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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사도행전 공부

사도행전 3강-예수이름의 권세로 낡은 성전체체를 뒤흔드는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3강-예수이름의 권세로 낡은 성전체체를 뒤흔드는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3장에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성전 미문 앞에서 베드로가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예수이름의 권세로 낡은 성전체제를 전복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된다.

 

1.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1~10절)

 

행 3:1~10절을 보면 앉은뱅이가 미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중 베드로와 만나게 되고

한 닢의 동전을 구하던 그의 기대를 넘어 예수 이름의 권세로 '일어나 걸으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받게 된다.

베드로의 입에서 선포된 말씀을 들은 앉은뱅이는 자신이 일어설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그 때 예수의 이름은 권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전 앞에 방치된 앉은뱅이에게 성전 종교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고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예수의 이름이 그를 소생시켰다. 그에게는 예수의 이름이 성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 역시 성령충만 하게 되면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왕적 다스림이 일어나게 된다.

앉은뱅이뿐만 아니라 성전을 드나들던 어느 누구도 그가 성전까지 뛰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적을 예상하지 못했다.

앉은뱅이가 일어선 기적은 장님이 눈을 뜨고 광야와 메마른 땅이 백합화를 피어내는 창조질서의 회복 사건이다.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신체적 핸디캡을 가진 장애인이면서 방황과 불순종의 광야생활 40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자화상이다.

성전체제로는 구원을얻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통하여 진정한 성도로 거듭난

사람이 모여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도록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곧 교회다.

율법과 성전체제로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을 걷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의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사건은 예수 이름의 권세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걷을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 상태를 일깨우신 사건이다. 이는 오직 성령 충만으로 가능하고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을 때 가능한 일이다.

 

2.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행3:11~26절)

 

행 3:11~26절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으로 소동하는 청중들에게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1절을 보면 앉은뱅이는 병이 나은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있다.

이것은 앉은뱅이가 예수이름의 권세로 단지 신체적으로만 온전해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좇는 제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

앉은뱅이의 변신에 놀란 이들이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들었고(11절)

베드로는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고 되묻는 것으로(12절) 설교를 시작한다.

13~15절에서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예수님은 신성 모독자가 아니라 구약시대에 이미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었음을 강조한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죽였는데, 실상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이요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공생애 동안에 나타난 엄청난 권능과 생명의 능력과 부활이다.

이어 13절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이 예수의 죽음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이 일에 우리가 증인임을 밝혀(15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었다고 믿은 그들의 불신앙을 부활신앙으로 반전 시킨다.

16절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앉은뱅이처럼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어 불순종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고,

17~18절에서는 죄책감으로 당황하고 있는 백성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내몬 죄는 알지 못하여 범한 죄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고난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의 필연적 궤적임을 알린다.

19절에서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이제부터라도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주되심을 고백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하고 19절 하반절에서 죄사함을 받는 날이 '새롭게되는 날'이라고 말한다.

새롭게 된다는 말은 죄책의 무게에서 풀려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선물, 살아 있는 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20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죄사함을 받고 새롭게 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예수님을 다시 보내 주실 것을 밝히고,

21절에서는 예수님이 당장 재림하시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통해 누누이 말씀하신 내용처럼

만유가 회복될 때까지 예수님은 하늘에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22~26절에서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가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의 궁극적 지향점이자 완성점임을 설파한다.

22~23절은 모세가 말한 바로 그 예언자, 즉 모세적 권위를 가진 예언자요 백성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예언자가

곧 예수님임을 밝히고 24절에서 사무엘 이후의 모든 예언자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때,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했다고 말한다.

25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이스라엘 청중이 선지자들의 자손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를 배척하는 것은

조상들의 신앙 전승을 배척하는 행위임을 논증한다.

26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복의 우선적 수혜자가 이스라엘 백성임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복을 이스라엘에게 먼저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이스라엘은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 의지는 꺽이지 않았고 예수님을 부활시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파송하셨는데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을 가져왔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전의 행위를 돌이켜 악함을 버려야 할 것이고

예수 이름과 주권을 세상 정사와 권세 주관자들에게도 외칠 수 있어야 하며,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예수의 이름으로 재창조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사명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시인하려는 우리 모두에게도 유효한 사명이다.

우리 개인의 자아갱신을 넘어서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려는 운동이 곧 사회 선교며,

동전 한 닢의 자선으로 앉은뱅이의 영적 갈망을 해소시키려는 성전체제에 대항하여 예수 이름의 권세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예배에까지 참여시키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사회 선교의 목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