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21-26 2015.5.10.(일)
사랑하고 용서하고
오늘은 어버이주일,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떨어져 예배드리다 함께 예배드리니 참 좋습니다. 가족끼리 모여 오손 도손 사는 것처럼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이 “사랑과 용서”입니다. 경남 창원지방법원에 천종호판사가 있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았습니다. 천판사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가난한 판자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법원에 끌려온 비행청소년들에 대해 남달리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번 영상을 보시겠습니까?(영상).
어떻습니까? 짧은 영상에 나타난 어머니와 아들사이에 많은 상처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술먹고 아들을 때리고 아들은 어릴 때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느 부모와 자녀가 한번도 상처를 주고 받지 않고 삽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자녀만 상처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상처받고 삽니다. 어머니가 술먹고 아들을 때려서 잘못했지만 어머니도 얼마나 상처를 받고 삽니까? 어머니의 상처는 아들에게 이어지고 아들의 상처는 어머니에게 아프게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떠올려야 할 단어가 무엇일까요? 사랑과 용서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도 사랑하고 용서합니까?
살인하지 말라
문제는 용서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이 문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살인하지 말라” 했을 제자들은 아마 마음으로 안도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중 살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게 살인을 쉽게 합니까? 만명중 한 명이나 할까요? 10만명당 한명 할까요? 살인은 극소수입니다. 저도 안했고 여려분도 아마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음의 말씀을 하자 제자들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22절,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처음에 “살인”이야기 할 때 “나는 아니야” 했던 사람들이 “라가, 미련한 놈”하니까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라가”는 히브리말로 “바보, 천치”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다른 사람에게 “바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한번도 “바보”란 말을 하지 않을 것처럼 점잖게 앉아 계시지만 저는 많이 했습니다. 동생들이 많아 어릴 때 동생들에게 많이 했습니다. “천지, 바보, 멍충이, 미련한 놈”, 일본말은 또 어디서 배웠는지 “빠가”라고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살인 이야기를 하시다가 언어 문제로 화제를 바꾸시는 것입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살인이라도 생긴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살인의 외적 행위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 살인의 내적 동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말 한 마디가 살인은 아니지만 이미 그속에 사람을 죽이는 독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만 사람만 죽이지 않으면 살인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입으로는 화를 퍼붓고 마음으로는 몇 번이라도 사람을 죽였으면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다만 말을 조금 거칠게 했을 뿐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으로 미워만 해도, 사람에게 욕설만 퍼부어도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죄는 네 단계를 통해 나타납니다. 먼저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얼굴로 표현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말로 나타나고 마지막에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말로 나타나면 이미 다 된 것입니다. 말로 욕설을 퍼붓고 악담, 저주가 나타나면 이미 살인이 시작된 것입니다.
충격적인 영상이 있습니다. 대전 한밭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실험한 것입니다. 양파 50개씩을 둘로 나눠 각각 다른 방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각각 다른 소리를 들려 주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클래식음악입니다. 다음은 욕설 녹음한 것입니다. 이 소리를 15일동안 계속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15일 후에 비교해 보았습니다. 보시죠(영상).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비록 말 못하는 식물이지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발육이 다릅니다. 식물이 이렇다면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문제는 분노입니다
문제는 분노입니다. 예수님이 살인이야기 하면서 “라가, 미련한 놈”한 것은 살인의 배후에 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살인입니다. “분노가 살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통찰력을 가진 말씀입니다. 심리학자이며 상담가인 미국의 헨리 브란트 박사는 그가 상담한 사람의 문제의 80-90%가 분노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현대로 갈수록 이 분노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에 의하면 분노는 사람을 망치는 가장 큰 흉기입니다. 사람이 분노할 때 위장의 점막은 충혈 되고 운동이 증가되며 위산분비가 많아져서 마침내 위, 장출혈과 궤양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대장염의 96%가 분노 때문이라고 합니다. 분노는 혈관을 갑자기 수축시켜 혈압을 올리므로 뇌출혈등의 위험을 가중시킵니다. 미국의 경우입니다만 존 헌터라는 학자는 어느날 학회에 나가 무슨 발표를 했는 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학설을 공격하자 너무나 분해서 반격을 하려다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원인은 분노로 인한 심장혈관의 순환장애였습니다.
분노는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합니다. 분노는 남을 괴롭게 하기 전에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방울뱀은 극도로 화가 나면 제 몸부터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분노가 그렇습니다. 분노는 남을 향해 퍼붓지만 언제나 손해는 자기가 먼저 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욥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잠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운전시비끝에 상대방 차량을 부숩니다.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 말에 격분하여 여자 친구 차를 들이 받습니다.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몸에 불을 지릅니다. 자기보고 어머니가 창피하다고 했다고 집에 불을 지릅니다. 남을 괴롭히기 전에 나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단편 중에 "93"이란 단편이 있습니다. 큰배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의 선창에는 수송용 대포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움직이다 보니 대포를 묶었던 쇠사슬이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습니다. 그러니 대포들이 여기 저기 굴러다닙니다. 선원들이 필사적으로 선창가로 내려가 제멋대로 굴러 다니는 대포를 붙잡습니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위험은 항상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남에게 쏘려는 대포가 배안에 굴러다니면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있는 적이 더 무섭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가장 대포가 분노라는 대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노가 가장 위험한 내부의 적이다”. 그래서 가장 잘 다스려야 할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말합니다. 잠16:32, “마음을 다시리는 자는 성을 빼앗은 자보다 나으니라".
그러면 왜 우리는 분노합니까? 왜 사람들은 분노심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분노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 때문에 내 뜻을 이루지 못해서 화가 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때문에 내 일생이 망가졌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누구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인의 경우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였습니다. 때가 되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가인은 곡식으로,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때 가인이 안색이 변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성경으로 보면 “가인이 화를 내며 심히 못 마땅해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아벨 때문에 자기가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벨만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 제물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돌로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은 같습니까? 인격이 다르듯이 하나님앞에서 선 존재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고 가인의 제사를 안 받습니까?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다고 아벨의 제사를 받습니까?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모두 개별적입니다.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이렇게 안 살았을텐데”. “우리 부모가 날 잘 가르쳤으면 이렇게 안되었을텐데”. 나이 50, 60이 되어도 부모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못된 것이 조상의 죄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잘못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남의 탓입니다. 강영우는 부모 죽고 눈 멀고 갈데 없어 맹아원까지 갔어도 미국에서 박사되고 백악관에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조승희는 수재들만 가는 콜롬비아 공대 들어갔지만 총기난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누구 때문에 불행한 것 아닙니다. 부모때문에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탓 그만 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가 마음에 안 들어서 화가 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사람들앞에 나타나기를 좋아하고 우쭐하고 영웅심리로 가득한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갑자기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어도 싫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100% 만족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면 나를 내가 지었습니까? 내 기질, 혈액형, 성향, 성격, 내가 만든 것입니까? 아니잖습니까? 잠16:4입니다.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각자 목적에 맞게 지음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뜻이 있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마11: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내 멍에”를 원문의 의미로 풀면 “너 자신에게 딱 맞는 멍에”입니다. 하나님은 똑같은 멍에를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개성과 인간성에 딱 맞는 멍에를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멍에가 가볍고 쉬운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기질, 성격, 혈액형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나의 장점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나의 단점을 통해서도 일합니다. 그러니 내가 나 때문에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화를 낼 그 시간에 더 잘하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해서 화가 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중에 그런 분이 많습니다. 부부는 가시나무새처럼 늘 붙어 있기 때문에 다툴 기회도 많습니다. 왜 부부싸움하는지 아십니까? 어떤 심리학자가 말했습니다. “부부는 죽을라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살라고 싸운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잘 살아 보려고 하니까 다투는 것입니다. 부부의 문재는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부부의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부부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그러나 사랑할 줄 몰라 이혼한다”. 결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사랑을 배워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에서 어떤 사람을 배워갈까요?
두 가지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과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프롬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을 성숙한 사랑,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을 유아적인 사랑이라 불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숙한 사랑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한 사랑이고 미숙한 사랑은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입니다.
미숙한 사랑 성숙한 사랑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
부부가 분노하고 다투는 원인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할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랑이 아니라 미숙한 사랑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 말을 안 들어주고 자기를 배려하지 않았다고 때문에 화내고 다툽니다. 이것은 여자보다 남자가 조금 더 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나이들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딸, 돈, 친구, 그리고 찜질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나이들어 필요한 것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누라, 아내, 집사람, 애엄마, 와이프가 필요합니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아이가 됩니다. 더 미숙해집니다. 그러니 집에서 남편들을 많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남자들에 대해 아내들은 말로 상처를 많이 줍니다. 대개 화를 잘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뒤끝이 없어요”. 며칠전에도 한 분이 자기는 자주 화가 내지만 뒤끝이 없어서 금방 풀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엽총도 뒤끝이 없어요“. 그렇습니다. 미사일도 뒤끝이 없고 원자탄도 뒤끝이 없습니다. 한방이면 끝납니다. 뒤끝없다는 말을 자랑하지 마세요. 이미 분노가 폭발하여 상대방에게 상처준 다음에 뒤끝이 없다면 무엇 합니까?
예배가 해답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노에서 한 단계 더 나갑니다. 23절입니다.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번에는 예수님은 예배 이야기를 꺼냅니다. 왜 예수님은 갑자기 예배 이야기를 꺼내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살인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 다음엔 분노 이야기를 했습니다. 분노가 살인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분노와 예배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분노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화목입니다. 26절 보실까요? 마5:26,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이 예배를 말하면서 동시에 “화목”을 말씀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좌로 인해 하나님과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뤘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폴 밀러란 사람이 참 잘 말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분노하고 화내고 다투고 싸울 수 밖에 없는 데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은혜받는 것입니다. 많이 받아야 많이 줍니다. “그 사랑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시간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장 파울 리히터란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도 은혜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받아 먼저 우리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렇게 계속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차고 넘처 용서하는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예배하고 용서하기 위해 에배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예배하고 사랑하기 위해 예배합니다. 예배는 내가 사랑받는 통로면서 또한 남을 사랑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23절,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어느 교회 장로님이 노회일로 주일날 다른 교회를 방문했답니다. 마침 예배시간에 성찬식이 있었는 데 자리에 앉아 보니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장로님이 거기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자리로 떨어져 성찬을 받았습니다. 예배후에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왜 오늘 옆 자리에 계신 장로님과 성찬을 하지 않았습니까?”. 장로님이 대답했습니다. “예, 제가 그 사람과 예전에 돈 거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직하지 않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멀리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길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 앉아서 성찬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면 그 분이 가롯 유다보다 못합니까?” 이것이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옆 자리에 앉을까 봐 신경이 쓰여 집니까? 예배는 바로 그 나쁜 감정을 은혜로 치유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적대심을 용서로 바꿔줍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과 용서로 살아가겠습니까?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것이 우리가 가정에서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살아가는 산상수훈의 원리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마5:21-26 2015.5.10.(일)
사랑하고 용서하고
천종호판사(영상).
살인하지 말라
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양파(영상)
문제는 분노입니다
욥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잠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우리안에 있는 가장 큰 적은 분노의 적이다.
잠16:32, “마음을 다시리는 자는 성을 빼앗은 자보다 나으니라".
왜 분노하는가?
(1) 다른 사람 때문에 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2) 자기 존재가 마음에 안 들어서 화가 난다.
잠16:4,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
(3) 다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해서 화가 난다.
부부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그러나 사랑할 줄 몰라 이혼한다.
미숙한 사랑 성숙한 사랑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
예배가 해답이다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6,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폴 밀러, “사랑은 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장 파울 리히터,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기 위해 기도한다”.
마5:23,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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