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쉐릴(John Sherrill)의 ‘성령님을 찾아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한 사람들, 성령이 역사한 현장들을 탐구하면서 겪은 것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 가운데, 흑인 목사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2층 건물을 임대하여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고 많은 병자들이 나음을 받는다고 알려졌습니다. 건물 아래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2층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 시간이 되어 가는데 한 신사가 건물로 들어섰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지 않은 것을 알고 집회장소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2층에 있던 11살 난 소녀 캐틀린이 일어나 영어가 아닌 방언으로 그 신사를 향하여 크게 말하였습니다. 신사는 캐틀린의 손을 잡고 예배에 참석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유대인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방언에 대하여 조사하려고 왔습니다. 이 도시에서 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설교를 낱낱이 분석하고 해부하여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강의에 사용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건물에 들어오는 순간 이 소녀가 히브리어로 저에게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녀는 제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곳에 온 목적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저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저의 사생활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비 맥알리스터라는 유대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끓고 울부짖으며 회개를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존 쉐릴은 성령 충만을 ‘스테이크를 분석하는 사람과 먹는 사람의 차이’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도 자칫 냉랭한 신앙으로 식탁에 앉아 스테이크를 분석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의 혈통과 나이에 대하여, 어느 부위의 고기이며, 영양가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스테이크를 불에 올려놓고, 잘게 썰어서 먹는 사람이 스테이크를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수박 겉핥기식의 신앙생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변만 맴도는 신앙을 청산하고 성령이 마음에 임재하시고, 동행하시고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반드시 체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과거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더라도, 현재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매순간마다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술 취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을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술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성령 충만의 원리도 같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이 다스리시고 지배하십니다. 성령이 삶을 온전히 주관하십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삶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성령 충만함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마음으로 찬송하며 1960년대 미국에 히피족(Hippies)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머리를 깍지 않고 덥수룩하게 길렀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통기타를 치면서 세속적이고 방탕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리화나를 피우고 아무데서나 노숙했습니다. 캘리포니아 갈보리 교회의 척 스미스(Chuck Smith) 목사와 교우들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정성을 다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긍휼과 사랑을 베풀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감화를 받고 교회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히피족들이 떼거리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존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방해가 된 것입니다. 히피족의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습니다. 맨발로 다니니까 카펫이 더러워졌습니다. 더러운 몸으로 앉았다가 일어나면 의자가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들을 계속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못 오도록 막을 것인가?”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향해 교회 문을 활짝 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들의 문화와 언어로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께 예배함을 허용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교회에서 부른 노래가 바로 복음성가입니다. 마약에 취해서 방탕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으로 감화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인도할 때 변화되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령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감동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마음과 입술에 찬송을 주십니다. 찬송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노래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은 찬송으로 서로 화답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찬송하는 이유는 사람이 들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습니까? 입술로 노래합니까? 성령으로 충만함 받지 못한 사람은 입술로 노래 부릅니다. 우렁찬 목소리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음악적으로는 완벽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입술로만 부르는 노래가 아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디 성령으로 충만하여 신령한 노래와 찬송을 화답하며 부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범사에 감사하며 어느 날 사탄이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연장들을 모아 경매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사탄은 인간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넘어지게 했던 그리고 망하게 하며, 약하게 만들고 타락시켰던 연장들을 진열하였습니다. 시기심, 고집, 욕심, 보복심, 미움, 교만, 혈기, 열등의식 등 실로 다양한 도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열된 맨 끝에 비싼 가격에 나와 있는 포장이 된 도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물었습니다. 사탄은 ‘실망’이라는 무기로 얼마나 위력이 있었는가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훌륭히 일하던 사람도 이 실망으로 공격하면 일을 멈추었으며, 교사도, 집사도, 권사도, 장로도, 목사도 모두 이 무기 앞에서 꼼짝 못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더라는 것을 침을 튀기며 신나게 설명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사탄에게 “혹시 그 연장을 사용하여도 넘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던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이 연장을 사용하여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 무기가 아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사탄도 넘어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명하신 것은 감사거리를 그만큼 주셨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감사하도록 은총을 주시겠다는 약속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만약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 신앙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겸손하지 못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다니엘은 곤경에 처했지만 전에 하던 대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은 항상 감사를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함을 받아 형편이나 처지와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자이어야 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피차에 복종하며 인도에서 사역하던 마더 데레사(Madre Teresa) 수녀는 이런 말을 즐겨하였습니다. “I am nothing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때, 그녀는 연설 가운데서도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I am nothing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미소 띤 얼굴로 웃으면서 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테레사에게도 도무지 그 앞에서는 웃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테레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 앞에서도 제가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시기 바랍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셔서 저 사람 앞에서도 미소를 띠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나서 억지로라도 그 사람 앞에서 웃으면서 모든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일들이 쉬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더 테레사는 자기를 돕는 조수를 뽑을 때도 세 가지 조건의 기준에서 뽑았습니다. “첫째, 잘 웃는 사람. 둘째, 잘 먹는 사람. 셋째, 어디에서나 잠을 잘 자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기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편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 어려운 시련이 있을 때 잘 견딜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잘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울 때만이 가능합니다. 항상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을 기꺼이 존중하며 서로 섬기며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하면 복종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갑니다.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어 자신을 낮추며,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가 되었습니다. 지체들은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피차에 복종해야 합니다. 만약 각자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다른 지체에게 섬김만 받으려 한다면 서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피차 복종하면서 서로 섬기면 모두가 든든히 서게 될 것입니다. 부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피차에 복종하며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기낙타가 엄마낙타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우린 왜 이렇게 눈썹이 길어?” 그러자 엄마낙타는 의젓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응, 그건 사막에서 부는 모래바람에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응. 그렇구나.” 조금 후 아기낙타는 엄마낙타에게 또 물었습니다. “엄마, 우린 왜 발가락이 두 개야?” “응, 그건 사막에서 모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란다.” “응. 그렇구나.” 아기낙타는 사막에 잘 적응되어 있는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또 묻습니다. “엄마, 우리 등은 왜 이렇게 불뚝 튀어나온 거야?” “응, 그건 물이 없는 사막에서 물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란다. 이건 우리 낙타들만의 자부심이지.” “응. 그렇구나.” 그렇게 한참 얘기를 다 들은 아기낙타가 엄마낙타한테 말했습니다. “엄마, 근데, 우린 지금 동물원에서 뭐 하는 거야?” 우리는 누구입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하는데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마치 동물원에 있는 낙타처럼,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고통과 아픔을 나누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악한 세력과 싸움을 감당해야 하는데 여전히 다투며 사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야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방탕한 죄악의 습관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부디 성령 충만함에 마음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인지 돌아보며 무엇보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피차 복종하며 섬김으로서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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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4 21:3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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