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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강용규목사

예수께서 죽으신 목적 

예수께서 죽으신 목적 2009.04.04강용규목사▒▒▒ 마가복음 15:1~15



사실 제가 구약성서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구약의 인물들을 통해서 인생의 교훈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지혜로운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떠나 시돈이라는 나라에 자신의 나라를 저당 잡혀 돈을 빌린 후 그 빚 때문에 시돈에게 땅을 빼앗기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욕심을 냅니다. 나봇을 불러다 포도원을 자신에게 주면 그에 상당하는 대토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조상 때부터 유업으로 내려오는 땅을 왕에게 파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습니다.”고 맞대응합니다. 아합은 성경에서 금하는 것을 행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땅을 포기하기도 싫었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모사를 꾸며 나봇을 죽게 하고 아합에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게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3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에 대해 참람한 말을 하고 불경스러운 일을 행했다’는 이유로 고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묵으로 대응하셨다는 것은 ‘너희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너희의 거짓 증언하는 죄까지도 내가 끌어안고 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4장 9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나니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 7장에 기록된 ‘아간’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금과 은을 훔쳤습니다. 시날산의 외투도 훔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신앙 안에서의 죽음은 단순히 육적인 죽음을 뛰어넘습니다. 영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찬양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무감각해집니다. 무감각해지고 감동이 없을 때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다시 느끼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은 생명에 이른 길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어렸을 때 들었는데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에 남는 예화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고등학교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어머니의 얼굴은 보기에 흉측했습니다. 손은 쪼그라들고 손등은 쭈글쭈글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늘 오른쪽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창피한 아이는 엄마에게 금족령을 내려 외부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친한 친구들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딸의 친구를 본 엄마는 너무나 반갑고 기쁜 마음에 저녁식사를 준비합니다. 장갑을 벗고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을 딸이 보고는 엄마에게 화를 냅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장갑을 벗은 채 딸아이와 그 친구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차려 줍니다. 그 모습을 본 딸이 친구들이 돌아가고 난 후에도 화가 나서 엄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너를 낳은 지 얼마 안 돼 너를 2층에 재워 놓고 밑의 층에 내려와 빨래를 하던 중이었는데 이웃집에 불이 났단다. 그 불이 번져 우리 집을 삼켰단다. 그 때 나는 너 밖에 생각이 안 났단다.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너를 이불 포대기에 싸서 내려오다 내가 그만 넘어졌단다. 그 다음엔 정신을 잃어버렸단다. 깨보니 병원이었는데 온 몸이 쑤시고 아프고 당기고 고통스러웠는데 내 옆에서 네가 편안히 자고 있었단다. 나는 치료를 받느라 오랜 기간 병원에 있어야 했고 병원에 퇴원해 집에 돌아와 사는데 네 아버지가 내 몰골이 더 이상 보기 싫었는지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단다. 그리고 너하고 나만 남게 되었단다. 사실은 그 때 엄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단다. 이렇게 사느니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차마 너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단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 들은 딸의 눈에서 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다가가 와락 어머니를 껴안고 흉측한 엄마의 얼굴과 손에 입맞춤을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고백합니다. “엄마의 찌그러진 얼굴과 손은 수치스러운 얼굴이 아닌 저를 사랑해주는 거룩한 얼굴이고 손입니다.” 이 예화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우리가 깨닫게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까닭은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다”는 말씀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은 이유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그 이기심이었습니다. 아간이 금과 은과 시날산 외투를 훔친 이유도 다름 아닌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기심은 욕심의 근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너만을 위하는 이기심에서 너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위한 삶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존 뉴턴이 노예를 사고파는 삶을 계속해서 살았다면 아마도 그는 찬송가 405장을 작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 아닌 끝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그리스도를 위해 산 사람들은 영광의 끝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산 사람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기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내 삶의 목적을 이기적인 데서 주를 위해 사는 거룩한 삶으로 바꾸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이 사순절 기간에 여러분의 삶이 바뀌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