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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2:1-5 로마서 강해 7

롬2:1-5 로마서 강해 7

 

사도바울이 롬1:18-3:20까지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가 있고, 나열한 20가지 이상의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방인의 죄는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되는 죄이니 하나님의 진노(심판)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심판은 현재와 미래적으로 나타납니다.

 

①현재-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1:24)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롬1:26)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너 마음대로 해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내버려 두는 것, 그것이 심판입니다. 무서운 심판입니다. 철없는 자녀들은 부모의 간섭을 싫어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게 좀 내버려두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포기 하는 심정으로 "그럼, 네 마음대로 해라"하고 내버려둡니다. 이게 자유일까요? 복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①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여러 번 간섭하셨지만 그는 끝내 제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라"고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는 하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뒤에 후회하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내버려두심은 자유가 아니라 심판입니다.

 

②왕상 22장 이야기입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북 이스라엘 아합 왕에게 분명하게 전하였습니다. 아합 왕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이 가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자 아합 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합은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고 전쟁터로 들어가게 하고, 자신은 왕이 아닌 것처럼 변장까지 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최대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계략이었습니다. 아합 왕의 예상과 같이 아람 왕은 집중적으로 이스라엘 왕을 노리라는 명령을 전차 부대장들에게 내렸습니다. 그래서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이 아합 왕인 줄 알고 집중적으로 쫓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 왕은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있도록 고함을 질렀고, 소리를 듣은 전차 부대장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확인하고 추격을 멈추었습니다.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아합 왕은 변장까지 하고 안전을 도모했지만, 한 아람 병사의 무심코 쏜 화살에 맞게 되었습니다. 그 화살은 갑옷 솔기 즉, 가슴과 복부의 연결부위 사이를 파고들어 아합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습니다. 결국 아합 왕은 이 전투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이 복이 아닌 심판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관심과 간섭이 사랑입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친 아들이기에, 사랑하기에, 좋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랑의 표시로 징계 하는 것입니다. 징계는 아프지만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이라는 표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①현재-내버려 두심으로, ②미래-지옥 형벌을 받아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에 지옥에 대한 묘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시편에서는 '고통만 있는 곳', 전도서에서는 '일과 계획이 없는 곳' '지식과 지혜도 없는 곳', 아가서에서는 '잔혹한 곳', 이사야에는 '벌레로 뒤덮인 곳', 마태복음에는 '꺼지지 않는 불 못'으로 마가복음에는 '벌레도 죽지 않는 곳'으로, '불로서 소금 치듯 하는 곳'으로, 누가복음에서는 '기갈 당하는 곳'으로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영원한 멸망의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불구덩이에, 영원한 사망인 지옥형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음, 살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써 살리는 복음을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 믿지 않았을 때, 이방인이었을 때, 불신자였을 때, 사형에 해당된 죄를 지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형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내 대신 내 죄를 위해 사형 당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사형, 지옥형벌을 피할 수 있지만, 믿지 않으면 자기 죗값으로 지옥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복음을 모르고 이 복음이 필요한 자들에게 살리는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 성도들을 통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고, 우리 성도들을 통해 지옥 불에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 받은 수가 하늘의 별처럼 많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자와 대화하는 방법입니다. 잘 들으세요. 모르면 후회할 것입니다.

여자들의 평상시 대화는 전혀 논리적이지가 않습니다.

예) “나 오늘 시내에서 순이 만났어요.”

그러면 남자들은 그래서? 밥 먹었어, 그래서 또 만나기로 했어?

왜? 만났어. 묻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은 답답해서

“순이 만났다고요”

여자들에게 만났다는 것이 큰 의미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거기다 그래서?, 왜냐고? 물으니 대화가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여자들의 대화 기본은 경청과 공감입니다. 이것만 잘 해주면 됩니다.

①잘 들어주면 됩니다. ②공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진짜’, ‘정말이야’, ‘웬일이야’, ‘헐’

해 볼까요. “나 오늘 시내에서 순이 만났어요”

진짜~, 정말이야~, 웬일이야~, 헐~

그것만 하면 빈약하니까 가끔 뒷말 따라 하기를 하면 됩니다.

“나 오늘 시내에서 순이 만났어요.” “순이 만났어”,

“진짜 신기하다.” 하면 따라서 “진짜 신기하다.”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들은 싸울 때에는 정말 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납자들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남자의 잘못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하나님을 닮아서 자기 잘못을 다 잊고 있습니다. 여자의 잘못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 기억하여 나열한 여자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질 수밖에 없습니다. 백전백패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이론만 강하지 실제는 아주 약하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고 말할 때 맞다고 박수치며 고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런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그들에게도 복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 유대인의 죄는?

 

①판단하고 같은 일을 행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

 

유대인들의 잘못은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후에 자기도 같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죄는 육체적이요, 외형적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의 죄는 심리적이며 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셨는데요. 율법은 지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같은 죄를 짓습니다. 예컨대, 남이 잘못했을 때, 나쁜 놈(죽일 놈)이라고 내가 판단, 정죄했다 합시다. 그리고 내 자신도 후에 그런 잘못을 했다면 뭐가 됩니까? 나쁜 놈(죽일 놈)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이, 내 판단이, 내 정죄가 자기를 그대로 판단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 쉬워서 누구나 다 잘합니다. 문제는 남을 판단할 때는 무자비와 인색함으로 하고 자기를 판단할 때는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냥꾼이 산 속에 들어가면서 새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잔뜩 공포에 질린 어미 메추리 새는 “사냥꾼 아저씨, 이 산속의 모든 새는 다 잡아도 제발 내 새끼만은 잡지 말아 주세요.” 빌며 부탁했습니다. 사냥꾼은 어미 새의 자식 사랑에 감동이 되어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알았습니다. 당신 새끼는 한 마리도 안 잡겠습니다. 그런데 당신 새끼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예. 제 새끼는 한번만 보면 알 수 있지요. 이 산에서 가장 예쁜 새들은 다 내 새끼입니다.” 실은 메추리는 꼬리가 없어 볼품없는 새 중에 하나입니다. 사냥꾼은 약속을 하고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또 그 어미 메추리 새를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어미 새가 울며 사냥꾼을 원망했습니다. “아저씨, 너무 하십니다. 아침에 그렇게 애원하면서 부탁했건만 왜 내 새끼만 골라서 잡았습니까? 아저씨가 잡은 새들은 다 내 새끼들입니다.” “아니 예쁜 새는 한 마리도 안 잡고 가장 못생긴 것들만 잡았는데요?” “아이고 그 새들이 왜 못생겼습니까? 얼마나 예쁜 새끼들인데요.” 하며 울었답니다.

 

어미 메추리 새에게는 자기 새끼가 제일 예쁘게 보이듯 자기 잘못은 예쁘게 보입니다. 그래서 너무 관용적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잔인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지옥의 땔감이라. 저러니까 지옥가지’식으로 판단을 하면서는 같은 죄를 지은 자신들한테는 아브라함의 자손, 선민이라며 관대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할까요? 2, 3절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란 남을 판단하면서 같은 일을 행하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판단한 말로 양심에 판단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면 자기 양심의 판단은 물론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시고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인의 죄?

 

②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하는 죄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4, 5)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랑, 용납, 길이 참으신다는 것은, 즉시로 심판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풍성하고 특별한 사랑을 진정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천사를 보내어 위협하고 협박하여 회개시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늦더라도 탕자처럼 깨닫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악용하여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 심판만 적금처럼 차곡차곡 쌓는다는 것입니다. 빚도 누적되면 커집니다. 심판도 누적되면 곧 임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특성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택한 사람과 버림 받은 사람의 구분은 매를 맞아보면 압니다. 택한 사람은 매를 맞고 나면 즉시 회개합니다. 그러나 버림 받은 사람은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고집부리고 완악해집니다. 예컨대, ①바로 왕을 보세요. 열 가지 재앙이 임하도록 더욱 굳어졌습니다. 강퍅하여 더 큰 재앙을 부릅니다. 그는 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②예수님 옆에 달린 한 강도를 생각해 보세요. 같이 십자가형을 받고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그가 남을 조롱하고 비방할 처지입니까? 망하는 자의 모습은 이렇듯 완악합니다. 죽을 때까지 완고함을 버리지 않습니다. 다른 쪽 강도는 어떻습니까? 회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1-43)

 

유대인들은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악용하여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죄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①판단하고 같은 일을 행하는 죄와 ②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하는 죄였습니다. 다음 주일에 더 보겠습니다만 유대인의 큰 죄는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민, 율법, 할례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도 예수 복음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인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이 복음만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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