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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성탄(눅 2:8-14)


설교일 2018-12-23



영광의 성탄

(눅 2:8-14)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영광’(榮光)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배우가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인사말을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영광을 팬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인 경우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이 과분한 자리에 오르게 됐을 때 “가문의 영광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영광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말 사전을 보면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라고 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남다른 업적을 세웠거나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할 만한 공을 세워서 그 이름이 빛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 영광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쓰이는 영광이라는 말은 겉으로 볼 때는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구약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카보드’(כבד)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무겁다’라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영광이란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탁월성과 위대함’을 말합니다. 그 탁월성과 위대함이 클수록 드러나는 영광이 큽니다.

다음으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 ‘독사’(δόζα)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빛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이란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탁월성과 위대함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들이 강열하게 드러날수록 영광이 큽니다.

결국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영광이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탁월함과 위대함을 말하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 그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15:4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우선 이 말씀은 하늘에 속한 것에게도 영광이 있고 땅에 속한 것에도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 즉 영적인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영광이 있고, 땅에 속한 것 즉 인간과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안에는 탁월함과 위대함이 있고, 그것들이 드러나게 될 때 그 영광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최근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원래 이분이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곳에서도 감독으로 오라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감독으로 초청을 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갔습니다. 가서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약체였던 베트남 축구가 동남아에서 강자로 부상하게 됐고, 이것이 베트남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게 됐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국민들이 이분을 영웅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분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안에는 저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남다른 탁월함과 위대함이 있습니다. 때가 돼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의 영광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께서 담아주신 저마다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 15:4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하늘의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천체들의 밝기가 서로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신 영광이 저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이 있고, 역사를 관통하며 그 빛을 발하는 위인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영웅들 가운데도 저마다 그 영광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영광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밤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모든 천체들도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모두 다 자취를 감춥니다. 여전히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지만, 그 모든 빛은 태양 빛의 그늘 아래로 묻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그 모든 피조물이 나타내는 영광은 존재감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생생하게 드러난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저 천국에 가면 늘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우리 눈으로 보며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 영광을 직접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입니다. 저들이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에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다

본문 2:9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신 날 그 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 지역의 들판에서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저들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주의 천사들이 나타나 저들 곁에 섰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주의 영광이 저들을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영광을 본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출 33:20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잘 압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들이 주의 영광을 보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 1:1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뒤에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서 늘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면서 은혜와 진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사건은 우리에게 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더 이상 주의 영광을 보고도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영광을 본 자들은 더 큰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이후 주의 영광 보기를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고형원 형제가 만든 복음성가가운데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의 영광을 사모하며 주 앞에 섭니다. 이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의 눈을 열고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배 중에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찬양하며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며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성탄이후 우리에게 임하게 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주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이제부터는 주의 영광을 구하며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직접 주의 영광을 자기 눈으로 보았던 사람입니다. 행 22:6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의 영광을 직접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 22:11을 보면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 강열한 주의 영광의 빛을 보았기 때문에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서 회복되고 다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삶은 세상영광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구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주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기초로 늘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사실 세상 사람들이 땅의 것을 생각하며 삽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영광을 구하며 삽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이름을 널리 떨쳐서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세상영광이 가장 귀하고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주의 영광이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땅의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삽니다. 세상영광을 구하기보다는 주의 영광을 구하며 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줍니다. 주의 영광이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세상영광을 구하던 삶을 청산하고 주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게 해 줍니다.



주께 영광을 돌리다.

본문 2: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한 마디로 목자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점입니다.

우선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자기의 영광이 드러날 때 그 영광을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기가 금메달을 딴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서 이 영광은 내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받아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받아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목자들에게는 하나님께 올려드릴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바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선포하고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이 말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한 구체적인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전했습니다.

본문 눅 2:16-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목자들은 주의 영광을 본 후 자기들이 체험했던 것들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마리아와 요셉은 목자들이 전해 준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보인 반응이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저들이 놀랍게 여겼고,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목자들이 본 주의 영광에 저들도 참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래 전 잠시 미국에 머물며 한 교회의 구역예배와 같은 은혜 나눔의 모임에 참여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10여명이 모였습니다. 돌아가면서 각자가 한 주 동안 받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제일 첫 사람이 받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한 주 동안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 영적 체험을 세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참석한 모두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눔이 끝나자 모두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한 주 동안 그 사람과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게는 무척 낯선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박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찬송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목자들이 찬송하며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목자들이 어떻게 찬송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기존에 있던 찬송을 불렀는지 자신들이 가사를 만들어 불렀는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들이 주의 영광을 본 뒤에 찬송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송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 96:1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새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하나님의 백성은 새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노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노래란 어떤 노래일까요?



시인 김기림의 [새노래]란 제목의 시집이 있습니다. 1945년 광복이후 발표된 각 지상에 발표된 대표적인 시 32편을 엮어 펴낸 시집입니다. 시인들이 저마다 광복의 감격을 시로 발표한 것들을 모은 시집입니다. 시인 김기림은 그 시들을 새노래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광복의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시인들의 시적 감수성으로 그 감격을 읊은 시를 새노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본 뒤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 노래가 새노래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이 부른 노래가 바로 이 새노래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 그 큰 감격을 찬송으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성탄은 우리의 노래를 바꿔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과거 막연히 부르던 노래가 아니랴 주의 영광을 본 후 부른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넷째주임과 동시에 성탄주일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기뻐하며 경배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목자들처럼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목자들처럼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오심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새노래로 찬양을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