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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사도행전 공부

오순절 성령강림(1)[행 1:21-26]

오순절 성령강림(1)[행 1:21-26]


오순절 성령강림의 뜻과 목적은 신자의 신앙생활을 결정짓는 핵심이 된다.

그래서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말고 입체적으로 해석해야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오늘 맛디아를 뽑은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힌트가 된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신자의 신앙생활, 신자의 특권 등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성령강림을 능력적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기도하지 않은 연고다'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일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전능한 힘을 얻게 되고 초월적인 간섭에 의한 형통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굳이 맛디아를 뽑을 이유가 없다. 무엇 때문에 결원을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 부분이 힌트가 되는 것이다.

 

뜻밖에도 대부분의 이단들이 신자들을 유혹할 때 바로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방법을 쓴다.

아프면 기도하라. 실패했으면 기도하라는 식이다.

말하자면 자동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령을 받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영적인 데에 대한 간절한 표현으로는 좋지만 실제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오히려 손해가 된다. 성경이 의도된 것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할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의도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사도들이라는 사실을 배워 보았다.

 

사도들이 주인공이라고 하면 성령께서 오셨으되 사도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신자들을 대접하고 그 의도하는 바가 그들을 소모시켜서 이룰 일이 아니라, 사도들 자신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 무궁하신 어떤 목표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강림이 그들의 일을 성공하게 하시며 완성하게 하시는 일이라면 사도행전에는 순교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예수 그리스도와 주의 나라를 증거하다가 하나씩 하나씩 어떻게 죽어갔느냐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성령의 오심이 기능적이거나 어떤 일을 이루는 비법으로 등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자명해진다.

사도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승천을 목도한 자들이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이 땅 끝까지 가야 하며 그 일에 성령의 임재하심이 필요했다고 일단 가설을 설정해 놓고 출발해 보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1-34)"

 

위의 두 구절을 살펴보면 천국은 우리 손으로 만드는 곳이 아니다. 천국은 상속하는 것이다. 상속은 자기가 만들어서 갖는 것이 아니다. 천국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마서 8장에 더 확실한 말씀이 나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5-17)"

 

후사, 상속자인데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한다. 이상의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성령이 오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외적인 일이 아니라 내적인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부분에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교회를 예로 들어보자. 교회란 신앙 좋은 사람끼리 모여서 일사불란하게 일치 단결해서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굶주림이 있는 곳에 따뜻한 손길을 베풀기 위해서 모인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켜 어디에 써 먹으려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를 쓰려고 하시겠는가? 우리에게 왜 천국의 벽돌을 쌓으라고 하시는가? 우리 자신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놓치고 살아간다. 그래서 누가 성령을 받았다 하면 나는 언제 저렇게 되어 볼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로마서 8장을 보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8-23)"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성령이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탄식하며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최고의 목표이고 가장 소중한 목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성시키기를 원하신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신자요 성령이 함께 와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것이 신자의 현주소이다.

완성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간섭하시고 장악하셔서 성령의 로보트를 만들지 않는다.

신자의 현주소, 신앙인의 갈등은 탄식이고 신자라는 존재는 이중인격자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와 계신 성령의 요구와 성령의 간섭을 좇지 못하는 나약한 자이고 내 마음대로 나를 움직여서 성령을 탄식하게 하며 그렇게 살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 때문에 자기 스스로가 탄식하는 이중인격자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우리는 내가 더 이상 나를 운명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탄식과 한숨 속에서도 배짱을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존재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우리는 이제 나 하나로의 '나'가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과 함께 한 '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는 성령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보신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을 파멸로나 실패로 바꿔갈 수 없다.

그것을 질그릇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자의 존재론이다.

신자란 그 자신의 잘잘못이나 그 자신의 수준에 의해서 평가받지 않고 성령이 와 계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 나라 시민에서 짤려 나갈 수 없고 파멸의 자리에 가서 설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얻은 자는 누구나 성령이 와 계시고 성령이 와 계시면 포기되거나 실패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이 '나'라는 인간에게 성령의 수준과 깊이와 거룩함에 있어서 동등함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딴 짓을 하면 우선 신앙적인 양심이 우리를 흔든다. 그래서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딴 짓을 하면 신앙 양심이 불편한 자가 된다. 그래도 죄악을 더 짓게 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과 몸에 손을 대실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

세상 일을 너무 좋아하니까 세상일을 좌절시킬 수밖에 없다. 성령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세우지 않으신다. 세상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라 신령한 사람을 만드는 게 목표이다.

 

환경과 가는 길을 좌절시키고 그래도 안되면 몸에 직접 손을 대셔서라도 이쪽으로 끌고 가신다. 그런데 이 방법이 재미있는 것은 본인이 납득하게 하고 이해하게 하고 자기 발로 들어오게 하시지 가만히 있는데 붙잡아서 질질 끌고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꾸 강조하는 이유는 성령이 임하면 확 변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항복과 헌신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요구하시지 우리를 소모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 우리를 얼마나 대접하고 얼마나 높이시는가에 대한 철저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17)"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뜻을 가지는가?

이제 그가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를 바른 방향을 잡게 하고 거룩한 곳으로 인도할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긴 시간과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하나님이 양보하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실패하지 않는가 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1-5)"

 

내가 실패하면 성령도 실패하는 것이다. 내가 지옥가면 성령도 지옥가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보증이라는 것이다. 보증이라는 것은 계약금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완성의 자리에 가기까지는 죽지도 못한다. 절대로 못 죽는다. 신자는 이렇게 되고야 마는 존재이다. 그 일을 하나님이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인생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를 써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고 거룩을 이루시고 영광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인생에 비극은 없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그것도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요 사업이 망하면 그것도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어떻게 초대받고 있고 부름받고 있고 어떤 목표를 향하여 하나님의 간섭 속에 있는가를 이해하셔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인생 속에서 겪는 모든 일들을 소중히 해야 한다.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감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