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교수의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Christianus Sum)”라는 책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에게 일어난 재판과정에 대한 보고를 기초로 기록된 순교록입니다. AD 120-372년 사이에 걸쳐 일어난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실제적 이야기로서, 남자 여자, 소년 소녀, 90넘은 노인, 귀족과 자유인과 노예, 학자와 농부와 상인과 군인, 감독과 장로 같은 성직자로부터 세례 준비자와 순교의 현장에서 처음 신앙을 가진 사람들까지 다양한 순교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다양한 순교자들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들 모두 순교의 현장에서 핍박과 유혹에 타협하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가족을 잃지 않고, 재산이나 생명도 잃지 않을 수 있는데 그들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당당하게 순교하였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심포로사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입니다. 로마의 호민관 부인 심포로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들들과 함께 붙잡혀 왔습니다. 황제가 그녀를 불러 심문합니다. “네 아들들과 함께 전능한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라. 그렇지 않으면 네 아들들과 함께 제물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황제에게 말합니다. “내가 아들들과 함께 희생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 이런 좋은 일이 어디로부터 오게 될까요?” 오히려 순교하여 천국 가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황제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나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든지 아니면 참혹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든지 하라.” 이때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일곱 자녀들과 함께 살아날 수 있었으나 심포로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죽음의 두려움이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죽인 남편 게툴리우스와 함께 안식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녀는 뺨을 맞고 머리카락을 매달림을 당하고 목에 큰 돌을 달아 강물에 빠뜨림의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황제는 일곱 아들을 불러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황제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순교할 만큼 강력한 믿음을 주었습니까? 바로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죽으면 더 좋은 천국이 있다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상급에 대한 기대입니다. 어차피 한 번 가는 죽음의 길인데 순교하면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2천년 교회의 역사에 교회를 지키기 위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성도들의 피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감리교회가 ‘순교자 기념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고 있는 까닭은 한국감리교회의 역사에 믿음의 선배들이 흘린 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라는 단어 안에 ‘순교자’라는 의미가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한 증인으로, 또 다른 순교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속의 자유를 육체적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고 복음에 합당한 신앙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특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사랑으로 종노릇해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성공회의 투투(Desmond Mpilo Tutu) 대주교가 있습니다. ‘Dream of God’라는 저서에서 그는 그 나라의 언어 가운데 ‘우분투’라는 단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분투’ 안에 있으면 남들에게 사랑으로 친절을 행할 수 있고 내게 있는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풍요로운 사람이라면 그 물질로 남을 채울 수 있고, 내게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남을 도울 수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큰 내분 없이 평화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다른 이를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여기의 ‘종노릇하라’의 원어는 ‘둘류에테’인데 ‘서로 봉사하라, 서로 도와주어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편 앞에서 종이 되어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사람 앞에는 사랑 없이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 비롯될 수 있었기에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당연히 율법을 이루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 율법을 내세우기만 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갈라디아교회 안에 율법을 안다고 자부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생기게 되었을 때 서로 물고 먹는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서로 싸우는 자유가 아니라 오로지 섬기는 자유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하여 얽매이고 마귀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사람 앞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을 따라 행해야 세계적인 디지털 디스플레이 기업으로 알려진 이레전자의 창업자는 정문식 사장입니다. 그는 ‘다섯평 창고의 기적’이라는 책을 통해 자신을 소개합니다. 최종 학력은 공업고등학교 졸업, 공수부대 하사관 출신으로 29살 젊은 나이에 신림동에 반 지하 허름한 셋방에서 무일푼으로 휴대폰 충전기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이레전자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의 유력한 경쟁자로 부상하는 일류기업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 최초로 멀티플렉서라는 LCD 모니터와 60인치 PDP 모니터 개발을 통해 세계 시장에 수출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학 졸업장 하나 없이 21세기 벤처기업에 CEO가 된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레전자라는 이름대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성령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경영철학은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간다”는 벤처신앙입니다. 그는 벤처 신앙의 본질을 강조합니다. “끝없이 배운다. 끝없이 경험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성령을 따라 행하는 그를 하나님께서 세계 최고의 PDP 모니터 개발의 선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누구라도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의 ‘따라 행한다’는 말은 ‘페리파테이테’인데 ‘자주 왕래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온전히 익혀서 생활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순간만 성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포함한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본문은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를 단수로 표기하고 있는 이유는 아홉 가지 성품의 모습이 한 가지 성품에서 나오는 여러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믿으면서도 성품 때문에 고민이 된다면 아직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온전히 행하여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어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셋째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커진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술관에서 일하는 가이드는 관람객들을 명화 앞으로 안내하고 화가의 이름을 알려 주고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한번은 미술관의 젊은 가이드가 “이것은 모네의 그림입니다”라고 말하자 관람객들이 감탄을 연발하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가이드가 대답합니다. 다음 명화로 인솔하고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그리고 가이드가 물러서면 사람들은 다가서서 감상합니다. 아주 간단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가이드는 이 일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자부심이 지나쳐 그만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렸습니다. 관람객들이 자신을 보러 오는 줄로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물러서야 하는데 그림 곁에 그냥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감탄을 연발하면 가슴을 내밀고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라고 대답도 했습니다. 이따금 “감사합니다”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화가의 공로를 대신 취한 것입니다. 나중에 젊은 가이드는 그림에 조금씩 더 다가섰습니다. 처음에는 액자 위로 팔을 뻗더니 나중에 몸으로 그림을 완전히 덮어 버렸습니다. 그때 관장이 나타나서 지적합니다. “이봐, 이 일에서 중요한 것은 가이드인 당신이 아니야. 그러니 그림을 가리지 말라구.” 가이드는 그림에 대하여 박수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박수와 찬사는 작가만이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림을 몸으로 가리고 박수와 찬사를 가로채려 한다면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되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유혹을 받는 것은 아닙니까? 모든 영광과 존귀는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도록 우리는 옆으로 비껴나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받아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나를 향해 박수를 치고, 칭찬하고,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면 손사래를 치면서 “제가 아닙니다. 모든 영광과 찬송은 오직 하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여기의 ‘헛된 영광’은 ‘케노독소이’ 로서 ‘육신의 욕심과 정욕들’을 뜻합니다. 육신은 욕심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신의 소유욕을 드러내게 합니다. 욕심 때문에 죄를 짓고 다른 사람의 인격을 짓밟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헛된 영광을 위해 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한다면 더 좋은 것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헛된 영광은 무덤으로 통하는 관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현대 교회들은 재정이 많아지고, 세상의 권력도 교회 안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은과 금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 능력은 잃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채우는 교회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헛된 영광을 얻기 위하여 직분을 탐하고 교권을 탐하는 교회가 되었고, 헛된 영광을 구하기 위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는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세상적인 헛된 영광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해 뇌암으로 죽음이 가깝다고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담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주께 맡긴다며 임종을 준비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후 암세포가 없어졌다고 전격 발표를 하였습니다. 의사들도 깜짝 놀라며 완치 판정을 내렸습니다. 이를 NBC 방송과 여러 매체에서 보도했습니다. 카터는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간증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항암 치료를 받는 중에도 부인 로살린 여사와 함께 해비타트 운동 현장을 찾아 집짓기 봉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주 교회학교 교사로 계속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카터의 말입니다. “대통령은 임시직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평생직입니다.” 카터는 대통령의 꿈을 갖고 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재직 중에도, 퇴임 후에도,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한결같이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카터야말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배에 출석한다고, 세례를 받았다고, 또는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24절의 주어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고 동사는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이며 시제는 능동태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자신이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하기에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음으로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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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5 18:1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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