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3:14-22 2015.7.5(일)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라
작년 미국 뉴욕에 갔을 때 눈에 띄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세계무역센터 건물이었습니다(사진). 이 건물은 본래 110층으로 쌍둥이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테러로 무너진 것을 2012년 다시 재건한 것입니다. 테러당시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사진). 그때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이 사건으로 만명 가까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경제적 손해도 엄청났습니다. 빌딩값만도 일천억 달러, 그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피해는 65조를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곳에 가면 박물관이 있고 그 날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존해 놓았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벽에 붙어 있는 말이었습니다. “We came in as individuals, and we'll walk out together". 우리는 그때 개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함께 걸어가리라”. 무너진 건물에 대한 재건의 의지를 반영한 말입니다.
무너진 쌍둥이 빌딩의 재건을 보면서 한국교회도 재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너무 많이 무너져 있습니다. 내일부터 이중표 10주기 기념 목회자 세미나가 열립니다만, 10년전과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교회가 많이 침체했다는 것입니다. 교단마다 몇 천, 몇 만명씩 줄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수가 늘어난 교회를 많이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헌금이 줄었습니다. 교회마다 평균 2-30%가 줄었습니다. 주일학교가 줄었습니다, 농촌교회의 90%가 교회학교가 없습니다. 인구가 줄었습니다. 출산율이 1.15명, 세계 최하위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무너진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킬 것은 없는가?
13-14세기, 이태리에 성 프란치스코가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프란치스코를 부르시면서 가장 먼저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너진 내 교회를 수축하라”. 당시 유럽교회는 심각하게 무너져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경제가 무너졌습니다. 지도자들의 탈선으로 영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교회가 재건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하나님의 음성을 교회를 수축합니다(사진). 1207년, 무너진 성 다미안 교회를 흙과 돌로 재건합니다. 그 뒤에 두 교회를 더 재건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건물의 재건이 아니구나”를 압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적인 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회를 영적으로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평생 가난과 겸손, 기도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일생 품었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 한국교회도 지금 무너진 교회를 재건할 때입니다. 건물을 재건하라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 영성과 교회의 사명을 재건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 기도원에서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국교회를 어떻게 재건해야 합니까?” 했는 데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 이야기를 읽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계시를 7개 교회에 편지로 보냅니다. 에배소, 서머나, 버가모, 두라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 모두 주후 1세기, 지금의 터키의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교회였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교회들을 이 보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보고 마땅히 재건해야 할 방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오늘의 한국교회를 닮은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곧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라오다디게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가난하다. 물질적으로 그들은 부요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아주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당시 많은 은행과 고리대금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교회가 “가난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의 가난입니까? 영적인 가난입니다. 두 번째는 눈이 멀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라오디게아에는 유명한 의사와 병원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두 가지 유명한 약이 났는 데 고약과 안약입니다. 고약은 귓병에 좋고 안약은 눈병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눈물고 귀먹었다고 말합니다. 셋째로는 벌거벗었습니다. 벌거벗었다는 말은 그들의 도덕적, 영적으로 행실이 깨끗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지방 특산물중에 목양과 목화재배가 성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성한 양털과 목화산업이 발달했는 데 라어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도덕적, 영적인 수치를 말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부요했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고 안약은 많았으나 영적으로 어두었고 목양과 목화는 풍성했으나 도덕적으로는 벌거벗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크게 걱정하는 교회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지금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교회 건물, 시설이 없습니까? 실력있는 신학교, 박사가 없습니까? 풍부한 물질, 문화가 없습니까? 그런데도 가난하고 눈물고 벌거벗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고칠 수 있습니까?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열정이 식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열정이 식었다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계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지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토하여 내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지역을 방문하면 재미있습니다. 라오디게아 북쪽으로 10킬로쯤 올라가면 “히에로볼리”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거대한 온천지역입니다. 이 도시에 들어가면 거대한 얼음에 덮혀 있는 착각에 빠집니다(사진). 마치 거대한 얼음 바다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얼음이 아닙니다. 석회석입니다. 이 지역은 바닥에 거대한 온천이 있습니다. 그 온천수가 이산화탄소와 만나 석회석으로 변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여기 저기서 물이 퐁퐁 솟아 오릅니다. 발을 담가보면 아주 뜨겁습니다. 맨발로 걸으면 너무 뜨거워 오래 발을 담가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 한 10킬로 흘러 남쪽으로 가면 미지근하게 식습니다. 아예 차거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추운 겨울 아침 세수할만큼 알맞게 차거워집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열심”이 있습니까? 제가 신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서울 웬만한 산에 가면 밤새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밤예배 없는 교회가 없었고 철야기도도 새벽까지 했습니다. 부흥회는 월요일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일주일 내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기도원도 텅텅빕니다. 주일 밤 예배는 거의 없습니다. 옛날에는 미친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너무 미쳐 남편들이 아내보고 제발 교회는 나가게 하겠는 데 미치지는 말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친 사람이 없습니다. 안 미치니까 못 미치는 것입니다. 가끔 T.V나 영화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 신들린 사람 같습니다. 사실이 아닌 데도 정말 실감나게 연기합니다. 그 연기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연기자와 기독교인의 차이가 무엇이냐? 연기자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연기하고 기독교인은 사실인 것을 사실이 아닌 것처럼 믿는다“. 세계를 움직인 사람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답니다. 하나는 헌신이고 다른 하나는 열정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정이 없는 헌신은 기름없는 횃불과 같고 헌신이 없는 열정은 타지 않는 기름 탱크와 같다“. 둘이 함께 가면 무슨 일이나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죠지 바나”가 쓴 “주전자 안의 개구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개구리를 잡아 아무 고통 없이 개구리를 죽이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개구리를 고통없이 죽이려면 개구리를 주전자에 넣고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금씩 가열하는 것입니다. 너무 조금씩, 너무 천천히 가열하기 때문에 개구리는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개구리는 점점 기분 좋다가 죽습니다. “야, 참 좋다. 편안하고 따뜻하고 기분 좋다” 할 때 그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편안이 그를 편히 죽인 것입니다. 안락이 그를 안락사시킨 것입니다. 편안과 게으름이 믿는 자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정이 식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밖으로부터 고난이 없고 안으로부터 성령의 강력한 지배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계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없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고난과 성령입니다. 소아시아 7교회는 대부분 두 가지중 하나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서머나 교회같은 경우는 황제를 섬기도록 강요받는 정치적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폴리캅이 순교했습니다. 버가모 교회같은 교회는 발람, 니골라당,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싸우다 보니까 순교하고 싸우다 보니 강해졌습니다. 미지근할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핍박도 이단의 공격도 없었습니다. 그냥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였습니다. “나의 마음이 편안해. 나의 마음이 편안해” 노래했습니다. 그 사이에 점점 죽어갔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핍박이 있습니까? 예수믿는다고 누가 잡아 갑니까? 아닙니다.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시련이 없다보니 도전도 없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체질이 약해져 메르스만 봐도 겁을 집어 먹습니다. 외부의 고난이 없다면 내부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꼭 주전자속의 개구리입니다. 열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슴이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환경이 회복되기를 기도하지 말고 믿음의 열정이 회복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속적이다
두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세속적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계3:17,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나쁜 사조가 교회안에 들어와 교회의 거룩성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세속성을 대표하는 것이 돈과 성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라오디게아 지역은 은행과 고리대금업자가 많아 돈이 많았습니다. 양털과 목화농사로 풍요를 이룩했습니다.
돈이 많고 물질이 풍부한 것은 이방종교의 영향이기도 했습니다. 주로 에배소지역에 많았지만 그 당시에 지배적인 종교는 아데미 종교였습니다. 이것이 아데미 여신입니다(사진). 아데미 곧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의 딸이었는 데 풍요의 여신입니다. 이 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슴입니다. 가슴에 달걀같은 것이 있는 데 이것은 달걀이 아니라 유방입니다. 그것이 무려 24개나 있습니다. 젖이 많다는 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자식들을 잘 키우는 원천입니다. 뿐 아닙니다. 머리와 다리를 보면 온갖 보석으로 치장도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금은 보화, 보석, 다이아몬드가 거기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데미는 물질의 신입니다. 영화와 부귀의 신입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안 보입니다만, 학자들에 의하면 한 손에는 곤봉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삼지창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권세를 상징합니다. 말안듣는 사람을 곤봉으로 누르고 삼지창으로 찌르는 것입니다. 물질뿐아니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아름답기 까지 합니다. 인간이 갖출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췄습니다. 미, 풍요, 부, 명예, 권력, 힘, 이 모든 것이 이 아데미 신에게 있습니다. 누구나 이 여신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당시의 아데미종교 지도자들이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된다고 하면 누가 안 믿겠습니까? 아데미를 믿으면 부와 미와 풍요와 명예, 권력, 아름다움까지 다 갖는다는 데 누가 아데미를 안믿겠습니까?
한국교회는 한때 건물세우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2013년 기준으로 한국교회가 건축을 위해 대출한 돈이 4조 5천억입니다. 그러니 이 빚을 어떻게 갚습니까? 그렇게 비싸게 교회는 지었지만 운영이 안돼서 경매로 낸 교회가 전국적으로 312개입니다. 우리 교회 가까운 교회 하나가 경매로 넘어 갔는 데 이단 “하나님의 교회”로 넘어갔습니다. 대책없이 크게만 짓다가 이단에게 팔려 한국교회에 허탈감만 주고 말았습니다. 돈을 많이 들이면 큰 건물을 지을 수 있지만 큰 건물이 곧 큰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건축도 그렇지만 교회가 모든 일을 돈으로만 하려고 하거나 재미위주로 해서는 안됩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8월 초에 서천지역 17게 교회를 섬기는 전교인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게 된 많은 이유중 하나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중고등부에서 경기도 어디로 수양회를 갔는 데 거기 있는 수영장에서 학생들이 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영하다가 한 학생이 다쳤는 데 우리 교회를 나오지 안는 어머니가 수양관측을 고소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수양관측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수양관측을 고소하겠다고 하니까 수양관 대표가 놀라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교회가 수양회갔다 와서 법적으로 고소하느는 사건이 생겼다. 과연 교회다운 일입니까? 그렇게 아이들을 약하게 키워서 되겠습니까? 뭔가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아이들을 만들어야 하는 데 조그만 고난도 못 참고 편해지려고만 하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도 못하고 법을 운운하는 아이를 만들어서 뭐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조금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돈으로만 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뭔가 손해보고 용서하고 희생하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우리안에 우리도 모르게 들어온 세속주의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계3:1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일깨워야 합니다. “일깨운다”는 말은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운다는 것입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적어도 네 가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첫째 과거의 추억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지금 안 좋은 데 과거에 좋았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가 좋았어” 하면서 새롭게 추구할 미래가 없으면 교회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둘째 예수님보다 조직을 더 사랑하는 데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내용보다 형식에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보다 어떻게 예배하느냐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교파주의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인 데 교파, 교단, 보수, 진보로 갈라서서 그것을 예수님보다 더 중요시합니다. 그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셋째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강조하는 데서 깨어나야 합니다. 교회일을 모두 물질적 관점에서만 보고 “얼마나 돈이 많이 드냐. 많이 들면 하지 마“. 하는 식으로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돈을 많이 써야만 한다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넷째 세상과 타협하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아무나 사랑하는 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를 사랑해야 하지만 잠은 한 남자와 자야 하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지만 모든 종교를 다 믿어야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동성연애자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모두가 동성연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술먹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아야 하지만 우리가 술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주일날 등산가고 낚시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가 주일날 교회 떠나 낙시하고 등산가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포용주의와 혼합주의는 다릅니다. 교회는 부지런히 자기를 일깨워야 합니다. 잘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잘 수 있습니다. “일깨워라”. 늘 깨어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다
세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예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계3:20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즐겨 암송하는 귀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여기에 집이 있습니다. 지금 겨울이 되어 춥고 음산합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꽁꽁 잠그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밖에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여기서 “서다”라는 단어는 “헤스테카”, 현재 완료형입니다. 지금 서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린다” 했습니다. 이 말은 “크루오”, 부드럽게 노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당히 급하게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야 교회형편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치명적인 문제는 예수님은 밖에 계신 채 문을 꽁꽁 잠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이 묻습니다. 너는 어떻냐? 너도 그렇지 아니하냐? 너희 교회는 어떻냐? 너희 교회도 내가 없지 아니하냐?
이중표 목사님이 한국교회에 던진 메시지중의 하나가 철저한 예수님 사랑입니다. 설교도 언제나 예수님이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성경에서 예수를 보고 예수를 통해 모든 성경을 보라”고 자주 말씀했는 데 이 말은 성 프란치스코가 한 말입니다. 그는 어떤 본문이든 예수님으로 연결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케리그마 설교”라고 부릅니다. 그는 설교중 자주 우셨는 데 왜 우는가 보면 예수님 때문에 웁니다. 한번 물어 봅시다. 여러분은 언제 우십니까? 아마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고 어머니가 아프고 사업이 안될 때 울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언제 울까요? 자기 계획대로 잘 안되고 교회가 부흥되지 않을 때 웁니까? 그런데 혹시 예수님 때문에는 울어 보았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감사해서 울고 예수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울고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울어 보았습니까?
이중표 목사님이 항상 강조한 것이 이것입니다. “신자의 최대 과제는 예수님 닮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병상에서 남긴 글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병들어 죽어서도 안 되지만 병고치고 살기만 해도 안 된다. 병들어 죽는 것은 불행한 인생이요, 병고치고 살기만 하면 헛된 인생일 뿐이다. 병들든 건강하든 우리의 최대 소원은 예수님 닮는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에게 예수님이 없다면 그는 셋 중의 하나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목회자에게 예수님이 없으면 세 가지로 간다. 첫째 권위주의, 권위주의는 예수님 없는 자리에게 내가 있는 것이다. 세속주의, 세속주의는 내 안에 예수님 대신에 세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공주의, 성공주의는 예수님이 있어야 자리에 내 야망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없으면 아ㅣ렇게 잘못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소아시아 7교회에게 지적만 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가 희망을 준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이 모든 교회의 형편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실 때 공통적인 것은 “내가 너를 아노라” 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이 계2장에만 6번이나 나옵니다. 주님은 에배소 교회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를 알고“, 3절, 계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주님은 또한 서머나 교회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9절입니다. 계2:9,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내가 아나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단의 회라”.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환란도 알고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의 훼방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버가모교회를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땀흘려 봉사할 때 우리를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우리가 연약하며 쓰러질 때 우리의 약함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가 승리할 때 상급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 “이기라”입니다. “이기라, 승리하라”. 계3:5절에서 사데교회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고”. 주님은 사데교회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그 교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교회까지도 주님은 기대를 가지셨습니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21절입니다.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영적으로 눈멀고 병들고 벌거벗은 교회도 주님은 함께 하시겠다고 말합니다. 네가 반드시 다시 일어나 싸움에서 이기고 기필코 아버지 보좌에 앉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연약한 교회를 강하게 합니다. 넘어진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낙심하고 실패한 교회를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3장만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전체가 승리에 대한 격려와 기대로 가득차 있습니다. 계5:5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이기었으니」이 책과 일곱 인(印)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어린 양 예수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계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이기고」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이 세상은 결국 예수 이름으로 승리한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현실적으로 24시간, 365일을 이길 수 없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할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우리는 최후 승리를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기필코 이길 것입니다. 지금 지쳐서 쓰러져 있는 사랑하는 한국교회여, 일어날지어다. 사랑하는 나의 종 목회자들아 일어날지어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 성도들아, 일어날지어다. 내가 너를 알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일어나라. 담대하라. 무너진 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계3:14-22 2015.7.5(일)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라
세계무역센터(사진).
테러당시의 모습(사진).
성 다미엔 교회(사진)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
(1) 가난하다.
(2) 눈멀었다.
(3) 벌거벗었다.
열정이 식었다
계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히에로볼리(사진)
죠지 바나, <주전자 안의 개구리>(사진)
세속적이다
계3:17,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아데미 여신(사진).
계3:1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한국교회가 깨어날 것
(1) 과거의 추억
(2) 예수님보다 조직을 더 사랑함
(3)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사랑함
(4) 세상과 타협함
예수님이 없다
계3:20“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중표
“신자의 최대 과제는 예수님 닮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병들어 죽어서도 안 되지만 병고치고 살기만 해도 안 된다. 병들어 죽는 것은 불행한 인생이요, 병고치고 살기만 하면 헛된 인생일 뿐이다. 병들든 건강하든 우리의 최대 소원은 예수님 닮는 것이다”.
“목회자에게 예수님이 없으면 세 가지로 간다. 첫째 권위주의, 권위주의는 예수님 없는 자리에게 내가 있는 것이다. 세속주의, 세속주의는 내 안에 예수님 대신에 세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공주의, 성공주의는 예수님이 있어야 자리에 내 야망이 있는 것이다”.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를 알고“,
계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2:9,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내가 아나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단의 회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고”.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이 책과 일곱 인(印)을 떼시리라 하더라”.
계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이기고」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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