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 2:1~12
루마니아의 폴 니그러트 (Paul Negrut) 목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목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목사가 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1988년, 비밀경찰의 엄청난 박해와 고문으로 손과 왼쪽 발이 마비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 내외가 없는 시간에 비밀경찰이 습격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아이들까지 핍박했습니다. 니그러트는 루마니아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절망감을 가까운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낡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은 25년 동안 감옥에 있던 그리스도인이 쓴 편지였습니다. 공산당은 온갖 고문으로도 꺾지 못하자 결국 처형시켰는데 그가 죽음을 앞두고 쓴 편지였습니다. “사랑의 주님, 저는 곧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당신을 보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위대한 전도자들, 주의 종들, 교사들, 찬양대원들, 주님을 섬기는 그들 모두를 하루 빨리 보고 싶습니다. 순교자들이 면류관을 쓰고 주님의 발 앞에 면류관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주님, 그때 제가 그 행렬에 루마니아 죄수복을 입고 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당한 죄수로서 주님을 찬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니그러트는 순교자의 편지를 읽으며 자기도 루마니아의 죄수로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각오하고 방송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방송을 통해 루마니아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폴 니그러트, 그 야말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본문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도사역 당시 사역에 대해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사역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이 사라지지 아니하고 데살로니가인들의 마음에 심겨져 싹이 나고 자라 마침내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복음의 씨앗은 뿌려지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의심 대신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일지라도 복음은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열매 맺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반대와 훼방이 엄청났습니다. 결국 체포당했으며, 강제로 옷이 벗겨지는 수치를 당했고, 공정한 재판도 없이 매를 맞았으며, 발에 착고가 채워져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핍박이나 훼방도 복음 전하는 일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복음을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온갖 핍박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계속 전파되도록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여야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위탁을 받았으니
미국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은 신학교 졸업 후 보스턴 대형 교회의 부목사 초빙을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기뻐하고 친지들도 축하했습니다. 월급이 보장되고 집도 보장되고 앞날이 보장이 되었기에 복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드슨 목사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 전체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탁받은 자의 심정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선교사로 가지 않고 국내에 있으면 반만 하나님을 섬기고 반은 탐욕의 우상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선교사로 부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맡긴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하였더라면 끝없이 환난과 고통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는 불교의 나라 미얀마로 떠났습니다. 처음에 어찌나 복음이 들어가지 않던지,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6년이 걸렸습니다. 6년 동안 겨우 한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죽음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드슨 선교사의 헌신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에 5만명의 크리스천을 탄생시켰습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선교의 불을 지폈습니다. 저드슨이 미얀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기에 많은 영혼들이 우상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백성으로 구원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헌신은 자신의 속에 있는 탐욕이라는 우상을 깨뜨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탁받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확장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여기의 ‘위탁 받았으니’는 ‘피스튜데나이’라는 원어인데 ‘하나님께서 신임하고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고백 속에는 복음에 대한 청지기직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주인이 재산을 청지기에게 맡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복음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복음의 청지기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다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청지기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복음을 위탁받은 청지기로 합당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오로지 주인의 이익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만약 자기 유익을 위해 복음을 전한다면 본분을 잊은 것이요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책망과 벌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로 세워져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을 받았으니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는 중국의 첫 번째 선교사로 중국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가 선교를 하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후배 선교사들을 모집하였습니다. 많은 선교사 지망생들이 지원을 하였습니다. 테일러는 선교사를 지원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중국의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요.”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중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의 세계로 인도해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 선교가 꼭 있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테일러가 말합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런 동기만 가지고는 선교지에 못갑니다.” 그러자 지망생들이 되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그 때 허드슨 테일러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중국 사람을 사랑합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선교가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와 희생은 항상 원망으로 끝납니다. 선교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됨이라.” 여기의 ‘사랑하는 자’는 원어로 ‘아카페토이’인데 ‘이기적 욕망이 아닌 이타적 사랑을 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대한 바울 일행의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향해 보여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있었기에 바울은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함에는 사랑이 요구됩니다.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대로 살려고 온몸으로 애쓰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보여지게 될 때 용이하게 복음이 전해질 것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닌 전인격적 삶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신까지 내어주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놀라운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셋째로 영광에 이르리니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의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사로 선교사가 된다면 백만장자로 죽는 것을 거절하겠습니다. 선교사가 되기에 적합하다면 왕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과 가문, 계급과 훈장, 왕관 모두를 함께 준다 해도 다른 사람이 세운 기초가 아닌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위엄에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파하기 위한 일에 사역하는 가장 영예로운 자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의 눈에 보이는 왕관을 쓰지 않았지만 인간 중의 진정한 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자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일행은 누구에게도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대접이나 인정, 칭찬을 통해 영광을 받고자하지도 않았습니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물론 앞으로도 사람에게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궁극적인 영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말입니다. “진정한 설교자는 자기 영광을 위하여 말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부르신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의 방향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영광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전해야 할 것입니다.
멜빌 콕스(Melville B. Cox)는 감리교 선교사로 1833년, 백인의 무덤으로 알려진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가 그 곳에 복음을 들고 가겠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라이베리아로 가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백인들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콕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면서 목표를 잡았습니다. 웨슬리안 대학에서 만난 학생이 “관을 준비해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그를 향해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콕스는 “내가 아프리카에서 죽는다면, 묘비에 글을 써주시오”라고 했습니다. 학생이 “무엇이라고 쓸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천 명이 쓰러져도 좋으리. 아프리카가 돌아올 수 있다면.” 멜빌 콕스는 라이베리아에 도착하여 다섯 달이 못 되어 죽었습니다. 서른셋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증언은 귀에 생생합니다. “천 명이 쓰러져도 좋으리. 아프리카가 돌아온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아. 이 선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 수천 명이 쓰러질지라도 아프리카가 구원되어야 하리라. 내가 알고 싶은 것 하나는 한 사람이 라도 하나님을 알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절대 명령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을 의식하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더욱 순수한 마음과 동기로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일이 하나님께 위탁받은 사명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받은 사랑을 갚는 귀한 행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확신하고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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