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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광일목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니-롬 5:1-4

알리스터 맥그래스 (Alister McGrath)예수를 경험하는 영성훈련이라는 저서에서 영혼에 대한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는 22세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기독교를 알게 된 그는 복음을 인식할 필요를 느꼈지만 건조하고 지식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 후 기독교를 더 알기 위하여 캠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루터의 십자가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것을 지식적으로 인지하는데 머물렀습니다. 루이스(C. S. Lewis)의 경건 서적을 읽으며 도전을 받았으나 여전히 지식적으로 기독교를 인식하는데 그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면서 비로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만 축적했지 그 분을 인격적 관계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 살아 계셔서 만나주시고 교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맥그래스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은 기독교 영성이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성 버나드, 캔터베리의 안셀름, 마틴 루터, 존 칼빈, 로욜라의 서적들을 탐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였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았으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듯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책을 연구하면서 기독교는 이론적이거나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교제하는 체험적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자신도 그들의 방법을 따라 한 결과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의 핵심적 교리는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피조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절대주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는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스스로 운명을 주관할 수 없는 인간은 사탄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인생을 구원하는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를 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바울은 인생들이 예수 믿고 영접하는 순간 인생은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며,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을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화평을 누리며

미국 역사상 제일 지독한 구두쇠로 알려진 사람이 있는데 1916년에 죽은 헤티 그린(Hetty Green) 여사입니다. 그녀는 얼마나 돈을 쓰지 않고 인색하게 살았는지 기본적으로 써야 하는 것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음식을 데워서 먹는 것조차 전기가 든다고 일평생을 차갑게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아들이 다리를 다쳤는데도 조금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병원비용 때문에 미루다가 결국 다리를 절단하게 되어 평생 장애자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자신은 영양실조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놀란 일은 그녀가 죽은 후 옷장에서 통장이 발견되었는데 무려 1억달러의 거액이 저금되어 있었습니다. 헤티 그린은 평생 돈을 모으고 쌓아 두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누리지 못하고 죽은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구하지 않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 1절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기서 화평은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악으로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이를 믿는 자마다 관계를 회복시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상태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불편함이 있거나 거리감이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고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상태인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영광을 바라며

키에르케고르의(S. Aabye Kierkegaard) 글 가운데 마차에 탄 부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부자는 불이 켜진 마차 안에 앉아 있고, 마부는 차가운 바깥바람을 쐬며 말을 몰고 있습니다. 부자는 불빛 때문에 바깥에 펼쳐진 하늘의 영광, 별들의 전경, 마부가 놓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의 불빛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중한 것을 잃으면 고통스러워 합니다. 돈이나 명예, 자녀나 가족, 건강을 잃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을 때, 은혜의 감격이 사라졌을 때도 고통스러워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식을 잃었을 때보다 더 고통스럽습니까? 돈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 안타깝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은혜의 끝자락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은 세상의 영광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은혜를 통해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들어갔지만 종말론적인 영광은 아직까지 바라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장차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로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완성해야 할 책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마귀의 지배를 받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더 이상 세상의 명예나 재물로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환난을 즐기며

백악관 정책 보좌관을 지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 강영우(姜永祐)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기자가 박사님은 시각장애자인데, 어떻게 백악관까지 진출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강박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인내심이 많아서 시각장애의 고난을 딛고 일어선 것처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환난과 역경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런 자리에 결코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환난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즐거워해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하나님은 예수를 영접한 믿음의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고 죄의 종노릇하던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만드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환난 중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환난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다듬어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환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혹시 환난과 어려움으로 지금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과정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7년 국민일보에 실린 이상춘 장로의 기사입니다. 30여년의 교정 공무원 생활을 마친 그는 다시 교도소를 찾아가 재소자 전도에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0067월 간암 3기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 날 이상춘 장로는 병원을 나와 여주 교도소로 향하면서 침상에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으며 죽음과 싸우기보다, 마지막 남은 나의 심지를 불태워보자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주의 뜻대로 하소서.” 하나님은 이상춘 장로를 통하여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많은 재소자가 하나님을 만났고, 그들은 덕분에 다시 힘을 얻었다는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상춘 장로의 암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증거가 있습니다. 기사에 실린 것처럼 교정 공무원 시절 굳어 있었던 그의 얼굴이 '미소 천사'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굳어있던 얼굴이 미소 천사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이 누리는 복이 아닙니까?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질 영광을 바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닥치는 환난을 소망으로 극복하며 즐거워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6-05-21 21: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