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이루어진 종교개혁지 순례를 통하여 미온했던 개혁신앙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1483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하던 루터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났습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데 함께 가던 친구가 눈 앞에서 벼락에 맞아 타죽습니다. 그 순간 루터는 고꾸라지며 광부들의 수호신 성 안나를 부르며 크게 외쳤습니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루터의 결심에 노발대발하였지만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 신부가 됩니다. 루터는 가장 경건하고 철저한 고행을 하는 수도사가 되기 위하여 매일 7번씩 기도시간을 갖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쳤습니다. 제단 앞에 성수를 뿌리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심지어 길에서 구걸하는 고행까지도 했습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1510년 루터는 수도원의 대표로 뽑혀 로마를 순례하게 됩니다. 교황이 거주하는 대성당 28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참회를 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로마에서 본 것은 교황청에서 뇌물을 주고 성직을 얻은 사제들이 하나님을 향해 공공연하게 “당신은 내 밥줄입니다” 라고 기도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젊은 루터는 더욱 헌신을 위해 성지순례를 하였으나 그와 반대로 가슴속에 개혁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의 고민은 늘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의 탑 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합2:4)’와 ‘하나님의 의(롬1: 17)’의 두 가지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루터의 글에 의하면 “우리가 믿음에 의한 의 때문에 의롭게 살 수 있고, 또 믿음에 의한 의와 하나님의 의가 주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면, 의는 믿음에 의해 주어지고 생명은 의에 의해 주어진다는 결과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로써 내 양심과 영혼은 힘을 얻었고,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달콤하고 기쁜 말이 되었다. 이 탑에서 나를 가르친 분은 성령이시다.” 루터는 이 탑의 체험이후 ‘오직 믿음으로만’의 신학으로 무장하고 당시 행하여지던 면죄부 판매에 대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의 귀재였던 테첼(Tetzel) 신부의 설교에 대하여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비텐베르크 대학에 붙였습니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유럽 전역으로 반박문은 퍼져 나갔습니다. 로마 교황에 대한 공박까지 서슴지 않았던 루터의 반박문은 교황청에 보고되었고, 1520년 교황은 루터를 정죄하고 파문 교서를 공포하였습니다. 그리고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종교재판이 열렸습니다. 루터 앞에는 그가 쓴 책이 놓여있고 주교가 물었습니다. “이 책을 변론할 것인가? 부분적으로 포기할 것인가?” 그러자 루터가 대답하였습니다. “성서와 또 다른 합리적인 이유로 설득되지 않는 한 교황의 권위도 의회의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교황도 의회도 성서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폭력과 위협으로도 빼앗을 수 없었던 루터의 양심과 용기는 의인으로 인정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서신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전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에게나 유대인들에게조차도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죽은 유대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심히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바울도 구원받기 전에는 십자가의 도가 심히 미련한 것으로 보였지만 구원 사건을 체험하고 신령한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니 그것이 인간에게 복된 소식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복음은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들이 두려움 없이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그릇된 것들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러한 의인들을 통하여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정녕 생활 속에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담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까? 오직 의인이 사는 까닭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어느 도시에 있는 자그마한 약국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린 듯 보이는 환자가 약국에 들어와 자신의 병을 이야기하면서 어떠한 약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약사는 그 약을 선뜻 내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약은 병자의 병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자칫 부작용까지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사는 환자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약은 당신의 병에 대해서는 약효를 전혀 기대할 수 없을뿐더러 잘못하면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는 그 약을 먹어야만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끈질긴 간청에 견디다 못한 약사는 불상사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그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그리고 약사에게 몇 번이고 인사를 한 후 감사를 표했습니다. “당신이 주신 약 덕분에 이렇게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약사는 자신의 약리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깊이 연구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 환자는 약의 효과로 나은 것이 아니라 그 약을 먹으면 반드시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낫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후 약사는 약국을 정리하고 믿음으로 병을 고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약사가 바로 자기 암시요법의 창시자인 에밀 쿠에(Emile Coué)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셨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구교가 형식주의의 어둠속으로 들어가 혼미한 가운데 빠졌을 때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어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오직 의인인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복음의 진수를 놓치지 말고 살아야합니다. 내 공로 내 노력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 믿음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경으로 말미암아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상한 꿈을 꾸고 그 꿈에서 받은 충격을 평생 잊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날 꿈에 자신이 천국에 줄을 서서 따라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자신이 쓴 책들을 큰 수레에 싣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문 앞에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스위스 바젤에서 온 칼 바르트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들어가라” 수레를 끌고 들어가려는데 “안 된다. 이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쓴 책들인데요” “그래도 안된다. 오직 말씀만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책을 꼭 가지고 들어가겠다면 너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 여기서 깜작 놀라 꿈을 깼다고 합니다. 그 후 바르트는 그 꿈을 늘 생각하며 오직 천국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에 의지할 때에만 생명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모름지기 의인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1장 3절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인간의 지식, 경험과 주장을 뽐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참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무관심이 현대교회의 큰 병폐입니다. 성경이 교회 안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은 신자, 성경을 배우지 않은 신자, 성경을 멀리하는 신자가 바로 교회의 비극입니다.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습니다. 루터의 공적은 전통, 교권, 조직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살고, 성경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성경의 교훈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정신입니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한 절대로 교황청의 권위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루터는 강조했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사는 것이 종교개혁의 유산이라면 그 성경에 근거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직 의인은 성경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셋째 회개로 말미암아
주후 386년 어느 날, 수사학, 조로아스터교의 신앙, 마니교 등을 떠돌며 영혼 깊은 곳에서의 고뇌와 번민에 괴로워하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정원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노랫소리 “책을 들어 읽어 보세요”를 듣는 순간 방으로 달려와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가 펼친 곳은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특히 14절 말씀에 그는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을 느꼈습니다. 회개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아우그스티누스, 그는 대도시 로마가 비참하고 처참하게 쓰러져가는 비극 속에서 새로운 도성이 도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로마가 지상의 도성(civitas Mundi)이었다면 새로운 도성은 바로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인 교회였습니다.
로마서 6장 13절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의롭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죄악의 노예로 세상에 존재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삶이 별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자신을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상에서 자신을 성별시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도구로 살아가야 합니다.
종교 개혁의 정신은 끊임없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1592년 카를 황제는 종교개혁운동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회의의 결정에 14개의 도시와 6명의 제후들이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표명하고 항거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항거하는 자’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개신교인들은 프로테스탄트입니다. 항거한다는 의미처럼 영적으로 잘못된 일들에 대해 분명히 항거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회개하고 스스로 허물과 죄악을 보고 항거해야 합니다. 회개를 통한 영적 갱신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참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만물이 새롭게 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흔들려도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나침반처럼 날마다 자신을 회개함으로 개혁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천주교의 교황과 그 교권에 맞서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때로 좌절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무서운 절망감에 신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친구였던 멜랑히톤 (P. Melanchthon)이 루터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복음은 분명한 하나님의 진리요 우리가 믿는 것이 분명히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는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요.”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넉넉히 이기느니라’를 기록하여 루터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세상적인 것으로 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그 내용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본주의 신앙의 잘못된 모습을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Let God be God) 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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