까?”. 그때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죽기 전에회개해야 하는 데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회개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이 우리의 마지막 날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까? 매일 회개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면 회개할 때 어떤 근거로 회개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 죄라고 말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춥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앙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된다든지 포로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붙잡히면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에 속박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하나님께 많이 포로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롭습니다.
창22:9절에서 아브람은 이삭을 모리아산에 묶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참으로 눈뜨고는 못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어린 자식을 잡아 칼로 치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자 이삭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말씀으로 결박된 이삭은 말씀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가라” 해서 “가고”, “드리라” 해서 “드리고”. “멈추라” 하니 “멈추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결국 자유케 되었습니다. 신17:19-20절입니다. ”너는 평생 이 율법의 말씀을 네 옆에 두고 읽으라. 그리하면 네 사는 날이 장구하리라“. 다같이 ”옆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네 사는 날이 장구하리라.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요”. 11절, 시119: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여기서 “두었다”는 말은 마음판에 새겼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하루트”입니다. 그런데 “자유”라는 말을 “헤루트”라 합니다.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면 자유를 얻습니다. 결박의 역설입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결박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모든 남자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신자가 주일날 성전에 자신을 결박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날이 그에게 자유롭습니다. 신자는 십일조로 물질을 결박해야 합니다. 그러면 물질에 대해 자유케 됩니다. 십일조는 욕망의 해독제입니다. 요8:31-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만 자유가 임합니다. 진리의 말씀앞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한량없는 은혜, 갚을 수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용운이 말했습니다. “내가 님께 복종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복종합니다. 은혜받으면 자신을 그 은혜에 걸맞는 사람으로 훈련합니다. 요14:21입니다. “나의 게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복종하고 사랑하면 계명지키고 사랑하면 봉사하고 사랑하면 훈련받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율법을 지키십시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십시오. 그러면 행20:32, “그 말씀이 너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아멘. 믿음은 행함으로 가고 행함은 믿음으로 갑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가고, 훈련은 은혜로 갑니다.
마5:17-20 2015.4.26(일)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은 무엇입니까?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앞에 선다면
(1) 정직하게 행했는가?
(2) 율법을 공부했는가?
(3) 가정을 위해 노력했는가?
(4) 구원받기 위해 기도했는가?
종교인(사진).
키파(사진).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 필요없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요일4:18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람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슴이라.
요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왜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은
(1) 거울과 같다.
(2) 비계와 같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 율법을 지킨다.
요셉 크라우스너(Joseph Klausner), “유대인은 태어나면서 구원받은 백성이다. 그들은 태어나는 것 자체를 구원으로 본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
레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아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구원 거룩
예수님 율법(말씀)
믿음으로 행함으로
갈2:16 약2:22
예수님 바울
유대인 이방인
율법을 지키며 살아라 예수믿고 구원받아라
어떻게 율법을 지킵니까?
마5:19-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창22:9, “이에 아브람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신17:19-20, ”너는 평생 이 율법의 말씀을 네 옆에 두고 읽으라. 그리하면 네 사는 날이 장구하리라“.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요”.
시119: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요8:31-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14:21, “나의 게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행20:32, “그 말씀이 너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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