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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박봉수목사

설교를 통한 말씀의 역사(행 3:11-26)




설교를 통한 말씀의 역사

(행 3:11-26)



저는 목사로서 늘 설교와 씨름하고 삽니다. 한편으로는 설교가 제게는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하고, 또 보람이 되기도 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는 벅찬 감격이 제 자신의 존재 의미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하는 설교말씀을 듣고 삶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분들, 믿음이 자랐다고 하는 분들, 은혜 받았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설교가 제게는 큰 부담입니다. 계속되는 목회일정 속에 지속적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제게는 큰 부담입니다. 평균 1주일에 10편정도 설교를 해야 하는 하는데, 벌써 목회자로서 설교를 시작한 지가 35년이 넘는데도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떤 때는 설교준비를 하는데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 가닥을 잡지 못해서 쩔쩔맬 때가 있습니다. 설교시간은 다가오는데 설교준비가 안 돼서 초조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짧지 않은 세월 설교를 해왔는데도 여전히 설교는 제게 큰 부담입니다.



더 큰 문제는 때때로 설교가 제게 큰 좌절을 느끼게도 한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제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에서도 안할 수 없어서 설교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면 정말 하나님께 죄송하고 교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자책하게 됩니다.



때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전했지만 교인들이 경청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 설교를 오랫동안 들었는데도 신앙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신앙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면 정말 낙심하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말씀의 종으로 쓰고 계신가고 의심해 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설교를 해가야 하는 제게 설교는 여전히 무겁고도 힘겨운 과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사도행전을 읽으며 큰 충격과 도전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행 2장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후 베드로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한 설교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행 2:4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된 사람들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 3장을 보면 이번에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한 설교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행 4:4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들은 뒤에 남자만 약 오천 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계속해서 이런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 두 번의 설교는 정말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설교를 듣고 한 번은 삼천 명이 세례 받는 역사가 나타났고, 또 한 번은 설교를 듣고 믿는 사람들이 남자만 5천명이 늘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도대체 베드로가 어떻게 설교했기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일까요?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또 어떻게 이 설교를 들었기에 이렇게 결단하고 변화하게 되었을까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제게 큰 관심이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도 역시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이런 물음을 마음에 품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에 대한 기대



우선 본문의 설교가 행해진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행 3:1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라는 정해진 기도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미문이라는 문을 통해서 성전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거기에 앉아 구걸하는 장애인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을 걷게 했습니다. 놀라운 신앙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 9-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성전에 있던 사람들이 이 신앙사건을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성전 안의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에서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설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런 말입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이 이 놀라운 신앙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말해주기를 기대하며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입을 열었던 것입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이적을 행했는지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는 저들에게 이 이적을 행한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잘라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예수 바로 그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설교 본론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설교가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던 것은 이미 저들이 놀라운 신앙적 사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려고 온 귀와 마음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저들에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해 전에 중국의 하남성 지역의 교회가 크게 부흥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현지를 답사한 일이 있습니다. 매년 가는 곳이기 때문에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보다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곳 목회자들을 만났습니다. 마침 한 분이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신학생 시절에 농촌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간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가정교회 형태로 예배드리는 곳을 찾았답니다. 교역자가 없이 자기들끼리 예배를 드리다가 신학생이 왔다고 해서 교인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였답니다. 정말 은혜스럽게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났는데 교인들이 가지 않고 말씀을 더 들려달라고 하더랍니다. 자기가 준비해온 말씀을 다 전했기 때문에 전할 말씀이 없는데도 또 전해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창세기부터 성경말씀을 읽으며 그 내용을 하나씩 전했답니다. 그날 교인들이 예배 후 오후 내내 말씀을 들었고, 저녁을 먹고도 계속 말씀을 나누었답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국교회의 부흥의 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교인들의 준비된 마음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저들의 마음을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기대로 충만케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역사는 들을 귀를 준비하고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말씀의 역사를 믿고 기대하지 않고 그저 해야 할 의무로 생각하고 설교를 하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기대감이 없이 반복되는 설교로 치부하며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말씀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일이 중요합니다.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 선포



다음으로 설교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교는 예수를 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예수가 이 사람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는 누구인가를 13-15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 예수는 저들이 원했고 빌라도가 내어주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이 18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셔서 예수 그분이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한 마디로 말씀을 선포한 설교였던 것입니다.



사실 저를 비롯한 설교자들이 늘 받는 유혹이 있습니다. 바로 설교를 잘해서 인기도 얻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떻게 하면 멋진 설교를 해서 인기를 얻고 교회도 성장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명설교가로 이름난 사람들의 설교를 흉내 내고, 그들의 설교를 표절할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설교를 교회성장의 도구로 쓰려고 하는 설교의 타락, 바로 그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쓴 [설교]라는 책을 보면 두 가지의 설교가 있다고 구분해 놓았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섬기는 설교’가 있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이용하는 설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을 이용하는 설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내용을 말하면서 성경 말씀을 증빙자료로 사용하는 설교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 노만 빈센트 필목사의 ‘긍정적 사고방식’에 관한 설교들,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에 관한 설교들입니다. 이런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도 말씀의 역사를 나타내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을 섬기는 설교는 그야말로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는 설교입니다. 말씀을 성실하게 잘 연구해서 말씀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설교를 말합니다. 이런 설교는 때로는 사람들의 관심은 끌지 못할지는 몰라도 말씀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강단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설교여야 합니다. 물론 그 시대의 주요이슈를 다루기는 해야 하지만 그것이 설교의 중심 메시지여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정치 이야기, 먹고사는 이야기, 사회의 새로운 풍조들을 성경적 관점에서 다룰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주가 돼서는 안 됩니다. 자칫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세상 이야기를 전하는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예화나, 적용을 위해 다루는 시사문제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섞는 유모에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삶의 변화



이제 설교의 결론을 살펴보겠습니다. 1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한 마디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행 4:4을 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을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그 예수를 주님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사람들끼리 언쟁을 하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서로 언성을 높이며 상대방을 몰아세웠습니다. 한 사람이 조목조목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몰아세웠습니다. 그 때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반응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 나한테 설교하니?”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설교하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도중에 회개하라고 하면 귀를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위로하는 이야기, 격려하는 이야기, 그리고 축복하는 이야기 등에 ‘아멘’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절대 진리, 도적적인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니, 여기저기 상대적인 진리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 도덕다원주의가 나타납니다. 이런 시대에 죄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을 받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죄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또 하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 목회자의 권위, 스승의 권위, 부모의 권위, 지도자의 권위... 이런 권위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살라는 식의 권고가 권위적이라고 공격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개하라는 말은 시대착오적이라고 공격을 받습니다.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의 설교 유형을 보면 부드러운 설득이 주를 이룹니다. 죄에 대한 신랄한 지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회개에 대한 준엄한 선포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결과 회개의 역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삶의 변화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18세기 영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했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자신의 설교를 책으로 만들어 출판하자는 출판사의 제의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설교의 번개와 천둥을 책에 담아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설교에는 번개와 천둥과 같은 회개의 촉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설교에 베드로의 번개와 천둥과 같은 회개의 촉구가 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서 회개했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설교를 통해 말씀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더 영적으로 깨어서 성령의 인도 하에 성실하게 설교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설교를 경청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삶의 변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