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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사도행전 공부

오순절 성령강림

(사도행전 2:1-21)


  오순절에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제자들이 모여있던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모여 있던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서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마침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이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에는 이들이 15개의 서로 다른 지방에서 온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들은 각각 자기 말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모여 있던 무리들은 갈릴리 사람들인 제자들과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자기 지역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놀랐습니다.  어디에나 늘 그렇듯이 거기에도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서서 큰 소리로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사건을 기초로 해서 어떤 분들은 성령과 방언을 연결시킵니다.  방언을 해야 성령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방언을 말했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말한 방언을 모여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말로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방언과는 다른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그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고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방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필리핀에는 150여 개가 넘는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기 부족 언어, 인근 부족 언어, 국어인 따갈록어, 영어 등 보통 4~5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역하는 지역은 대부분 일루가노 지역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영어나 따갈록어를 쓰는 것보다 일루가노를 써 주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제일 편안해 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아무리 영어 표현을 잘 한다고 해도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인 한글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이 가장 알아듣기 편한 그들의 방언으로 말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이 한 방언은 제자들의 입술을 통해 나왔지만 그 내용은 성령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의 방언은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전달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꼭 들어야 했던 그 방언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제자들이 했던 방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했던 모인 무리들의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사건 뒤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가 제자들이 했던 방언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36절에 있는 대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가지는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방안에 가득했던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제자들 위에 임하고 서로 다른 방언으로 말했던 오순절의 사건은 복음전파와 연결이 됩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말로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성령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큰 일' 곧 '예수가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결국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복음으로 귀결됩니다.  제자들이 경험한 오순절의 성령체험은 복음전파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신앙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른다면 우리 신앙은 반쪽 신앙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복음전도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 그 자체에 몰입하도록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체험은 복음을 전하는 체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부산역 광장에서 전도를 한 일이 있습니다.  역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중년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은 우리가 전도하고 있는 곳으로 오더니 자신이 예전에 모 기도원에서 병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배에 복수가 차고 거의 죽을 뻔했는데 기도원에서 기도 받고 병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흉터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배를 걷어 보이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알았다고 하면서 그 여인의 행동을 만류했습니다.  그 중년 여성은 술이 만취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고 우리들에게 자신이 기도원에서 병 고침 받았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왔던 것입니다.
  그 여성은 병을 고침 받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그 여인의 삶을 바꾸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신앙의 체험을 가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체험신앙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은사를 체험하고 방언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단지 신앙의 체험, 은사의 체험으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오늘처럼 왕성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모인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그 날 하루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고 성령사역의 시작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각자에게 강림하시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주와 그리스도로 드러나야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자기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서 예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가 방언을 말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신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우리의 삶이 그 말씀대로 살고 있을 때 나타납니다.  곧 성령이 주신 말씀인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대로 사는 삶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