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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벧전3:1-8 믿지 않는 남편, 믿는 남편 2015.5.24(일)

벧전3:1-8 2015.5.24()

믿지 않는 남편, 믿는 남편

가정의 달 넷째 주일, 오늘은 부부주일입니다. 여러분은 금주 목요일, 521일이 부부의 날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 날이 부부의 날이 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이 큽니다. 21일은 둘(2)이 하나(1)가 되는 날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가정연구소인 하이 패미리가 2003년부터 부부의 날로 지켜오던 것을 2007년 국회가 받아 법정기념일로 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521은 날자와 함께 그 의미가 매우 성경적입니다.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라”.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부부는 하나가 되었습니까? 오래전에 어떤 부인이 병석에 눕게 되었답니다. 막 목숨이 끊어지는 데 누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부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그래서 남편이 아내 곁으로 다가가 귀에다 대고 말했습니다. “여보, 사랑해”.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인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 말을 지금 하면 어떻게 해. 내가 죽기 전에 했어야 하지 않아?” 그리고 다시 살았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살아난 것입니다.

 

몇 년 전 저희 부부가 어떤 부부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강사 목사님이 부부가 자주 해야 할 사랑의 언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 번째가 여보, 미안해입니다. 사실 부부처럼 서로 미안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고생시켜서 미안하고, 약속 못지켜서 미안하고,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하고, 쪼들려서 미안하고, 미안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다음은 당신 마음 다 알아입니다. 부부의 문제는 서로 알아주지 못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서로 알아주기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당신, 사랑해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합니다. “내 속으로만 알고 있으면 되지. 그것을 어떻게 말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말로 해야 마음이 전달되고 말로 해야 사랑이 솟아납니다.

 

오늘 뜻깊은 부부 주일에 저는 여러분을 베드로 사도가 말한 행복한 가정으로 안내하고자 합니다. 베드로의 말씀이 우리에게 좋은 것은 베드로는 다른 사도와 달리 가정을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열 두 제자중 유일하게 결혼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베드로는 가버나훔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할 때 예수님을 모시고 와서 장모를 치료했습니다. 장모가 있었다는 것은 아내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이 어린이를 안고 하나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 아이는 베드로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딸이 늘 아빠를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결혼의 경험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부부의 문제를 다룹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지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크게 두 대상에게 말합니다. 먼저 믿지 않은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말하고, 다음 믿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먼저 믿지 않은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벧전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교회안에서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 혼자 교회 나오거나 믿는 아내의 남편이 믿지 않고 돌아가시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믿는 아내는 자기 남편 돌아가셨다는 말도 차마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픈 데 교회에 알리지 못하는 심정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혹시 믿지 않고 돌아가셨어도 교회에 알리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세상의 유일한 기관입니다. 가끔 남편이 교회 안 나와 교회에서 떳떳하게 신앙생활 못한다는 분도 있습니다. 이 분들이 가장 부러운 것은 부부가 아이들 손잡고 함께 교회오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 저렇게 해보나?” “우리 남편은 언제 저렇게 교회 나올까?”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도 본래 믿었습니까? 130년전으로 돌아가면 이 나라에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먼저 믿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혹시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탐관오리의 대명사 삭개오도 어느날 예수믿고, 숨이 끊어지던 오른편 강도도 십자가에서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혹시 우리 가정이 믿고 그나마 3, 4, 5대가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는다면 앞으로 구원의 축복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부르쉘이란 사람이 한 말을 좋아합니다. “모든 성인에게는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 그렇습니다. 지금 안 믿는다고 평생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믿지 않은 남편의 가장 적합한 전도자는 누구일까요? 아내입니다. 왜 아내가 가장 적합한 전도자입니까? 무엇보다 아내와 남편은 운명을 같이 합니다. 고후6:14은 그것을 멍에를 같이 멘다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멍에를 함께 멘다는 말은 소나 말의 목에 나무를 씌워서 수레나 쟁기를 함께 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척박하기 때문에 소 한 마리가 쟁기를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보통 두 마리가 함께 끕니다. 엘리사도 12겨리 소를 몰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한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것처럼 부부는 인생의 멍에를 함께 짊어집니다. 멍에는 하나인데 소가 둘이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이 맞지 않으면, 걸음걸이가 같지 않으면, 방향이 같이 않으면 넘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이 다르면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같은 신앙, 같은 가치, 같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복종하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여자나 남자나 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귀하게 컷는 데 왜 여자만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느냐? 아마 여자들은 불평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복종하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가 열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창조의 질서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전11:3절입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실 때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제일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밑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 밑에 남자, 그 밑에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지배를 위한 질서가 아니고 행복을 위한 질서입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은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은혜를 주셨습니다. 남자에게는 다스림의 은혜를 주시고 여자에게는 섬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다스림의 은혜가 더 큰 은혜가 아닌 것처럼 섬김의 은혜가 더 작은 은혜가 아닙니다. 다스림의 은혜에 리더쉽의 축복을 주셨지만 또한 책임도 함께 주셨습니다. 섬김의 은혜에 복종의 의무를 주셨지만 또한 사랑의 보상을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초년엔 연인이고, 중년엔 친구이며, 노년인 간호사다”. 여성의 섬김의 일생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일생 섬기기 때문에 자식들이 평생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섬김의 복입니다.

 

둘째 남편에게 말이 아닌 행실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벧전 3:1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했습니다. 믿는 아내가 실수하기 쉬운 것은 자칫 말만 하고 행실의 본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들이 감동받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벧전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여기서 보다라는 말은 흘낏 보는 것이 아니라 예의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지 않은 남편들은 믿는 아내의 말을 예의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행실을 예의주시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남편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아내를 따라 교회 나오는 남편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아내들의 실수할 또 하나의 가능성은 남편을 영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기도하며 영적으로 사는 데 남편은 세상에 찌들어 불쌍하게 산다며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아내에게 존중받지 않으면서 교회 나오는 남편은 없습니다.

 

어떤 교회 권사님 간증입니다. 이 권사님의 남편이 조그만 중소기업 사장으로 돈은 잘 버는 데 교회는 가지 않고 허구헌날 술만 마시고 들어 옵니다. 잔소리 하다 하다 지쳐 어느덧 미웁고 무시하는 마음까지 생겨났습니다. “나는 이렇게 매일 기도하고 사는 데 저 인간은 밤낮 술만 마시고 사니 마귀가 따로 없어“. 그러면서 아이들앞에서도 아빠를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무슨 일로 회사에 갔답니다. 소파에 잠시 앉아 있는 데 부장이 들어오더니 90도로 절을 하면서 결제서류를 내밀더라는 것입니다. 한참 있다가 비서가 차를 가지고 왔는 데 사장님, 커피 드시겠습니까?” 하면서 조선시대 왕앞에 무수리처럼 고개를 숙입니다. 조금 있다가 회의가 시작되었는 데 떠들썩하다가 남편이 들어가자 김정은이 들어오듯 다들 고개를 숙입니다. 이 권사님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우리 남편이 이렇게 존경받는 존재였나? 그렇게 회사에서 존경받고 집으로 와 하인취급을 받았다면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남편을 비서만큼이라도 대하는가? 만일 비서만큼 대하지 않을 때 남편이 나보다 비서를 더 좋아해도 나는 할 말이 없구나“. 그때부터 이 권사님이 남편에게 잘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비서보다는 잘해야지 굳게 결심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편이 일찍 들어오더니 술도 점점 적게 먹습니다. 어느날 주일아침인데 평소와 달리 아무데도 가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는 아내 뒤에다 대고 말합니다. “어이, 나도 한번 교회 가볼까?” 20년만에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교회를 따라 왔습니다. 이 부인은 남편에게 예수믿으라는 말 한마디 안 했지만 남편를 사랑함으로 그가 스스로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면 그때부터 마음이 움직입니다.

 

세 번째는 외모를 가꾸지 말고 내면을 가꿔야 합니다. 3-4절입니다. 벧전3:3-4,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니라”. 남편을 구원할 아내는 정결해야 합니다. 외모로 자신을 꾸미지 말고 내면세계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믿는 여성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성경이 잠31장입니다. 여기에 현숙한 여인에 대하여 나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잠31장에 나타난 현숙한 여인은 한번도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도나 예배나 믿음이나 영적인 삶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부지런한 삶과 부드럽고 유쾌한 성품과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사랑받는 모습만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이 29절입니다. 31: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덕행있는 여자가 되는 것, 정결하고 좋은 성품에 남편과 자녀에게 잘하고 사람들에게까지 칭찬받는 여자, 그런 여자를 아내로 둔 남자가 교회 안나올까요?

 

그런 여자를 보고 그 남편은 어떻게 할까요? 31:11절입니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남편들이 아내를 믿으면 아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전도 전략을 바꿔야 합니다. 긴 말로 설득해서 남편이 하나님 믿게 하는 것보다 먼저 남편이 나를 믿게 해서 그 다음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게 해야 합니다. 물론 그래도 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때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남편을 통해 나를 훈련시키는구나 하고 기다리고 기도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때 아내가 반드시 기억할 말이 있습니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의 아내 룻 그래함이 불신 남편을 둔 여성들에게 한 말입니다. “남편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내 일입니다”. 이 말을 패러디해볼까요? 아직도 안 믿는 남편를 가지신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이 하나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할 일은 그를 지금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멘. 이와 같은 꿈을 가진 아내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을 소개합니다. 미국의 조 배리가 쓴 <믿지 않는 남편의 아내들에게>라는 책입니다(사진). 서점에 있습니다.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믿지 않는 남편을 향해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믿는 남편을 향해서도 말합니다.

 

믿는 남편에게

그것이 7절입니다. 벧전 3:7,“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려 함이라”. 모든 것이 상대가 있습니다. 아내가 믿지 않은 남편에게만 잘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남편도 아내에게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만들어 주자 아담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와를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그래야 네가 사랑할 거 아니냐?”. 아담이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예요. 착해요. 어떻게 이렇게 착하게 만드셨어요?”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래야 네가 아껴줄 거 아니냐?” 아담이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가만히 보면 하와가 맹한 데가 있어요. 왜 맹하게 만드셨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래야 하와가 너같은 놈을 사랑할 거 아니냐?” 하시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짝지워 주신 부부는 아름답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가끔 맹하고 고집세고 아프고 상처받고 어리석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 우리가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용서하지 않겠습니까?” 상대가 완전해서 나쁜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같은 아내를 두었다면 남편들이 왜 아내와 다투겠습니까? 요셉같은 남편을 두었다면 아내들이 왜 남편 때문에 걱정하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니까 우리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세 가지를 하라고 말합니다.

 

첫째 지식을 따라했습니다. 이 말은 아내를 알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생일, 고향, 혈액형을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감정을 알라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을 따라입니다. 여자는 남자와 차별되지 않지만 구별됩니다. 남자가 일중심이라면 여자는 사람중심입니다. 남자가 성취지향적이라면 여자는 관계지향적입니다. 남자가 인정받기를 좋아한다면 여자는 이해받기를 좋아합니다. 남자가 모험적이라면 여자는 안정적입니다. 남자가 이성적이라면 여자는 감성적입니다. 남자가 논리적이라면 여자는 직관적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대뜸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길게 말하면 용건만 말해합니다. 직장에서는 여자 직원의 이야기는 시시콜콜 다 들어주면서 아내가 이야기하면 뭐야. 용건만 간단히 해합니다. 어떤 때는 아내가 비서보다도 못합니다. 아내는 마음을 말하는 데 남편을 말만 듣기때문입니다. 아내의 말에서 마음과 감정에 듣는 훈련이 남편들에게 필요합니다.

 

1824년 프랑스 베르사이유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루니엘이라고 하는 귀족 부인이 저택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남편과 사소한 말다툼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남편이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질렀습니다. “그만하고 입닥쳐”. 그 말을 들은 부인이 뚝 말을 그쳤습니다. 며칠동안 식사도 하지 않고 잠을 자지 않고 입도 열지 않았습니다. 며칠 그러다 말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일년이 지나도 부인의 말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결국 부인은 30년이 지나도록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남편의 한 마디가 부인을 실어증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입술의 30초가 마음의 30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 말이 가슴에 30년동안 맺혀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동거하고했습니다. 믿는 남편이 아내에게 할 두 번째는 동거입니다. 여기서 동거는 헬라어로 순이케오입니다. “함께입니다. “오이케오이코스”, 집입니다. 그러니까 집에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집에 함께 안 사는 부부가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함께 산다는 것이 밥을 같이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자식을 키운다는 말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단지 한 지붕밑에 산다고 동거가 아닙니다. 동거하지만 별거한 부부가 많습니다. “별거별거 아닌 것 갖고 따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의 동거의 의미를 잘 나타낸 말씀이 8절입니다. 벧전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여기에 마음을 같이 하며 동정하며 불쌍히 여기며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 compassioncom함께”, passion, 아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장 가슴아프는 것은 언제인지 아십니까? 어릴 때는 부모가 돌아가실 때입니다. 또 부모로서는 자식이 아프거나 죽을 때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부부에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아프거나 죽을 때입니다.

 

영국의 영성가 C.S. 루이스가 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만 그 분이 <헤아려본 슬픔>이란 책을 썻습니다(사진). 자기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책입니다. 루이스는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헬렌 조이 그레셤(Helen Joy Gresham)이라는 여성을 만나 59세에 결혼했습니다. 결혼할 때 그레셤은 암으로 투병중이었습니다. 루이스가 그레셤이 암환자인 것을 알고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다 2-3년만에 아내가 죽었습니다. 아내가 아픈 것도 알았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막상 아내가 죽자 그렇게 허전하고 슬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슬펐는가 하면 하나님이 과연 살아 있는가 의심할 정도로 슬펐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믿었던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고 멀리 떠나갔다. 하나님이 내 면전에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그렇게 낙심하고 슬퍼하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그 자신이 쓴 대로 옮기겠습니다. “사별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단절이 아니요, 마치 신혼여행이 그 단계중 하나이듯이 정상적인 결혼 단계중의 하나다. 우리는 그 단계까지 결혼생활을 충실히 잘 살아야 한다”. 사별은 부부의 관계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가 부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리 둘이 한날 한시에 죽어 여기 나란히 누워 있다고 해도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이별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날 한 시에 죽어도 이별이란 점에서는 같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사별까지, 죽음의 이별까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저도 지난 주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평소에 제 집사람에게 고혈압이 있긴 했지만 갑자기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뇌사진을 찍었는 데 뇌에 많은 것들이 보였습니다. 의사가 안좋다. 위험하다”. 해서 곧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 일주일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 왜 내가 진즉 아내를 보살피지 않았을까?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데려갔더라면”. “평생 목회하는 나를 따라 고생만 하고 이제 얻은 것은 병이구나. 내가 이대로 계속 목회를 해야 할까? 아내가 병들어 누어 있는 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이 자책이요 모든 것이 통한이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나 때문에 아내가 병이 생기다니. 평소에 아내가 했던 평범한 일상이 다 기적만 같았습니다. 아침 식사, 부엌일, 다리미질, 머리 손질, 자녀들 이야기,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가를 알았습니다. 여러분도 아픈 아내를 보고 나 때문이야자책한 적 있습니까? 여러분도 아픈 남편보고 가슴 아파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내나 남편이나 병들어 누우면 모든 행복이 다 사라집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보고 현재를 희생시키지 말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아내와 남편을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다행히 병원에서 아직은 큰 병이 아니니 약을 먹으면 된다고 해서 퇴원했습니다. 앞으로 저의 집사람이 교회 일 많이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가정에 더 신경을 쓸지 모릅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벧전 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아내와 남편은 서로 불쌍히 여기며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가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입니다. 부부의 신비는 이 세상의 인연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연이 죽음 이후까지 이어집니다. 성경은 그것을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한 무덤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부부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가까워도 부모와 합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남남인 데 한 무덤속으로 갑니다. 평소에 사이가 안 좋으면 무덤속에서도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잘 지내야 합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배가 물속에 빠져 모든 사람들이 보트에 옮겨탈 때 보트에 안타고 함께 죽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스트라우스라는 부부였습니다. 배가 전복되자 어린이와 여자만 보트에 태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트라우스는 자기 부인을 보트에 태워 얼른 가라고 손을 소리쳤지만 부인은 남편을 바라보다가 보트에서 내렸습니다. 그때 부인이 한 말이 이 말입니다. “아니예요, 난 보트에 타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함께 많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이제 우리는 늙었고, 난 당신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어디론 가든 나는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그리고 그들은 손을 꼭 잡고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은 자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우리는 함께 한다“. 이것이 생명의 유업을 함께 할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만나 저 천국까지 함께 갈 사람, 그러기에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올 때도 같이 왔으니 갈 때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과 육이 한 몸입니다. 세상에서는 육으로 함께 살고 천국에서는 영으로 함께 살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7,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오늘 이 뜻깊은 부부 주일에 안 믿는 남편을 모신 아내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천국까지 함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 남편이 있습니까? 아내를 귀히 여기 십시오.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의 달에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벧전3:1-8 2015.5.24()

믿지 않는 남편, 믿는 남편

부부의 세 언어
(1) “여보, 미안해

(2) “당신 마음 다 알아

(3) “당신, 사랑해

 

믿지 않는 남편에게 

벧전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아내가 남편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

(1) 복종해야 한다.

고전11:3“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남자에게는 다스림의 은혜를 주시고 여자에게는 섬김의 은혜를 주셨다.

 

프란시스 베이컨, “아내는 남편에게 초년엔 연인이고, 중년엔 친구이며, 노년엔 간호사다”.

 

(2) 말이 아닌 행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

벧전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외모를 가꾸지 말고 내면을 가꿔야 한다.

벧전3:3-4,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니라”.

31: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31:11,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룻 그래함, “남편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내 일입니다”.

 

조 배리, <믿지 않는 남편의 아내들에게>(사진)

 

믿는 남편에게

벧전 3:7,“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려 함이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법

(1) “지식을 따라

 

남자가 일중심이라면 여자는 사람중심이다. 남자가 성취지향적이라면 여자는 관계지향적이다. 남자가 인정받기를 좋아한다면 여자는 이해받기를 좋아한다. 남자가 모험적이라면 여자는 안정적이다. 남자가 이성적이라면 여자는 감성적이다. 남자가 논리적이라면 여자는 직관적이다.

 

(2) “동거하고

 

벧전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C.S. 루이스, <헤아려본 슬픔>(사진).

 

사별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단절이 아니요, 마치 신혼여행이 그 단계중 하나이듯이 정상적인 결혼 단계중의 하나다. 우리는 그 단계까지 결혼생활을 충실히 잘 살아야 한다”.

 

(3)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