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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히 여기시리라-요 12:20~26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0~26
브라질 리우올림픽 양궁경기에서
2관왕을 차지한 장혜진 선수는 믿음의 궁사입니다. 개인전 결승에서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 장혜진의 기도 세리머니는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상당수 크리스천 청년들이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숨기지만 장혜진은 전 세계인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밝혔습니다.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그녀는 사선 뒤에 활을 내려놓고 조용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준 하나님을 향한 감사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관중석을 향해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녀는 시상식 후 가진 인터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했습니다. 금메달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능력을 주시는 분을 믿고 합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보며 결과를 그냥 받아들이는 성격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사선에 섰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을 부르면서 믿고 쏘자는 마음으로 임합니다라며 웃었습니다. 장혜진 선수가 유일하게 2관왕을 차지한 것은 멘탈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그녀의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멘탈은 믿음을 통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일으킨 것은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은 그녀는 준결승에서 초속 6m 풍속으로 인해 3점을 쐈을 때도 실망하는 표정 대신 미소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습니다. 3점을 쏜 뒤에도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 것이 평정심을 찾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장혜진은 국가대표 기독교 선수사이에서도 신앙심이 깊기로 유명합니다. 태릉선수촌에서 생활을 할 때도 늘 성경책을 곁에 두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였습니다. 태릉선수촌 신우회장 안래현 장로는 혜진이는 말씀에 푹 빠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평소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예쁜 손글씨로 적고 읽으며 심리적인 안정을 꾀하는 습관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수들은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기 위해 자신만의 루틴(routine)을 갖고 있는데 장혜진 선수는 활시위를 당기기 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이 루틴입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경기 전에 펼쳐보는 수첩에도 손 글씨로 적은 성경 구절이 빼곡히 담겨 있습니다. 현지 올림픽선교위원회 실무회장을 맡고 있는 윤덕신 목사는 준결승을 앞두고 몸을 풀고 있던 장혜진을 만나 승리의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고 배짱 있게 시합하라고 격려했고 의로운 팔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퍼펙트를 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었다고 전했습니다. 장혜진은 기도에 응답하듯 명승부를 펼치며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에 두 번이나 올랐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윤 목사를 찾아온 장혜진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며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금메달의 영광은 주어진 경기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장혜진 선수를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확실한 증표였습니다.

본문에 보니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헬라의 도시 국가에서 온 사신들로 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쳤는데 특히 나병 환자를 고쳤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은 어찌하든 예수를 모시고 가려 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당국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던 시기였기에 예수께도 좋은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 귀히 여김 받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 나오는 귀히 여기시리라는 헬라어로 티마오인데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두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한 알의 밀의 비유를 언급하시며 자신이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임을 언급하셨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심겨지고 썩어지고 죽어진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었기에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귀히 여김 받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여야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십니까?

첫째로 떨어져 죽으면
한국교회사 초기에 알려지지 않은 헤론(John W. Heron)이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지만 한국교회 성장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마음에 신선한 감동을 줍니다. 헤론은 미국 테네시 의과대학이 생긴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수재로서 그 대학의 교수직을 사양하고 1885년에 내한하여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5년 뒤 1890년 여름에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다른 선교사들은 휴가를 떠났지만 그는 폭염 속에서도 환자 치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더위와 과로에 지쳐 결국 이질에 걸려 3주간 앓다가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놓고 선교지 한국에서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부흥을 가져오는 데는 우리가 알지 못한 곳에서 이처럼 희생하고 순교한 이들의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삶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열매의 역사는 한 알의 밀알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셔서 인류를 구원했듯이 우리도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묻혀 죽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은 썩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희생이 있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어지는 희생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존재합니다. 성장도 없고, 열매도 없고, 세상에 영향도 끼치지 못한 채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땅의 것에 집착하고 주의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포기하지 못한다면 아무 변화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현상유지하며 존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본받아 자기를 희생한다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흘러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밀알의 희생이 있어 하나님께 귀히 여김받는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생명을 바치면
스위스의 헨리 듀넌트(Jean Henry Dunant)는 첫 번째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적십자사의 창립자로 알려진 앙리 뒤낭이기도 합니다. 그는 원래 은행장이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 사업을 크게 확장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나폴레옹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공교롭게도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전쟁터로 나폴레옹을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전쟁의 현실과 접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피 비린내 나는 죽음의 지옥 같은 현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시체를 보았습니다. 수많은 피투성이 부상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명의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 큰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이 땅에 폭력과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부상당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함께 부상자 돕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적십자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꿈을 포기하고 헌신의 밀알이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드디어 적십자사를 창설하고 적십자사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포기하는 자들을 통해 아름답게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할 때 세상에서도 귀하게 여김 받는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어찌 귀하게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본문 25절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예수께서 죽어야 산다고 말씀하심은 다른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하심이 아닙니다. 예수는 생명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를 면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자기를 포기하셨습니다. 뜻을 포기하셨습니다. 부유함을 포기하셨습니다. 명예를 포기하셨습니다. 심지어 생명까지 포기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시어 구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높여주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자아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나의 유익, 나의 체면, 나의 고집, 나의 재능, 나의 시간, 필요하다면 나의 물질, 더 나아가 나의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으로 솔직하게 인정하고 특별한 존재(something)로 나타내 보이고 싶은 마음까지 내려놓고 포기하여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조차 우쭐대고 싶어하는 자아를 비우고 그 중심에 예수를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포기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더욱 낮아지며 자아를 포기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시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따르며 섬기면
마더 테레사(Madre Teresa)는 체구가 작지만 누구도 할 수 없는 큰일을 해냈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인도 캘커타의 빈민들과 생애를 같이 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삶은 말씀대로 부활해서 많은 열매를 맺었기에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길을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 안에서 작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크신 분이시기에, 하나님 안에서 존재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돌보던 행려자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작은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이 크시기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수많은 행려자들을 정성으로 돌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유명한 그녀의 말이 있습니다. 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캘커타에 수 만 명의 행려자들이 있는데, 당신이 돌보는 사람들은 고작 수십명에 불과합니다. 행려자 전체에 비하면 너무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행려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하나님은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가 만나는 주위에 있는 행려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하나님이 맡겨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제를 기피하면서 세상에 도움 줘야할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은데, 고작 몇십명을 도와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가 다 돌볼 필요는 없다. 다만 자기 앞에 맡겨진 사람들,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집중해서 섬기며 돌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따르며 섬겼던 것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한 알의 밀이 땅 속에 들어가면 자신의 몸을 거름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밀알의 눈에서 싹이 나오고 흙을 비집고 나오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몸을 썩혀 거름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즉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이 따를 때 생명이 태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숨을 바쳐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주인을 향한 충성스런 노예처럼 우리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섬기신 예수는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처럼 섬기며 사셨습니다. 서로 섬김을 받으려고 힘겨루기를 하는 세상을 자원하는 섬김을 통하여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Nicholas Herman)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성의 깊이는 지금 하는 일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함으로써 깊어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듯이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수도원 원장은 그가 죽은 후 추모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발견했다. 수도원을 위해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신발을 수선할 때도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현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라는 말은 부담 없이 받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섬기기를 원합니까? 주를 따라갈 각오가 되어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부담스러워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나름대로 크고 작은 일에 봉사하느라 교회를 제집 드나들듯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섬기고 따라야한다는 말에 마음을 활짝 열지 않습니다. 예수께 나아와 쉼을 얻기를 바라면서도 예수가 메라고 하는 멍에는 메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일은 가능하다면 뒷전에 서 있으려고 합니다.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것이 열 두 제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 떨어져 죽는 희생이 있습니까? 생명도 내어놓는 포기가 있습니까? 주를 따르는 섬김이 있습니까? 한 알의 밀알처럼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섬기는 결단을 통해 주를 따라가는 하나님의 귀히 여김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6-08-13 21: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