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12 2014.5.31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5월 마지막 주,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옛날 스페인의 어떤 왕이 사치와 연락을 즐기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럴수록 왕은 행복하기는 커녕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전국을 다니며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찾아 데려 오시오“. 신하들이 전국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딱 한 사람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막대기 들고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목동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중에 오직 가난한 목동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행복한 사람을 찾기 힘들까요? 실제 행복이 없어서 그럴까요?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는 이유는 행복이 없어서가 아니라 행복을 멀리서 찾고 미래에서 찾고 자기 밖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명언중에 중요한 명언이 있습니다. 짧지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넷째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과 남을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다.
여러분도 행복하기를 원합니까? 산상수훈이 그 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 너머의 천국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의 헌장같은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과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행복이 특히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세 종류의 복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은 유명한 “8복”입니다. 이 여덟가지 복을 갈릴리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팔복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말씀이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로 시작됩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복이요 다음은 축복이고 마지막이 행복입니다. 먼저 기복이란 “복을 빈다”는 뜻인데 주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말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나라에 수해가 났는 데 우연히 기독교 방송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남해안에 많은 피해가 있었으나 우리를 한 주동안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수해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데 나만 혼자 무사하다고 감사하다니. 누가 그런 기도를 드리는가? 이런 복은 무당종교에서 많이 비는 복입니다. 무당들이 “굿”을 하지 않습니까? “굿”이란 본래 “행운”이란 뜻을 가진 퉁구스 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굿”을 하는 이유는 행운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들 말로 “제재초복”(除災招福), 재앙을 피하고 복을 불러드리는 의식입니다. 굿에는 병낫기를 구하는 “구병제”, 복받기를 비는 “기복제”, 그리고 죽은 영혼을 위한 “사령제”가 있고 이것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열두거리”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주로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와 명예와 장수입니다. 누가 주는지도 모르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복은 성경적인 복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축복”이 있고 세 번째로 “행복”이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우리 말로는 비슷합니다. 보통은 “축복받으세요” 하는 말과 “행복하세요”라는 말은 같이 쓰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단어도 다르고 뜻도 다릅니다. “축복”은 “브라카”라고 하고 “행복”은 “아스레이”라고 합니다. “브라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복입니다. 창1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12: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브라카”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고 아브라함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쟁취한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복이 있습니다. “아스레이”라는 복입니다. 이 복을 성경은 “행복”이라고 번역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중 “아셀”지파가 있습니다. 이 “아셀”이 곧 “아스레이”에서 왔습니다. 창49:20절입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아셀지파는 지금의 갈멜산에서 레바논 해안평야를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이 지역을 아코평야라고 합니다. 이 지역은 아주 비옥하고 아름다운 지역입니다. 그래서 아셀 지파는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평안과 부, 안정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누리는 복을 “아스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다릅니다. “브라카”(축복)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복입니다. “아스레이”(행복)은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실 때 그것을 “축복”이라고 하고 우리가 그것을 평강으로 누릴 때 “행복”이라 한다. 축복은 행복의 시작입니다. 축복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행복은 땅에서 누려집니다. 축복없이 행복없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으면 축복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은 “축복”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5:3절부터 11절까지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9번 나오는 데 이 말들은 모두 헬라어로 “마카리오리”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아스레이”에 해당하고 번역하면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복은 “행복”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는 “복”을 모두 “행복”으로 번역했습니다. “행복하여라. 맘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축복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았는 데도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축복은 받았는 데도 여전히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건강축복을 받았는데도 얼굴에 웃음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는데도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축복을 받지 않았으면 원망이나 할텐데 받았으면서 누리지 못한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이야기와 같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 두 딸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큰 딸은 얼굴이 못생겼고 둘째는 입이 거칠었습니다. 나이는 과년했는 데 아버지가 고민입니다. 그러다가 한 중매장이가 나타나 좋은 신랑감을 소개해주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중매장이가 말합니다. “하나는 앞 못 보는 장님이요 다른 하는 귀머거리입니다” 그러면서 “큰 딸은 앞못보는 장님에게 보내시고 둘째 딸은 귀머거리에게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게 했는 데 이들은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큰 사위는 아내가 못생긴 것이 안보였고 둘째 사위는 아내 불평하는 소리가 안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을에 영한 의사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을 더 행복하게 하려고 사위들을 의사에게 데려갔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 큰 사위는 눈을 뜨고 둘째 사위는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두 가정이 깨졌습니다. 더 큰 축복 때문에 행복이 깨진 것입니다. 축복은 좋은 것을 받는 것입니다. 행복은 좋은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두 딸 부부가 건강하게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장님 사위가 박색 아내와 살고 귀머거리 사위가 말많은 아내와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산상수훈은 누리는 복, 행복을 말합니다. 그것도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제자는 행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받아도 누리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평생 누리는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나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눈으로 8복을 보십시오. 무엇이 행복이라고 말합니까? 8가지를 봅시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 4절, 애통하는 자, 5절, 온유한 자,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7절, 긍휼이 여기는 자, 8절, 마음이 청결한 자, 9절, 화평케 하는 자, 10절,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 여기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시나요? 공통점은 행복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많고 적고는 환경입니다. 물질이 많든 적든 마음이 가난하면 행복합니다. 핍박이 있고 없고는 밖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핍박이 있든 없든 내가 견디고 참으면 행복합니다. 다툼과 전쟁은 밖에서 옵니다. 그러나 다툼중에도 내가 평화하면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화를 돗구고 미움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내가 온유하면 행복합니다. 8복은 모두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밖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밖의 형편에 따라 내 행복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환경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태도와 관련됩니다.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행복을 나 밖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유전과 성격과 태도입니다. 유전은 부모로부터 타고난 선천적인 요소입니다. 성격도 타고납니다. 이 두 가지는 고칠 수 없습니다. 딱 하나 고칠 수 있는 것이 있는 데 태도입니다.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태도를 바꾸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태도는 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환경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상사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씩씩거리며 “나 못해 먹겠어”하고 사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그때 잠간 생각하십시오. 상사가 뭔데 내가 그만 둡니까? 상사가 뭔가 내 운명을 그에게 맡깁니까?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면 화가 가라앉습니다. 나중에 자기도 상사가 되면 곧 이해하게 될 한 인간의 실수 때문에 한 가족의 생계를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윗 사람을 밟지 않고 어떻게 윗 사람이 됩니까? 나를 버리고 떠난 남자친구, 여자 친구 때문에 그만 죽고 싶습니다. 나를 버리고 간 남자, 정말 밉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잠깐, 아파트에 뛰어내리기 전에 생각해 보십시오. “개가 뭔데 내 행복을 그가 좌지우지합니까? 그가 하나님입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그를 더 믿었던 것 아닙니까? 잘안되면 ”갈 놈아, 가라. 나는 나다“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났는 데 며칠 전 시어머니가 한 마디 한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에미야, 네 남편 좀 잘 챙겨라”. “아니, 어머니는 내가 남편을 잘 챙기는 것도 모르나? 왜 어머니는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하나? 그냥 집을 나가버려?“ 그러나 보따리 싸기 전에 한번 물어 봅시다. ”왜 당신의 행복을 어머니에게 맡깁니까? 어머니가 애기 봐주고 선물할 때는 “고마워요. 어머니. 헤헤” 하다가 어머니가 모처럼 한 마디 하니까 화가 나서 집을 나갑니까? 당신도 나중에 시어머니 되면
그렇게 안할 자신있습니까? 그렇게 내 남편을 사랑하주는 어머니가 있으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기라고 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왜 당신의 행복과 불행을 어머니 말 한 마디에 의존합니까? 왜 당신이 먼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 어머니 말할마디 때문에 불행하게 삽니까?“.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은 행복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옵니다. 행복은 작은 연습의 총합(總合)이라고 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마틴 셀리그먼 교수팀이 연구했답니다. 500명을 대상으로 행복감 증진 프로그램을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이 노력한 사람에게 행복감이 증진되었다고 합니다.
1. 매일 밤 그날의 좋은 일 세 가지 생각하기
2. 자신의 장점 다섯 가지를 찾아 매일 새롭게 적용하기
3. 일상의 즐거운 일을 적극적으로 즐기기
4. 남에게 기억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 적어보기
5. 한 가지 일을 반복하지 않고 다양한 일 하기
6.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 생각하기
7. 10년 뒤 가장 잘된 자신의 모습 떠올리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생각을 바꿀 때 이스라엘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소에 잘 쓰는 두 마디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잘 톱”입니다. 이 말은 “축하합니다”라는 말입니다. 한 번 해 봅시다. “마잘 톱”, “축하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은 언제 씁니까?
가령 예를 들어 집에서 아이가 놀다가 화분을 깨뜨렸습니다. 엄마가 평소에 물주고 좋아하는 화분을 깨뜨렸으니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너 정신이 있니? 없니? 너 촐랑거릴 때 알아봤다. 너는 항상 그 모양이니? ”. 별 이야기를 다 했을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엄마들이 하는 말이 “마잘 톱”입니다. 아니 아이가 화분을 깼는 데 축하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엄마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깨진 화분, 나무란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화분깬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아이는 그 일을 통해 뭔가 배웠을 것입니다. “아, 잘못했구나. 엄마가 걱정하시겠구나.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뭔가 배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잘 톱”입니다. 화분깬 것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뭔가 배운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일생에 축하하고 축하받을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연당한 것, 축하할 일입니다.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한 것, 축하할 일입니다. 잠시 아파 병원에 입원한 것, 축하할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수하고 실패한 것 자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분명 배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파웰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실수란 그것을 통해 무엇도 배울 수 없는 실수를 말한다”. 그렇습니다. 실수하고 배운 것이 없을 때 실패한 것입니다. 실수했지만 뭔가 배운 것이 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잘 톱”, 축하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사블라누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내, 인내심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가정, 학교, 회사, 시장, 길거리에서 “샬롬”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엄마에게 우유를 달라고 칭얼댑니다. 이때 엄마가 “사불라누트”합니다. “인내해”하는 뜻입니다. 가게에서 손님이 물건 빨리 팔라고 합니다. 이때 주인이 “사블라 누트”합니다. 그런데 “인내하라”는 이 말을 표현하는 방법이 중요합니다. 다섯 손가락을 오므려 자기를 가리키며 “사브라누트” 합니다. “인내해, 인내하세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데 손모양은 자기를 가리킵니다. 왜 그럴까요? 인내의 이유는 다른 사람이 제공했지만 인내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만 인내하면 됩니다. 가령 자동차를 몰고 가는 데 옆 차가 끼어 들어 위험할 뻔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차를 세우고 “너 나와바” 라고 죽기 살기로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은 차를 옆에 세우고 손가락을 오므려 자기를 가리키며 “사브라누트”합니다. 어차피 잘못은 상대방이 했으니 나는 참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에 있지만 문제 해결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자, 손가락을 오므려 자기를 보고 말합시다. “사브라누트”.
이것이 생각의 차이, 발상의 전환, 관점의 차이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다 나에게서 나옵니다. 사건은 외부에서 오지만 그것을 대하는 나의 반응이 행복과 불행을 만들어 냅니다. 미국의 스티븐 맥도널드란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행복을 가져오는지 알았습니다. 스티브 맥도널드라는 사람은 1986년 뉴욕 경찰이었습니다. 그가 도시를 순찰하던 중 거리에서 십대 청소년들에게 최근 자전거 절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15살된 소년이 총을 꺼내 맥도널드 경관의 머리와 목을 향해 쏘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맥더널드는 목아래가 모두 마비되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져 18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평생 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사고 당시 그는 결혼 8개월이었고 아내는 임신 6개월이었습니다. 신혼의 단꿈이 한 순간 악몽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맥도널드는 그 소년을 용서했습니다. 소년은 감옥에 갔고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전국을 돌면서 용서의 이야기를 전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이 출소한 후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 바람에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책을 써서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그 책에 이렇게 썻습니다. “내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 가슴에 피어나는 복수심이었다.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소년을 평생 원망하며 불행하게 살든지 내가 그를 용서하고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든지. 나는 용서를 선택했고 그 순간 행복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상처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우리는 상처받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를 불행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불행해집니다.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사람은 수면과 식욕, 혈압, 건강, 행복을 좌우할 모든 힘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데일 카네기가 말했습니다. “분노심이란 독약은 자신이 마셔놓고 적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선택하며 살겠습니까?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해지지 않도록 나를 지키겠습니까? 행복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 닮은 성품에서 옵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행복이 나에게 달려 있지만 나에게서 행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8가지 행복의 공통점은 성품입니다. 마음의 가난, 온유, 애통, 평화, 청결, 의, 모두 성품입니다. 그것도 인간적인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웹스터 사전에 보면 “행복은 기분 좋은 만족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감정, 특히 쾌락에 가까운 감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불행이 여기서 옵니다. 행복을 기분좋은 만족감에서 찾다보니 만족하지 많으면, 느낌이 오지 않으면, 감정에 뭔가 오는 것이 없으면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개그맨이 말했습니다. ”느낌 아니까“. 느낌 안다고 행복합니까? 느낌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자주 변합니다. 성경은 행복이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성품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자, 3절,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합니다. 가난이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가난이 행복입니다. 가난하면 갈급합니다. 가난은 결핍입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은 가난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속상합니다. 아타깝습니다. 그래서 갈급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가난이 행복입니다. 돌아가신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에게 어느날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집사라고 밝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장로님 뵙기를 30년이나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보기를 원했습니까?” 했더니 자기에게 외아들 하나가 있는데 간절히 기도해서 장로가 되었노라고 하면서 그 장로 아들에게 아들 일곱이 있는데 다 예수 잘 믿고 복을 받았는 데 다만 한 가지를 못받아서 찾아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조금 가난해요. 다른 것은 다 받았는 데 물질 축복을 못 받았어요. 우리 아들과 손자들이 물질 축복을 받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때 김용기 장로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집사님, 제가 전국을 다 다녀봐도 밥 굶은 장로는 없습디다. 하나님믿는 것이 복이고 장로된 것자체가 이미 복인데 무슨 복을 더 바랍니까? 장로가 할 일은 하나님 잘 섬기는 것입니다. 모든 복은 거기서 나와요” 했답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슬픔이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는 것 자체가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울기만 해서 행복하다면 초상집이 가장 행복합니까? 육신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 울어야 행복합니다. 약 600년 전에 영국에 줄리안이라는 성녀가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세 가지 상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첫째, “주여, 나에게 회개의 상처를 주옵소서”. 자기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둘째 “주여, 나에게 긍휼의 상처를 주옵소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주여, 나에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를 주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사모의 눈물이었습니다. 쥴리안은 이것을 불치의 향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영혼의 고향인 하늘 나라를 위한 그 일에 간절한 열망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단순히 우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의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울 수 있디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설교시간마다 욾었답니다. 너무 많이 울어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발 제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하옵소서”. 그래서 눈물이 그때부터 교회 부흥이 멈췄답니다. 하나님 마음으로 우는 것이 행복입니다.
10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합니다. 어떻게 목마른 것이 행복입니까? 물 때문에 목마름이 아니라 영혼의 생수 때문에 목마른 것입니다. 이 목마름을 성경은 “주린 마음, 영혼의 갈망”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허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갈망해 본 사람만 진정으로 만족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갈망하지 않으면 무엇에도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7절, 긍휼이 여기는 자는 행복합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자기 연민이라고 합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 사랑의 하나로 타략한 인간 본성중 하나입니다. 자기 사랑은 행복이 아니라 남을 사랑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결국 행복은 하나님에게서 오고 하나님을 닮는 성품에서 옵니다.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임을 믿습니까? 행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시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자신이 행복입니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자체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야 행복입니다. 영국의 C.S.루이스가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사물안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주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나이다”. 그안에 행복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행복을 주십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 자체가 행복이 아닙니다. 아내를 통해 하나님이 행복을 주십니다. 물질 자체가 행복이 아닙니다. 물질을 통해 하나님이 행복을 주십니다. “주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나이다“. 주여, 주님만이 나의 행복, 나의 기쁨. 나의 자랑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 가난한 마음, 거룩한 애통의 마음, 온유한 마음, 평화의 마음, ,청결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주옵소서. 행복의 근원되신 주님과 함께 평생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마5:1-12 2014.5.27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세 종류의 복이 있습니다.
기복
축복(브라카)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0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행복(아스레이”)
창49:20,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실 때 그것을 “축복”이라고 하고 우리가 그것을 평강으로 누릴 때 “행복”이라 한다.
행복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유전과 성격과 태도다. 유전과 성격은 타고난다. 고칠 수 있는 것은 태도다.
이스라엘에서 많이 쓰는 말
1) 마잘 토브
2) 사브라누트
스티브 맥도널드, “내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 가슴에 피어나는 복수심이었다.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소년을 평생 원망하며 불행하게 살든지 내가 그를 용서하고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든지. 나는 용서를 선택했고 그 순간 행복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데일 카네기, “분노심이란 독약은 자신이 마셔놓고 적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행복은 하나님 닮은 성품에서 옵니다
“행복은 기분 좋은 만족감“(웹스터 사전)
아브라함 헤쉘, “갈망해 본 사람만 진정으로 만족한다”.
시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C.S.루이스, “세상의 어떤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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