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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용수목사/곤경에 처한 야곱 (창 32:3-12)

지용수목사/곤경에 처한 야곱 (창 32:3-12)


영국의 윌리엄 글래드스톤(Willian Gladstone) 경은 재상을 네 번이나 했고, 영국 국민뿐 아니라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는 국사로 너무 바빠 때로는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나라 일로 바빠서 이렇게 동분서주하며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르고 일할 때도 있지만 주일 예배에 빠진 적은 평생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주일 예배에 참석해 풍성한 은혜를 받고, 세상의 모든 일을 감당할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꽃들, 이 화분의 화초들도 일주일에 한 번은 물을 주어야 삽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산소가 계속 공급되고 다른 조건이 다 맞아도 물을 주어야 살듯이, 우리가 월, 화, 수, 목, 금, 토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만 주일에 약속된 축복의 단비를 맞아야 사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함으로써 생명이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고, 또 세상의 모든 일에 이길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농과대학을 나와 비밀하우스 재배를 하는 분의 이야기를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큰 비닐하우스에 갖가지 농작물을 경작할 때 정기적으로 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켜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농작물이 살지, 계속해서 비닐하우스 문을 닫아두면 다 시들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비닐하우스같이 답답해서 사람들이 마약을 하고, 답답해서 술을 마시고, 답답해서 도박하고, 답답해서 별짓을 다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 자살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산소가 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오는 사람은 시원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자살하지 않습니다. 자살했으면 그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매주 교회에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 은혜를 받는 사람은 모든 여건을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하면서 은혜를 받고, 특별히 설교 시간에 힘이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공격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그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했던 그 40명은 무장했던 것도 아닌데 바울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라반과 같이 온 사람들은 무장해서 야곱을 치러 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무사하게 되고 평화조약을 맺고, 서로 입 맞추고, 축복한 후에 헤어집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후유! 고비를 넘겼구나.’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아버지 집, 고향으로 가려니 라반의 위험보다 더 엄청난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서의 위험입니다.
에서는 싸움꾼이요 사냥꾼입니다. 그가 칼을 뽑으면 야곱이 당할 수가 없습니다. 라반은 싸울 수 있는 상대이지만 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면 에서를 만나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피해 고향으로 가지 않으면 에서를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말씀의 길을 택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나가면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가야 됩니다.
따라 합시다.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주일을 지키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십일조를 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할렐루야!
그렇게 나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한 번 죽을 목숨이니 말씀을 따라 살다 죽으면 좋을 줄 믿습니다.
야곱이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가는 길에서 엄청난 광경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눈을 열어 주시니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빽빽하게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미국 우리 교회에 박 장로님이 늦은 결혼을 했는데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 아기가 없으니 포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장로님께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세요.”라며 꾸중을 했습니다. 그 장로님께서 다시 새벽에 나와 기도를 하신 후 귀한 아들을 얻으셨습니다. 그 아들의 백일잔치인가 돌잔치 때 제가 미국에 있었는데 그 날의 일입니다. 박 장로님께서 제가 설교를 하고 있는 강단에 신비로운 광경이 나타난 것을 본 것입니다. 장로님이 그 광경을 보고 흥분해서 “목사님, 제가 평생 예수님을 믿었어도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하며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정도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천사,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으니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야! 이 땅이 마하나임이구나. 마하나임이구나.”
이는 ‘두 진영의 땅이라.’라는 뜻입니다.
‘우리 행렬만 있는 줄 알았더니 천사들이 같이 있구나.’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 교회는 마하나임입니다.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도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마하나임입니다. 여러분 가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도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 그 땅이 마하나임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도 함께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칼에서 구원 받았고, 신령한 눈이 열려 천군천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이 은혜를 경험한 바로 잠시 후 그는 어려운 곤경에 처합니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형님이 자꾸 부담됩니다.
‘형이 나만 죽이고 말까? 내 아내랑 아이들까지 다 죽일까? 내 종들까지 다 죽일까? 재산만 빼앗을까?’
너무 근심이 된 야곱은 그냥 있을 수 없어 종들 중에서 설득력 있게 말을 잘 하는 몇 사람을 택하여 형에게 보냈습니다.
“내 형님에게 가서 ‘주의 종, 주의 아우 야곱이 외갓집에서 20년간 붙여 살면서 복을 받아 큰 떼를 이루고, 이제 고향으로 오는데 형님에게 은혜 입기를 원합니다.’라고 전해라.”
그렇게 말할 때 에서가 어떻게 하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종들이 빠른 걸음으로, 아마 말을 타고 달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다 보니 에서가 400명 군사와 더불어 한 마디 말 없이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종들이 야곱에게 달려와서 말합니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주인의 형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무장한 군사 400명과 함께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만일 에서가 야곱을 환영하러 온다면 무장해서 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을 용서했다면 400명 떼를 이끌고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400명의 군사가 떼를 지어온 것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바들바들 떨면서 급히 재산을 둘로 나누어 한 떼는 앞에, 한 떼는 뒤에 두었습니다. 앞의 떼가 에서에게 당하면 뒤의 떼를 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제게 명하여 제 고향 제 족속에게 돌아가라 하셨고,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신다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어찌 형의 400명 군사의 칼 앞에 서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진리, 사랑을 제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요단강을 건널 때는 지팡이 하나만 갖고 갔지만 이제 거부가 되어 두 떼를 이루어서 왔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제가 죽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 형의 칼에서, 제 형의 손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제가 두려워함은 형이 와서 저와 제 처자를 칠까 함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전에 제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곱아, 네 씨를 셀 수 없는 바다 모래처럼 많게 하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은혜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제가 이렇게 형님의 칼 앞에 섰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귀한 진리를,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따라 합시다.
“이 땅은 천국이 아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근심, 걱정, 눈물, 한숨, 두려움, 염려가 없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 합시다.
“산 넘어 산이고 강 건너 강이다.”
이 세상에서는 고속도로로만 가듯이 형통할 수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에게 찬송을 받으시고 목자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동방박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셨지만 바로 애굽으로 피난가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칼에서 구원 받아 조금 마음을 놓고, 하나님의 천군천사를 보고는 “야!” 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죽음의 위기, 곤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장 위대하고 큰 일 중 하나인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홍해가 쫙 갈라져 물벽을 이루고 서니 그 사이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 통과합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몰고 가는 새끼 양 한 마리도 잃은 것 없이 다 데리고 건너는데, 그 뒤를 따라오던 애굽 군대는 모세가 지팡이 든 손을 바다로 향하니 바닷물이 다시 엎어져 다 몰살을 당합니다. 
출애굽기 15장 1절에서 21절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흥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힘, 우리의 찬송, 우리의 구원, 하나님은 높으신 분, 전능하신 분!” 하며 열광적으로 찬양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로 들어도 신바람 나는데 그때 홍해를 건넌 그들, 바다 앞에 있는 그들의 감격이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큰 구원, 그 큰 은혜를 받은 바로 그 다음 날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수르 광야(애굽에서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광야로 사하라 사막)에 들어서니 물이 없습니다. 하루 종일 가도, 이틀째 달려도, 삼일간 찾아도 물이 없습니다. 바로 엊그제 홍해를 건너는 큰 구원을 받았는데 바로 오늘 목마르고 캄캄합니다. ‘수르’는 ‘성벽’이라는 뜻이지만 ‘캄캄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온 세상이 벽이 막힌 것처럼 힘들고, 칠흑같이 어둡고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목회하다가도 그런 일을 당할 수 있고, 부부 사이에서도 그런 일을 당할 수 있고, 사업하다가도 캄캄한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 합시다.
“그것이 우리 길이다.”
그 길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삼일 간 물이 없어 사람들이 비틀비틀 쓰러지고 죽습니다. 어른도 힘들지만 아이들이 쓰러지니 얼마나 아픈 일입니까? 그러다가 마라의 물을 만납니다. “물이다!” 하고 그 물을 마셨는데 독이 든 것처럼 써서 토합니다. 원어에 보면 그 물이 쓰고 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모세! 모세!” 하며 모세에게 대적하며 불평합니다. 저는 성경의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우리 교회가 어려울 때 온 교우들이 “지용수! 지용수!”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려울 때 저를 부르지 말고 하나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도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해도 안 되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랐는데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불기둥, 구름기둥을 따라왔는데 물이 없습니다. 3일 만에 겨우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마저 쓴물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대듭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하나님!” 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옆에 나무가 있지? 그 나뭇가지를 물에 넣어라.”
나뭇가지를 물에 넣는 순간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단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그 쓴물을 치료할 나무를 준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치료할 십자가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마라에서 11.2km 더 앞으로 가니 오아시스 엘림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이 푸른 숲이 우거지고 샘물이 펑펑 솟아오르는 오아시스에서 쉬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코스다.”
야곱은 형과 형의 군사 400명 앞에서 죽는 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이레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여호와 이레」 할렐루야!
우리는 죽었거니 해도 하나님께서는 살길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셨고, 사막 길을 건널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쓴물을 만날 때도 함께 계셨고, 오아시스에서도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될 때만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스피드를 좋아하는 한 목사님이 오토바이 뒤에 친구 목사님을 태우고 신나게 달렸습니다. 교통경찰에게 잡혔습니다. 교통경찰이 딱지를 떼려고 보니 목사님들입니다.
“목사님들이 왜 이렇게 과속하십니까? 안전을 생각하셔야지요. 목사님들이라 오늘은 딱지를 떼지 않습니다만, 조심하십시오.”
“감사하지만 우리는 안전에 걱정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 그러면 딱지를 떼야 됩니다. 2인승 오토바이에 3인이 탔으니 딱지를 떼야 됩니다.”   
이것은 우스갯소리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정말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도 함께 하시고 천사도 함께 합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시선, 천사의 시선을 느껴야 됩니다. 할렐루야!
히브리서 12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운동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달릴 때, 골퍼들이 골프장에서 골프할 때, 축구선수와 야구선수들이 축구장에서, 야구장에서 시합을 할 때 관중들의 시선을 느끼며 경기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시선뿐 아니라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의 시선을 느껴야 합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은 천사입니다. 사람은 구름 위에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을 만나도 천사들의 시선을 느껴야 합니다.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일입니다.
한 귀티 나는 부인이 제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면 거의 성경만 읽습니다. 그날도 성경을 읽고 있는데 시선이 따가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아니라 계속 그런 느낌이어서 보니, 그 부인이 저를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부인이 시험 들었구나. 내가 수수하게 생겼으면 괜찮을 텐데 잘나서 저 부인이 시험 들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제게 주목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에 도착할 때가 되니 제게 다가왔습니다. 제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겠습니까? 그런데 그 부인이 “목사님!” 하고 부르는  바람에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롱비치에 사는 분인데 TV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제 모습에 은혜를 받고 있답니다. 그런데 같은 비행기를 타서 반가워 계속 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저를 보는 것을 제가 의식했지만 제가 의식하지 못했다 해도 그 사람은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우리를 봅니다. 천사도 보고 하나님께서도 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시선을 느끼며 잘 달려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은 천당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훈련장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사막을 건너고, 마라를 만나고, 엘림을 만납니다. 목마르고 또 목마르다가 르비딤의 반석이 터져서 샘물을 마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을 주십니까? 
그 답이 고린도후서 1장 8절, 9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할렐루야!
왜 하나님께서 곤경을, 칼을, 풍랑을, 목마름을,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너무 잘 되고, 계속 잘 되면 태만해지고 망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셔도 우리는 살아.’ 하다가 마귀의 밥이 되고 망합니다. 너무 잘 되어 뻐기다가 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망하지 않습니다. 시련이 계속되면 오히려 강해지고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분도 중한 병이 든 딸이 있는 분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그 딸을 보고 물었습니다.
“어떠니?”
“건강합니다.” 할렐루야!
10년 전에 중한 병에 걸린 아이가 지금 중학교에 잘 다니며 공부를 잘하고 있고, 찬양대원으로 봉사도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지금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아이가 몸이 약해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아빠 엄마가 기도의 불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기도의 제목이 있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 가족이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되고, 편안하여 기도 제목이 없으면 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때때로 어려움을 주시니 감사함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 합시다.
“모든 것은 걸림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
좋지 않은 일도 그것을 밟고 올라가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서 별처럼 빛을 발하는 분 중 한 분이 이영덕 장로님이십니다. 시장, 안기부장, 장관, 국회의원, 그리고 국무총리까지 하신 귀한 장로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된 계기가 있답니다. 
그분이 6.25때 서울로 내려오면서 그만 깜박하고 통행증을 갖고 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인민군에게 붙들려 죽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5년간 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였는데 그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고위급 장교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 너 서울 가는 길이지?”
“그래.”
“너는 부잣집 아들이고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해. 그러나 내가 5년간 너와 함께 공부하면서 네가 너무 정직하고 너무 진실한 것을 알기 때문에 너를 죽이지 않는다. ○○까지 데려다 줄 테니 그 다음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라.”
그 공산당원 친구 때문에 그분이 산 것입니다.
그 후로 서울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주여! 주여!’ 하며 위기를 넘겼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다 3학년 때 인민군들에게 끌려가 즉결 재판을 받고 죽게 되었답니다. 인민군들이 무작위로 70명을 끌고 가서 즉결 재판을 한 뒤 죽이는데, 거기에 끌려간 것입니다. 그들이 62명을 죽이더니 “아이고! 죽이기도 힘드네. 여덟 명은 내일 죽이자.”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하루를 더 살게 되었답니다. 다음 날 아침, 주먹밥을 주어서 ‘조금 있으면 죽을 내가 이것을 먹어서 무엇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제 죽습니다…….’ 하며 기도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얘들은 뭐하는 애들이냐?”
그 노인은 원로 공산당원, 높은 지위에 있는 공산당원이었습니다.  
“예, 어제 미처 죽이지 못하고 남겨 둔 사람들입니다. 이제 곧 죽일 것입니다.”
“왜 죽이는데?”
“사상이 좋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아, 우리가 젊은 애들을 죽이려고 전쟁하나? 이 젊은이들을 설득해서 인재로 만들어 써야지, 죽인다고 되나? 풀어 주라.”
그래서 살았는데,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보고 그분이 깨달았답니다.
‘아하!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 같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구나.’라고 깨닫고 그때부터 ‘주여! 주여!’ 하니 시장이 되고, 안기부장이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총리까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 ‘나여! 나여!’ 하면 음란하고, 술 먹고, 도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니 자신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다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주여! 주여!’ 하면 세상 유혹을 이기니 개인도, 가정도 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여러 가지 시험은 우리에게 축복임을 알고, 디딤돌같이 잘 밟고 전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 야곱은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일은 다했습니다. 
야곱은 잽싸게, 신속하게 재산을 두 떼로 나누어 한 떼가 당하면 한 떼는 당하지 않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상술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재산이 100억이라면 100억을 다 투자하지 않습니다. 50억은 은행에 두고 50억만 투자합니다. 그러니 50억을 날려도 50억이 있으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절반만 투자하니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 자본, 남의 자본, 은행 돈, 사돈 팔촌의 것까지 다 갖다가 투자하니 망하면 사돈 팔촌까지 망하는 것입니다. 사업은 모험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특별히 어려운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야곱은 유대인입니다. 자기 재산을 두 떼로 나누어 ‘형이 앞의 떼를 치면 뒤의 떼를 데리고 피해야지.’라며 대비했습니다.
따라 합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해야 된다.”
내가 날씬한 몸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면 기도도 하지만 음식도 조절하고 운동도 해야 합니다. 음식은 세 그릇, 네 그릇씩 먹으면서 ‘하나님,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가서 날씬한 몸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이 골치 아픈 딸아.’라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 1부 예배를 마치고 나가니 한 자매님이 몸이 무겁다며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몸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무슨 운동을 하는지 물었더니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기도를 해 주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운동을 한다는 약속을 받고 기도를 해 주었는데, 운동만 하면 몸이 회복될 것 같았습니다.
따라 합시다.
“우리 할 일은 우리가 해야 된다.”
대학에서 일등하려면 시간 계획을 짜서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주여, 내가 수석하게 해주세요.’라고 해야지, 놀면서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십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제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광성교회 김창인 목사님께서 이런 교훈을 주셨습니다.
“일에 시달리면 사람한테 시달리지 않고, 일에 시달리지 않으면 사람에게 시달린다.”
무슨 말입니까? 과로할 정로로 일을 열심히 하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을 게을리 할 때 ‘목사가 뭐 저래’ 하는 욕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하루에 스물네 가정, 스물다섯 가정씩 심방했습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니 오늘까지 제가 목회하면서 사람에게 시달리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장로를 시켜주지 않았다고 ‘섭섭하다. 섭섭하다.’라고 섭섭해하는 소리를 들은 적은 가끔 있었습니다만 일을 게을리 한다고 욕먹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따라 합시다.
“일에 시달리면 사람에게 시달리지 않는다.”
회사에서도 일에 시달릴 정도로 열심히 일하면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기도를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야곱의 기도는 명기도입니다. 
따라 합시다.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순종의 조상은 이삭이고, 기도의 조상은 야곱이다.”
야곱은 기도의 용장입니다. 그 기도가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명하여 고향 족속에게로 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함께하시고 은혜를 주신다 하셨지요? 그런데 왜 제가 죽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큰 복을 주셨지만 제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지요? 제 씨가, 제 자녀가 바다 모래처럼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로 주신다 하셨는데 제가 지금 죽게 되었으니 이 약속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따라 합시다.
“이 약속,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것은 굉장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하는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꼼짝을 못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은혜를 주시고 저를 지켜주셔서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많이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제가 죽으면 어떡합니까? 하나님, 약속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살려 주십니다. 
여러분이 10년이 넘도록 십일조를 했는데 아직도 셋방에서 살고 생활이 좋지 않으면 말라기서 3장 10절에서 12절 말씀을 펴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하나님께 따져야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집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지 않으시나 시험해 보라 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황충을 금하여 주시고, 밭에 소산물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땅이 아름다워 열방이 너를 복되다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저는 10년 넘도록 십일조를 했는데 왜 이렇게 어려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답을 하실 것입니다. 
“너는 온전한 십일조를 안 했잖니?”
“아니에요. 저는 온전한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제가 병자를 위해 기도해서 나은 사람에 대해 책으로 쓰면 네 권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저는 ‘하나님, 제가 거룩하게 살았으니 응답해 주세요. 제가 열심히 충성하니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 18절의 예수님 말씀만 붙잡고 기도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귀신이 여러분을 보고 겁이 나서 도망가야 됩니다.
『새 방언을 말하며』
새 방언은 배우지 않은 말입니다. 배우지 않은 말이 기도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새 방언하기를 축원합니다.
『뱀을 집으며』
사도 바울은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을 시험해 본다고 독사 굴에 손을 넣고는 “이놈아, 물어 봐라.”라고 하면 안 됩니다.
따라 합시다.
“주를 시험하지 말라.”
어쩌다 실수로 물렸을 때는 물론 병원에도 가야 하지만, ‘주여!’ 하고 말씀대로 기도해서 독을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농약을 마시란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쩌다 좋지 않은 음식이나 상한 우유를 먹고 마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 아내는 얼마나 아끼는지, 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버리지 못합니다. 우유의 유통기한이 7일이나 지난 것도 버리지 못하고 그냥 둡니다. 언젠가 그것을 모르고 제가 마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마라의 쓴물이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으웩! 으웩!” 하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 주여! 이것 큰일 났습니다.’ 하며 배를 잡고 한 30분간 기도했더니 제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지요?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약속하셨지요?”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등학교 교사인 한 집사님께서 오늘 2부 예배에 참석하고 가셨는데, 예전에 축농증이 심해서 저와 함께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제게 와서 “목사님, 축농증이 다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픈 분들을 위해 손을 얹을 때마다 “주님, 약속하셨지요?”라고 합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손을 얹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 낫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여러분, 제가 기도했을 때 낫지 않아도 저에게 말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고쳐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병이 나아도 제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If you remain in me)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and my words remain in you,)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ask whatever you wish,) 그리하면 이루리라(and it will be given you. 그것이 너의 것이 되리라)』
따라 합시다.
“내가 예수 안에 거하고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는다.”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따라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뮐러 목사님은 항상 빌립보서 4장 19절의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46년 반 동안 3,000명의 고아들을 길렀는데 빵이든 우유든 무엇이든 떨어지면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을 손가락으로 비비면서 “이 약속대로 주세요. 이 약속대로 주세요.”하고 기도했답니다. 그래서 뮐러 목사님의 성경에는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 부분에 구멍이 났다고 합니다. 
따라 합시다.
“성경에 구멍 내자.”
성경에 구멍을 내야 됩니다.
“이대로 해 주십시오. 약속대로 해 주십시오.” 할렐루야!

무슨 일을 만나도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천사가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복의 디딤돌임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만나도 내가 해야 될 일은 내가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간증거리가 되고, 모든 문제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앞길에 이런 축복이 계속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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