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3:1-12 2015.9.27(일)
관계를 치유하라
오늘은 민족고유의 명절 추석입니다.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아 내려가시고 자녀들을 찾아 올라오신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미리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떠나 부모님을 뵙고 성묘도 하고 돌아왔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내년에 90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건강하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어머니는 85세인데 몸이 안 좋습니다. 특히 관절이 안좋아 보행이 불편합니다. 절뚝 거리며 걷는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정신도 약해지신 것 같아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났습니다. 사람이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식으로서 어떻게 도울 길이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가족 건강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관계의 건강입니다. 아프면 약먹고 병원가면 좋아지지만 관계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많은 노력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폭력중에서 가정폭력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명절에 일어난 가정폭력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 해 설명절동안 접수된 가정폭력건수가 3,138건이었답니다. 그리고 작년 추석 명절 5일동안 접수된 가정폭력 사건이 4,560건이었답니다. 신고안된 사건도 많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명절에 만나 다둘까요? 관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만나 밥상머리에는 앉았지만 평소에 좋지 못한 관계를 갖다 보니 무슨 사소한 말다툼이 생기면 불상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도 잘 먹고 조상에게 성묘하는 것보다 중요하지만 가족간에 서로 사랑하고 혹시 잘못된 관계가 있으면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핵심이 관계인 것을 아십니까? 창1:1에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했습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 사이에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산? 바다? 사람? 아닙니다. “과”입니다. “하늘과 땅”. “과”입니다. “과”는 곧 관계를 의미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관계를 지으셨다”고 말했습니다.유대인 성경 주석자들이 창조에 대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하고 싶어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인류의 가장 큰 질병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테레사가 말했습니다. “외로움이죠. 외로움이 인류의 가장 큰 질명이죠”. 그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혼자 되는 일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삶은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죄는 그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성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고 선교는 세상을 하나님과 관계맺게 하는 것이며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적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정은 가장 관계지향적인 공동체입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을 약속하고 혼인관계를 맺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고 그와 운명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형제는 함께 피를 나눠 혈연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관계들이 잘 보존되고 자라 가정에서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을까요? 혹시 깨어진 관계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의 주인은 야곱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통해 이를 볼까요?
부모와의 관계-사랑하라.
먼저 야곱과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난지 아십니까? 야곱은 구약의 대표적인 잉꼬부부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부모는 참 훌륭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식들을 편애한 것입니다. 이삭은 쌍둥이를 낳았는 데 형은 에서요 동생은 야곱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는 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는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창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부모의 편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편애는 고르게 사랑받지 못한 것입니다. 편애는 사랑을 못 받은 쪽과 너무 많이 받은 쪽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다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못받아도 문제지만 너무 받아도 문제입니다. 너무 못받으면 애정결핍증이 생기고 너무 많이 받으면 애정과잉증이 생깁니다. 너무 못 받으면 반항아가 되고 너무 많이 받으면 유약자가 됩니다.
문제는 편애의 이유입니다. 28절을 다시 보면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좋아한 이유가 이삭이 사양한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마도 남자답고 용감한 에서를 통해 자기 자신의 젊음을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건장한 체구에 말은 없지만 밖에 나가 동물을 사냥해온 큰 아들이 믿음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반대였습니다. 에서와 달리 늘 어머니곁에서 나긋 나긋하게 말 잘듣는 야곱이 더 사랑스러웠습니다. 혹시 아버지가 너무 에서만 좋아하니까 야곱이 안쓰러워서 그를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잘난 자식을 사랑하고 어머니는 못난 자식을 사랑한다”. 문제는 야곱이 부모를 떠나 멀리 하란으로 간 것이 이 편애와 무관치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그를 알아주고 형과 똑같이 사랑했다면 야곱이 집을 나갔을까? 어쨓든 야곱은 20년동안 낯선 땅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고생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로 부터 받은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잊기 위해 야곱은 거의 일중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가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린 이유는 부모의 사랑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처절한 자기 생존의 방식이었지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자녀를 똑같이 사랑합니까?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합니까? 제가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읽다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에 어머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탕자의 아버지는 훌륭했습니다. 아들이 집나간다고 해도 나무라지 않고 재산을 나눠 줍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아버지가 좋아도 어머니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탕자에게 어머니가 있어서 날마다 그를 위해 기도했다면 그가 집을 나갔을까요? 탕자가 사춘기가 되어 혹시 철이 없어 가출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다가가서 “아들아, 왜 그러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라고 울고 다독거렸다면 그가 집을 나갔을까요? 탕자의 문제는 어머니의 사랑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요즘 조기 유학 바람이 불어 심지어 한국말도 못하는 갓난아이를 유학을 보냅니다. 그래서 영어를 조금 잘 수는 있지만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컬럼비아 공대 조승희 사건이 아닙니까? 자녀는 일찍 유학을 보낼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이 많이 받을 존재입니다.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 유착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를 통해 자존감이 생깁니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어릴 때 부모의 품에 있을 때 형성됩니다. 그런데 그 자존감이 형성되기도 전에 부모를 떠나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실 상처도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상처받습니다.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 사랑할 때도 행복한 것인데 부모의 사랑없이 자라다보니 누군가를 쉽게 의지합니다. 그러다가 사랑에 실패하고 성중독에 빠지고 게임중독, 일중독에 빠집니다. 모든 중독은 부모가 줄 사랑의 결핍 때문에 생긴 빈 자리입니다. 이번 추석에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편애하지 않기를 결심하기 바랍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였지만 둘째 아들은 집나가고 큰 아들은 집에서 불평하면서 일했습니다. 대화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신앙의 부모가 되는 것보다 좋은 관계의 부모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탕자의 큰 아들은 일은 참 잘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는 없었습니다. 자녀가 일잘하고 공부잘한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그 공부가, 그 일이 부모가 줄 사랑의 결핍에 대한 생존수단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녀 입장에서는 부모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부모도 의도적으로 자녀와 나쁜 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가 나처럼 어렸을 때 상처를 받고 자랐을 가능성이 첫째입니다. 부모가 너무 어려서 충분히 자녀를 가질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나를 낳았을 가능성이 두 번째입니다. 부모가 충분히 배우지 못해서 자녀교육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세 번째입니다. 네 번째는 너무 먹고 살기 힘들어 바빠서 그랬을 가능성입니다. 부모가 잘한 것도 아니고 나에게 상처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차피 그 일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제가 살아보니까 자녀는 부모를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부모만큼 살아봐야 부모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부모와 동시대를 살 수 있습니까? 부모의 형편과 똑같아야 부모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 갑니까? 그래서 자녀는 절대 부모를 100%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해해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부모처럼 안돼야지” 하면서도 부모를 닮지 않습니까? 야곱이 그랬습니다. 야곱도 아버지처럼 편애하지 말아야지 하고 백번을 다짐했겠지요. 그러나 나중에 요셉을 편애해서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지 않아요? 야곱이 부모를 충분히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면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용서하면 상처가 반복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 용서와 사랑으로 아름다운 관계가 회복되기 바랍니다.
부부 관계-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다.
우리가 회복할 것은 부모자식간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부부의 관계도 회복해야 합니다. 사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은 부부관계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부관계가 가정의 행복과 불행의 주원인입니다. 이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아내 없이 혼자 사는 남성은 평균 5년 더 빨리 죽는다. 그런데 정작 아내가 있는 남성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여성도 남편 없이 혼자 살면 남편이 있는 여성보다 더 일찍 죽는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사는 여성 중에는 암에 걸리는 아내가 많다고 한다”. 무슨 말입니까? 여자가 남편이 없으면 일찍 죽는 데 남편이 있으면 암이 많다. 남자가 아내가 없으면 5년 먼저 죽는 데 아내가 있으면 죽고 싶은 사람이 많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입니까? 아내와 남편은 서로 필요한 존재면서도 서로 조심해야 할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나 자식처럼 있기만 하면 좋은 존재가 아닙니다. 있어야 하되 반드시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말할 때 야곱처럼 좋은 모델은 없습니다. 이유는 그가 아내를 넷이나 데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남자들이 선망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어떻게 나는 간신히 하나하고 사는 데 야곱은 넷씩이나 같이 사는가? 참 불공평하고 부럽다“. 이것이 저를 포함한 모든 남자들의 불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네 아내와 잘 살았고 거기서 13남매를 낳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자녀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되었고 야곱은 네 아내 누구와도 이혼하지 않고 끝까지 살았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야곱의 가정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위기도 있었습니다. 또 네 아내를 똑같이 사랑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해로했고 완주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일까?
저는 그 원인을 “언약”에서 찾습니다. “계약”이란 말이 있고 “언약”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말입니다. 계약은 상호적입니다. 양 당사자가 있습니다. 조건적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내 입장이 결정됩니다. 가령 집을 내 놓았는 데 5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3억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계약이 성립안됩니다. 서로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언약은 다릅니다. 그것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입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고향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부르시더니 집앞에 논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 약 300평 정도의 작은 논이 있습니다. 그 논은 우리 집앞에 있어서 대대로 우리 집에서는 매우 귀한 땅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러시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살지는 몰라도 항상 이목사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어. 우리 집과 이 논은 이목사의 몫이야”.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공부하다 때가 되어 목회하고 있을 뿐입니다. 목회하면서 저는 부모님께 늘 미안한 심정입니다. 제가 아버지를 모신 적도 없고 아버지에게 무엇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줄 것이 있다면 다른 아들들에게 주셔야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저와 상의도 안하고 일방적으로 저에게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상대대로 내려온 집과 그 앞에 있는 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상대방이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일방적으로 준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언약의 대상은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주는 것입니다. 계약은 돈받고 주는 것입니다. 언약은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계약은 두 당사자가 물질적 관계로 만납니다. 언약은 은혜의 관계로 만납니다. 그날 저는 깜짝 놀랐고 황송했습니다. 결국 제가 받지 않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성경의 하나님의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땅과 자손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언약했습니다. 그 약속은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다윗의 족보가 아니더라도 받은 약속이 있습니다. 배우자의 약속입니다. 창2:22입니다. “여호아 하나님이 아담에게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다같이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무 대가 없이 하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끌어 왔다”는 말은 아담과 하와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돈받고 하와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하와와 계약서쓰고 아담을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계약적 관계가 아니라 언약적 관계의 산물입니다. 부부가 어떻게 만났든 하나님이 만나게 했기 때문에 만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결혼식장에 가보면 몇 가지 관습이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케투바”라는 결혼서약서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케투바”는 “우리가 결혼하면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다짐하고 약속하는 일종의 결혼서약서입니다. 그것을 주고 받는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만 들어가는 작고 투명한 망사안에서 합니다. 이것은 옛날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난 것을 상징합니다. 결혼은 하나님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다 끝나면 신랑 신부가 유리 그릇을 들어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쨍그랑”하고 깨집니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도 우리 인생을 쨍그랑 하고 깨뜨리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혼식때 이렇게 서약했습니까? “나는 당신을 영원히 합법적인 나의 아내로, 남편으로 맞이하되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사랑하고 아끼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한 엄숙한 약속이었음을 믿습니까? “우리가 사랑할 때까지”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돈 잘 벌때까지, 아내가 젊고 아름다울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이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셨으니 우리도 하나님께 오직 은혜로 살겠다고 언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입니다.
혹시 잘 맞지 않는다. 마음이 안든다. 내가 잘못 결혼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인내하고 참다보면 결국 알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이래서 우리를 만나게 했구나”. 야곱이 네 아내와 끝까지 해로한 것을 아십니까? 혹시 그가 사랑했던 라헬과는 끝까지 갈 수 있었지만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레아와도 끝까지 간 것을 아십니까? 야곱은 레아도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여 끝까지 갔던 라헬에게서는 요셉이라는 위대한 아들을 주시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약속을 믿고 끝까지 갔던 레아에게는 레위같은 아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유다같은 아들을 통해서는 유다왕국을 이루었습니다. 심지어 몸종이었던 빌하, 실바와도 끝까지 갔더니 그 자녀들이 갈릴리 지역을 분배받아 먼 훗날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의 족속이 된 것을 아십니까? 미국의 가정 상담가 마틴박사가 주부들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좋은 남편입니까?” 했더니 결혼 1년차 아내들의 98%가 “예”, 결혼 2년차 아내들의 56%가 “예”, 10년이 지난 아내들은 겨우 6%만이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혼 20년이 지나자 아내들은 또 다시 95%가 “예”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박사가 이렇게 결론을 썻습니다. “부부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하나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세월 참고 지내면 반드시 좋은 부부가 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부로 만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약속이요 선물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약으로 만나지 않았고 언약으로 만났습니다. 이 믿음이 부부관계를 회복시키고 치유합니다.
형제관계-비교하지 말라
야곱을 통하여 배우는 세 번째 관계가 형제관계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야곱에게는 간발의 차이로 먼저 태어난 쌍둥이 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형제들이 그렇듯이 둘은 서로 경쟁적 관계로 자랐습니다. 둘은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이 달랐습니다. 아마도 에서는 다혈질에 가깝고 야곱은 담즙질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다혈질은 급하고 말이 많지만 낙관적입니다. 담즙질은 성취욕이 많고자기 주장이 강하고 엉뚱하지만 또한 꿈이 많습니다.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형제가 한 부모밑에 자라면서 끊임없이 경쟁합니다. 이 경쟁심은 동생인 야곱편에 훨씬 많았습니다. 야곱이 속상했던 것은 자기가 간발의 차이로 태어나 장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장자는 많은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아버지의 재산을 두 배나 많이 상속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차지하려고 온갖 궁리를 하다 발각되어 밤에 야반도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20년간 하란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주 설교대로 얍복강을 건넜는 데 거기는 자기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년만에 형제가 서로 만났는 데(그림) 이 그림은 18세기 이태리의 화가 프란체스 코 하에즈가 그린 그림입니다. 오랜 여행 끝에 낙타에 탄 야곱의 가족들이 내려 에서와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둘이 만난 긴 세월의 간격만큼 형제가 가졌던 치열한 적개심과 깊은 미움, 그리고 살벌한 경쟁심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에서만 없으면 내가 장자가 되었을 텐데” 했던 야곱입니다. “욕심많은 야곱 때문에 내가 망했다”라고 소리쳤던 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경쟁심이란 인간의 삶에 행복보다는 불행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야곱의 일생은 누군가와 다투며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어릴 때는 에서와 장자권을 다투고, 여자를 놓고는 레아와 라헬과 다투고, 물질을 놓고는 장인과 소유를 다투었습니다. 야곱은 일생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고, 누군가와 자신을 경쟁하고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추구해온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얍복강을 지나면서 누군가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산다는 것은 언제나 열등한 존재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얍복강 이전까지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누군가와 경쟁하고 누군가와 싸우고 그래서 이기면 “아, 내가 이겼다”. 그러나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환도뼈가 부라질만큼 자기와 싸워보니 남과 싸우는 것이 헛된 일임을 알았습니다. 프랑스의 샤를 드 몽테스키의 말과도 같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해진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내가 이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행복한 사람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다른 아이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고 주저앉는 아이가 있습니까? 내가 지금 괜찮은 데 화려했던 과거보다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래도 내가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했하는 데 다른 사람이 나를 초라하게 보기 때문에 내가 불행해집니까? 왜 내 행복과 불행이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됩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나쁜 것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조금 다릅니다. 시기는 남이 가진 것을 나는 없다. 그래서 속상해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질투는 나는 없는 데 남은 있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즐긴다. 그래서 싫다. 이것이 질투심입니다. 내가 없어 속상한다. 이것은 시기심. 남이 누려 화가 난다. 그것은 질투심. 어느 것이 더 나쁘겠습니까? 다 나쁩니다. 시기심이든 질투심이든 공통점은 남의 관점에서 나를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덜 가져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더 가졌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왔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그가 천사와 싸우면서 정말 싸워야 할 사람은 에서가 아니고 라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얍복, “야포크”, empty, 다 비웠습니다. 그때 그에게 보였던 것이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얍복강을 건넜더니 형 에서가 나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와 함께 한 이들이 누구냐?” 야곱이 말했습니다. 창33:5,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야곱은 20년 객지 생활은 은혜를 배우는 생활이었습니다. 누가 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스그로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눈으로 보니 자식도 은혜도 물질도 은혜요 이렇게 늦게 나마 형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은혜요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일희일비하지 마십시오.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옵니다. 누구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창33:1-12 2015.9.27(일)
관계를 치유하라
창1:1에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부모와의 관계-사랑하라.
창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부부 관계-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다.
“아내 없이 혼자 사는 남성은 평균 5년 더 빨리 죽는다. 그런데 정작 아내가 있는 남성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여성도 남편 없이 혼자 살면 남편이 있는 여성보다 더 일찍 죽는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사는 여성 중에는 암에 걸리는 아내가 많다고 한다”.
계약과 언약
창2:22, “여호아 하나님이 아담에게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케투바”(사진)
형제관계-비교하지 말라
형제의 상봉(그림)
“누군가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산다는 것은 언제나 열등한 존재로 살 수 밖에 없다”
“누구나 행복하기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해진다”(샤를 드 몽테스키).
시기심과 질투심
창33:5,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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