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솔로몬의 지혜’란 무엇을 말하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좋아, 그럼 한 가지 예를 들어 가르쳐 주지. 어느 커다란 굴뚝에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중 한 사람만 새까만 그을음을 묻혔다면 대체 둘 중 누가 세수를 했을 것 같으냐?” “물론 얼굴에 새까만 그을음을 묻힌 사람이겠죠?” “그게 아니다. 얼굴이 새까맣게 된 사람은 깨끗한 사람을 보고, ‘나도 깨끗하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상대방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깨끗한 사람이 씻게 되겠지. 내가 다시 한 번 질문할 테니 맞추어 보아라. 이 두 사람이 다시 굴뚝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번에는 어느 쪽이 씻었을 것 같으냐?” “그야 물론, 깨끗한 쪽이겠죠.” “허허, 그대는 아직도 지혜를 얻지 못하였구나. 깨끗한 사람은 씻다보니 별로 더럽혀지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것이고 더러운 사람은 상대방이 왜 씻었는지를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더러운 사람이 씻었다는 것이 맞는 답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질문하겠다. 두 사람이 세 번째로 굴뚝에 들어갔다 왔다면 누가 씻겠느냐?” “이번에는 확실히 답할 수 있습니다. 바로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정말 지혜가 없구나. 잘 생각해 보아라. 두 사람이 똑같이 굴뚝에 들어갔다 왔는데 어떻게 한 사람의 얼굴은 깨끗하고 한 사람은 더러울 수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지혜니라.” 살아가면서 진정한 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에서는 결혼식을 해가 진 저녁별이 나타날 때에 거행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또한 결혼식에는 신랑이 신부측 사람들에게 포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정하지 않고 갑자기 밤중에 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등을 준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등불을 켜들지 않고서는 신랑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혼인잔치 비유를 들어 재림하실 때 등과 기름을 예비한 성도들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행복한 자이나, 예비하지 못한 자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는 불행한 자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들이 등장합니다. 열 처녀들은 모두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신랑이 왔을 때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러 갈 수 있었지만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등은 가지고 있는데 기름이 없거나 충분치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등과 기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등은 외형적인 신앙을 의미하고 기름은 힘이 되는 신앙의 내면적 생활을 가리킵니다.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형식은 있으나 그 내용이 없는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 성도들의 신앙이 어떠합니까? 신앙의 형식은 찾아 볼 수 있지만, 내적으로 갖추어야 할 내용이 없음을 교훈하고 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슬기 있는 자들은 과연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로 기다리는 자이어야 인디언 추장이 손자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얘야! 우리 마음속에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한 마리의 늑대는 아주 악한 늑대야. 미워하게 만들고, 살인하게 만들고, 질투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드는 나쁜 늑대지. 그러나 또 한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그 늑대는 아주 착한 늑대야.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고, 평화하게 만들고, 용서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만들고, 인내하게 만드는 그런 착한 늑대가 있지.” 그러자 손자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 마음속에도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겠네요?” “그럼! 내 마음에도 두 마리의 늑대가 있지.” 손자가 또 묻습니다. “그럼 그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대답합니다. “할아버지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착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착한 늑대가 이기고, 악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악한 늑대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두 마리의 늑대가 있습니다. 조바심의 늑대가 있고, 기다림의 늑대가 있습니다.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다는 약속을 믿고 늦을지라도 응답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슬기 있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열 처녀 모두가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모두 신랑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더디올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고 결국 기다림에 실패한 것입니다. 반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더디올 것을 대비해 충분한 기름을 준비했고 결국 기다림에 승리하였습니다. 비유의 중심 메시지는 바로 “기다림”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본질은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를 나름대로 판단했습니다. 몇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기다림으로 승리하는 슬기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둘째로 준비하는 자이어야 어느 마을에 부자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미련하다고 생각되는 머슴을 불러 지팡이를 주면서 “여보게, 내가 보기에 자네보다 미련한 사람은 없을 것 같네. 그러니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가 자네보다 더 미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거든 주게나” 하며 놀렸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부자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머슴이 찾아왔습니다. 부자가 말합니다. “여보게, 나는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먼 길을 떠나게 되었네.” 머슴은 “어디로 가시며, 갈 준비는 다 되었는지요?” 물었습니다. 주인은 머슴이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미련을 떤다고 생각하고 “아니, 이 미련한 녀석아. 죽음의 길에 무슨 준비가 필요하며, 어디로 가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머슴은 “주인어른, 하루 여행을 떠나도 목적지를 정하고 준비를 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생각하니 주인어른이야말로 참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그러니 이 지팡이를 도로 받으시지요” 하며 전에 주인에게 받았던 지팡이를 다시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미래에 대해 준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미리 죽음을 생각하고 마지막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슬기가 있는 사람은 열심히 자기인생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열 처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신랑이 왔을 때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정작 불을 밝혀야 할 때 밝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등은 준비가 됐지만 기름이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졸고 잔 것에 대한 책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늦는 것에 대비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입니다. 기름은 주님을 만나는데 필요한 요소입니다.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내용입니다. 신앙의 모양인 등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름입니다. 근본적인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 옵니다. 우리는 기름을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준비하지 못한 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연료 부족 경고등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달린다면 차는 갑자기 멈추게 됩니다. 우리의 경고등은 무엇입니까? 신앙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까?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지 않습니까?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는 참석하지만 하나님 만나는 감격은 있습니까? 말씀을 듣지만 순종이 있습니까? 이러한 증상들이 보인다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의 모습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깨어있는 자이어야 물고기는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죽을 때도 눈을 뜨고 죽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물고기 특유의 현상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초대교회 시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로마 외곽의 지하 동굴 카타콤으로 도피했습니다. 이곳은 원래 시체를 매장하는 장소였습니다. 로마는 장례지를 신성불가침한 곳으로 여겼기 에 접근을 꺼렸습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10대에 걸쳐 300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카타콤 벽면에 물고기 그림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곳에 물고기를 그려놓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물고기는 ‘익투스(IΧΘΥΣ)’라는 헬라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의미하는 ‘Ιησουσ Χριστοσ Θεου Υιοσ Σωτηρ (Iesous Christos Theou Huios Solter)’의 첫 글자를 모아 합성한 단어입니다. 어쩌면 물고기처럼 ‘자나 깨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가 담긴 뜻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13절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의 ‘깨어있으라’는 영적으로 긴장하라는 뜻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왔는지 생각하지 않았기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긴장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신랑이 늦는다고 하더라도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련하다는 것은 신랑을 기다려야 할 존재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면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들이 모두 졸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때는 영혼들이 조는 자들과 자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조는 것은 일시적으로 조는 것이고, 자는 것은 아무 준비 없이 태연히 자는 것입니다. 신앙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졸며 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졸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랑이신 예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재림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긴박감을 가지고 기름을 더하고 더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서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보다 강한 믿음을 위해 기도하고, 더 큰 봉사를 위해 기도하고, 더 어려운 고통을 참기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시는 날 깨어 있는 자만이 들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솝 우화(Aesop’s Fables)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함께 사냥을 하고 얻은 것들을 늘어놓고 사자가 나귀에게 분배를 맡겼습니다. “네가 공평하게 나누어 보거라. 나귀는 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세 등분했습니다. 덜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똑같이 나눴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화를 버럭 내면서 “사냥할 때 내가 제일 많이 애썼는데 이게 뭐냐?”고 하면서 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이제 사자하고 여우만 남았습니다. 사자가 여우에게 말합니다. “여우야 이번엔 네가 좀 공평하게 분배해보아라.” 여우는 어떻게 분배를 하였을까요? 여우는 지혜로웠습니다. 사냥해서 얻은 것 중에 90%는 사자에게 다 돌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중에 10%만 차지했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만족스러워 하면서 “너는 어디서 이렇게 지혜로운 생각이 떠올랐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대답했습니다. “나귀가 죽는 것을 보고 생각해냈지요.” 보기에는 불공평한 분배처럼 보이지만 여우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값진 지혜를 발휘했던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에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모습을 버리고 슬기 있는 다섯 처녀의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슬기 있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확실한 재림 신앙으로 기다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깨어있는 자가 되어 슬기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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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6 19:3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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