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27-32 2015.5.17.(일)
순결과 정절
가정의 달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성인주일 혹은 부부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어떻습니까? 결혼한 분들은 어떤 아내, 남편과 함께 살며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들은 어떤 배우자를 꿈꾸십니까? 옛날 어떤 청년이 우연히 소원성취를 들어주는 요술항아리를 발견했답니다. 청년이 요정을 불러내자 요정이 나와 말했습니다. “주인님, 무슨 소원을 들어드릴까요?”. 청년은 세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나는 돈과 여자와 결혼을 원합니다”. 청년의 소원을 들은 요정이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실래요?” 청년이 생각하다가 했습니다. “내 소원은 돈, 여자, 결혼이요”. 그 말을 들은 요정이 “알았습니다” 하더니 곧 소원이 이루어졌는 데 청년은 돈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완벽한 배우자가 있을까요? 한 노처녀가 결혼 상대자를 찾기 위해 결혼 상담소를 찾아갔답니다. 상담원이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을 컴퓨터에 입력해 보라고 말하자 노처녀가 이렇게 썼습니다. "키는 별로 크지 않고 날마다 정장을 하는 스마트한 대상, 그리고 걷는 걸 즐기는 건강한 상대를 찾음“. 그러자 컴퓨터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찾는 가장 이상적인 상대는 팽귄입니다." 날마다 정장하고 걷기 좋아하는 것은 펭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사람을 찾아서 결혼을 해도 결혼생활을 위협하는 문제들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성적인 문제입니다. 며칠전 한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나라 미혼 여성중 절반 가량이 3명 이상의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신세대 주부 60%가 결혼후에도 남자친구를 원한다는 통계입니다. 참으로 믿고 싶지 않은 통계였습니다. 25-35세 기혼 여성 7백58명과 18-28세 미혼여성 9백80명 등 전국 1천7백58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신세대 주부의 22%가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으며 41%는 현재 남자친구가 없으나 사귀고 싶다고 응답했습니다. 63%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세대 주부 중 남자친구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답한 사람은 28%,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한 사람은 8%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혼했지만 남자친구가 있다고 응답한 주부는 20대가 27%, 30대가 18%였습니다. 물론 남자친구가 있다고 반드시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친구관계로 지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 한 사람만 바라보던 기존의 결혼의 풍속도가 완전히 바뀐 것은 분명합니다. 남편들의 통계는 제가 못 보았지만 아마 아내들보다 덜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남편과 아내외에 다른 이성으로 만나고 있다면 그 가정은 과연 건강한 가정이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염려는 지난 1월, 간통죄의 위헌 판결과 함께 우리 사회에 큰 잇슈로 등장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성과 사랑은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국가가 하라 하지 말라 간섭할 시대는 지났다면서 간통죄를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소위 간통죄는 국민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사생활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입니다. 결혼과 성 문제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형벌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 헌재의 설명입니다. 헌재의 위헌 판단으로 그나마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성도덕의 방파제가 무너졌습니다. 그러자 즉각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혼자 소개 프로그램이 나타났고 한 인터넷 프로그램은 며칠만에 회원을 2300명 모았습니다. 과거에 간통죄로 형을 받은 사람은 국가를 상대로 무죄를 주장하며 오히려 배상까지 받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치판단의 기준이 헷갈립니다. 우리 나라 헌법재판소는 그렇게 판단했지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오늘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재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간음하지 말라
먼저 오늘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27절입니다. 마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7절은 예수님 자신의 말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 출20:14, 신5:1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구약의 말씀에는 “하라”와 “하지 말라”가 있는 데 “하지 말라”가 1.5배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 “하지 말라”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상숭배하지 말라. 둘째 살인하지 말라. 셋째 간음하지 말라. 우상숭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으며 다른 존재는 절대 신이 아닙니다. 살인은 사람과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간음은 남녀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둘은 결혼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갑니다. 그런데 간음은 가정을 깨고 하나님의 거룩을 깨뜨립니다. 그 중에서도 간음은 종류도 많고 처벌도 무거웠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간음은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이 있는 다른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남자나 여자 모두 다 돌로 쳐 죽였습니다. 요8장에 나오는 여인이 이 경우입니다. 둘째는 제사장의 딸이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많은 사람 앞에서 참혹하게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유는 제사장은 백성의 영적 지도자인데 지도자가 가정교육을 잘못시켜 백성을 오도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약혼한 처녀와 불륜 관계를 맺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도 두 사람이 다 돌에 맞아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이 그럴 상황에 있었습니다. 넷째는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경우입니다. 소위 원조교제입니다. 아직 어려 도덕적 판단을 못하는 어린 소녀이기 때문에 이 경우는 남자만 처벌하고 어린 소녀는 살려주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창녀와 성관계를 맺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도 발각되면 둘 다 다 죽였습니다. 돌로 치거나 화형에 처하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습니다. 죄인을 인분통에 넣고 목에다 수건을 매고 골짜기에 죽을 때까지 굴렸습니다. 그래서 가장 치욕적으로 죽었습니다.
또 하나가 있는 데 그것이 동성연애입니다. 성경은 동성연애, 소위 호모섹스를 엄청나게 큰 죄악으로 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 죄로 망했고 성경에 수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롬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여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이 동성연애입니다. 동성연애는 인류가 시작될 때부터 예수님 시대인 로마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인류를 망하게 한 악의 꽃입니다. 동성연애가 안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기능도 다르고 목적도 다릅니다. 동성끼리는 친구가 될 수는 있어도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동성연애는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가져옵니다. 동성끼리 결혼하면 절대 아기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지난주 설교한 것처럼 우리 나라 출산율은 1.15명으로 세계 229개 국중 네 번째 입니다. 만일 우리 나라에 동성연애가 인정되고 조장되면 인구증가는 원천적으로 막혀 나라는 자동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도 동성연애는 각종 질병을 유발합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우리 나라 AIDS에 감염된 환자의 43%가 동성연애에 의한 것입니다. 중남미지역의 약 160만 명의 에이즈 환자도 그 절반이 동성연애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동성연애는 기질이 아닙니다. 가끔 이렇게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 “나는 선천적으로 동성연애자로 태어났다. 생리적으로도 그렇고 기질적으로도 그렇다”. 실제로 남성의 약 5%, 여성의 2.5%는 동성애적 기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질이 성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남자중에 여자같은 남자가 있고 여자중에 남자같은 여자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남자이거나 여자인 것은 아닙니다. 기질은 기질이고 성은 성입니다. 자신들이 타고난 기질을 이유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에 의하면 남자안에 여자 있고 여자안에 남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100% 남자, 100% 여자는 없습니다. 설령 다른 기질이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기질로 우리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로서 잘 살고, 여자로 내어났으면 여자로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오는 6.9일은 우리가 꼭 기억할 날입니다. 서울시가 서울광장에서 소위 동성애자들의 축제인 “서울퀴어문화축제”를 허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서울시가 성소수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허용했지만 그 결과 이 나라에 동성애문화를 조장하여 매우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저는 한국기독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 단호하게 이 행사를 반대합니다. 그리고 그날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현장에 나가 분명히 반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동성연애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연애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나 행동은 고쳐야 합니다. 오늘 27절에서 성경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이 간음을 반대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지적하신 더 큰 간음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입니다. 외적으로 나타난 불륜의 행위보다 더 큰 문제는 내적으로 숨겨진 음욕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있는 한 언젠가 간음이라는 행위는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욕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우리안에 있는 있는 성적 본성을 기본적으로 인정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적인 본성을 주셨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성적 본성은 그야말로 본성입니다. 타고난 것입니다. 본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본래 좋은 것입니다. 본래 나쁜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좋은 것인데 나쁘게 쓰니까 나쁘게 되는 것입니다.
성적 본성과 음욕은 다릅니다. 지나가는 여성들이 “아름답다” 느끼는 것은 음욕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을에 빨간 감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아예 막대기를 들고 감나무에 올라가 터는 것이 욕심입니다. 남자나 여자를 보고 마음이 끌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내가 차지해야겠다“하고 행동을 옮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몸에 대해 두 가지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헬라적 생각과 히브리적 생각과 입니다. 헬라적 생각은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몸에 대한 혐오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육체를 “소마”라고 하는 데 “소마”는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감옥”, “조개껍질”, “무덤”과 같은 의미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영혼을 감금하고 있는 동굴과 같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진정한 해방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금욕주의가 구체적인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수도원운동입니다.
수도사들에게 가장 참기 힘든 유혹은 육신의 정욕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혹을 이기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으로 안되면 나무나 풀같은 것을 태워 나온 재를 물에 타서 마셨습니다. 그것도 안되면 가시로 만든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쳤습니다. 모든 죄가 몸에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골2:23에 그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여기서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골2:21에는 금욕주의의 세 가지 요소가 나옵니다.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붙잡지 말라”는 세상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맛보지 말라”는 음식을 절제하거나 안먹는 것입니다. “만지지 말라”는 성적인 관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금욕주의를 발전시켜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5세기의 성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젊을 때 방탕에 빠져 성적인 부도덕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생아를 낳기도 했습니다. 먼 훗날 그가 하나님께 돌아온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원죄는 성적 관계를 통하여 유전된다. 성은 악한 것이다. 성이 필요하다면 다만 출산을 위해서만 필요하다.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성은 모두 죄악이다”. 그래서 어거스틴 이후의 기독교는 “성은 나쁜 것, 성은 죄악된 것, 성은 원죄의 씨앗”.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가끔 결혼하지 않고 살겠다는 사람중에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나는 평생 마리아처럼 깨끗하게 살고 싶어”. 그래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있어서 혼자 살 수 있고 신부나 수녀처럼 소명을 받아 혼자 살 수 있지만 독신주의는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미국의 코미디언 크리스록이 사람들을 웃기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혼자 외롭게 살겠어요? 결혼해서 지겹게 살겠어요?”. 장경동목사님이 쓴 책에도 “결혼하면 괴롭고 안하면 외롭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괴롭지 않으려고 혼자 살면 대신 외롭습니다. 어느 쪽이 더 큰 고통일까요? 괴로운 것이 더 큰 고통입니까? 외로운 것이 더 큰 고통입니까? 하나님은 외로움을 더 큰 고통으로 보셨습니다. 창2:18절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혼자 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을 사용하지 않고 고고하게 사는 것이 거룩이 아닙니다. 성은 필요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쁜 것을 우리에게 주셨겠습니까? 그래서 탈무드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의 이혼사유중 부부가 함께 잠을 안자도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학파에 따라 기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샴마이학파는 2주였습니다. 힐렐 학파는 한 주였습니다. 힐렐학파가 더 보수적입니다. 부부간에 일주일동안만 잠을 같이 안자도 이혼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다만 예외가 있는 데 율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만 부부가 40일간의 떨어져 잘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적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해도 아무 때나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성은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 남편과 아내사이에 사용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을 보여주신 말씀이 창2:24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기에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성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에 나온 두 가지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법적 결합입니다. 부모를 떠났다는 말은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독립적이며 책임적인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법적 가정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삽니다. 육체적 결합은 하고 책임은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 사랑이 아닙니다. 본회퍼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일이고 결혼은 하나님의 일이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이 이르지 않는 사랑은 아직 사랑이 아니다. 그 속에 책임이없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그렇게 결혼하면 정서적 유대관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연합”입니다. “그 아내와 합하여”할 때 “합한다”는 말은 본드같은 아교질로 짝 달라 붙는 것을 말합니다. 결혼이라는 법적인 관문을 통과한 부부가 가져야 할 심리적, 정신적 결합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드디어 나오는 것이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도표로 그릴 수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
법적 관계 마음의 관계 육체적 관계
(결혼) (사랑) (성)
성경이 제시하는 이 순서를 따라 미혼자가 이렇게 사는 것을 순결이라고 하고 기혼자가 그렇게 사는 것을 정절이라고 합니다. 미혼자는 사귀는 사람이 있어도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통과하여 사랑으로 연합된 후에 육체관계를 가지는 것, 그것이 성경이 가르친 삶이요 기혼자가 그 과정을 거쳐 하나님이 맺어준 상대와만 관계를 맺는 것을 정절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매우 보수적으로 가르치는 순결과 정절, 이것을 회복해야만 이 땅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다.
눈과 손을 조심하라
그런데 이렇게 순결과 정절을 지키며 사는 것이 성경의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꼭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왜 원칙이 있고 방향이 있는 데도 그렇게 못 사는가 하고 보면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29절이고 또 하나는 30절입니다. 먼저 29절을 볼까요? 마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 30절, 마5:30,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에 두 가지 지체가 나옵니다. 눈과 손입니다. 먼저 눈이 나오고 다음 손이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적인 죄뿐 아니라 모든 죄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우리의 지체를 타고 행동에 이르게 됩니다. 처음에는 눈을 통해 시작되고 마지막엔 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성적인 문제가 생기는 지 아십니까? 우리가 나쁜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불량 인터넷, 불량 비디오, 불량 영화 이런 것들이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쇼핑 센터 앞을 지날 때 이상한 잡지를 봅니다. 밤늦게 이성친구와 만납니다. 저녁 늦게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나쁜 것은 나쁜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눈입니다. 시119:37절입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괴롭게 할 때 요셉이 했던 방법을 아십니까? 창39:10절입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다같이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요셉이라고 감정이 없었겠습니까? 당시 요셉의 나이는 17세를 갓넘은 청소년이었다고 봅니다. 피끓는 청소년이 유혹의 현장에 있으면서 유혹을 이기기란 불가운데 있으면서 타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옷을 다 벗고 그 방에서 뛰어 나왔습니다. 현장에서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죄를 이기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죄를 이겨야지 하면 집니다. 자기가 어떤 죄에 자주 넘어지는지? 술이면 술, 노름이면 노름, 게으름이면 게음 구체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성적인 죄도 내가 무엇에 약한가? 내가 무엇에 자주 넘어지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은 사울때문에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밧세바때문에 범죄했습니다. 이유가 딱 하나입니다. 옥상을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대부분의 남자들은 눈에 약합니다. 역전의 용사 다윗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삿14-16장에서 삼손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손이 불레셋 여자들에게 빠져 결국 망했습니다. 삼손에 대해 쓴 성경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삼손이 어디 어디를 내려가 누구 누구를 보고”. “가고”, “보고”. 14장에서는 딤나에 갔고 16장에서는 가사에 갔습니다. “갔고 보았고, 끝”. 가고 보면 끝난 것입니다. 여성들도 주의해야 합니다. 남자들은 시각을 통해 유혹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딸을 둔 부모는 밤늦게 딸들이 남자들을 만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짧은 옷을 입고 남자들 앞에 나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복장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짧은 옷, 가슴이 파진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교회 나올 때는 짧은 치마, 가슴이 파진 상의, 꽉낀 상의, 바지 입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핸드폰 조심하세요. 핸드폰이 좋은 문명의 이기지면 악의 접촉점일 수 있습니다. 많은 범죄가 핸드폰, 스마트폰에서 나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결혼의 거룩입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우리의 거룩이니라”. 히13:4절입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결혼한 부부는 기억하시시오. 우리가 결혼할 때 서약한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결혼할 때 우리는 이렇게 서약했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에게 정절을 다 지키겠다”. 제가 이번에도 다시 확인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한”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입니다. 사랑은 식을 수도 있고 뜨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현재의 아내와 남편을 만나게 했습니다. 결혼은 사랑이며 또한 책입니다. 야곱처럼 라헬은 사랑하고 레아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사랑은 책임이고 책임을 지다보면 사랑도 자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정결한 가정입니다. 미혼자는 순결을, 기혼자는 정절을, 그래서 우리 가정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마5:27-32 2015.5.17.(일)
순결과 정절
간음하지 말라
마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구약에 나오는 간음
(1) 남편이 있는 다른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는 경우
(2) 제사장의 딸이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경우
(3) 약혼한 처녀와 불륜 관계를 맺는 경우
(4)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경우
(5) 동성연애
롬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동성연애가 안되는 이유
(1)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한다
(2) 저출산을 가져온다
(3) 심각한 질병을 유발한다
(4) 타고난 기질이 아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성적 본성과 음욕은 다르다.
골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골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창2:18,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성은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 남편과 아내사이에 사용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창2:24,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
법적 관계 마음의 관계 육체적 관계
(결혼) (관계) (성)
눈과 손을 조심하라
마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시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창39: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우리의 거룩이니라”.
히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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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9:31-35, 30:22-24 야곱의 자녀들 2015.5.3.(일) (0) | 2019.07.24 |
마5:17-20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2015.4.26(일) (0) | 2019.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