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갈 2:19~21
‘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는 최하진 선교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입니다. 그는 ‘배운 만큼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세상 상식을 역류하며 카이스트 박사의 영예를 뒤로하고 장래가 보장된 스탠포드 연구원 자리도 버리고 중국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혈혈단신으로 광야에서 사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는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 광야에 길이 나고 반석에서 샘이 터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공급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세상이 아닌 주님께 인생을 걸 때 어떻게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지 생생히 증거하였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 꿈을 실현하기 원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해주시는지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만이 주님께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며 망설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주님께 인생을 걸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 미션(Dawn Mission) 선교회를 설립하여 중국에 열방학교를 세우고 공적인 직책도 없이 학교 청소부 겸 수위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학생들을 섬겼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대덕단지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때 도박에 깊이 빠졌습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교회에 가서 졸다 돌아오기가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니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가던 중 하란에 머무는 장면이 나옵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그것이 데라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데라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정신 차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때 ‘중국의 학생들을 위해 사역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중국에 건너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집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지내며 영어를 배워 주었습니다. 부인은 학생들에게 밥을 먹이고 빨래를 해주면서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 감수하였습니다. 어느 날 중국 학생이 묻습니다. “이렇게 부담스럽도록 잘 해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인생의 목적도 없이 살던 나에게 예수께서 사랑을 부어주셨다. 나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며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행복해졌다, 그래서 내가 받은 사랑을 표현하고자 이렇게 행하는 것이다. 너희도 부담을 느낀다면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풀기만 하면 된다.” 어느 날 부인이 거울을 보다가 말합니다. “내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해졌어요.” 바쁘다 보니 얼굴을 관리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말합니다. “그래도 행복해요. 주근깨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잖아요.” 최하진 선교사 부부의 모습이야말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본문은 직설법 현재 시제로 현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의 ‘내 안에’는 ‘엔 에모이'인데 ‘나의 의식 안에’가 아니라 ‘나의 생애 속에, 나의 심령 안에’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지 못하였을 때는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며 인본주의적 삶을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율법에서 해방된 이후부터 자신이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십니까? 과거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현재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가고 있습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정체성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전에는 내안에 내가 살아 아무것도 아닌 것에 화를 내고, 별것도 아닌 것에 욕심을 부리고 목숨도 걸었지만 이제는 십자가에 자신은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는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유로 사는 것이라
성경을 공산세계로 밀수하는 일을 하였던 브라더 앤드류(Brother Andrew) ‘는 하나님의 밀수꾼’ (God’s Smuggler)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젊은 시절 네덜란드 군인으로 인도네시아에 주둔 할 때 원숭이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기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가족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본이는 목 근처에 손을 대기만 하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새끼였을 때 목을 묶었던 철사가 기본이의 몸이 커지면서 살 속으로 파고들어 목을 조였던 것입니다. 앤드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원숭이의 목에 걸려있는 철사를 간신히 제거했습니다. 그러자 기본이는 피를 흘리며 고생을 했지만 고통이 없어진 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뻐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앤드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본이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아픔에서 풀어준 일은 그와 나를 묶는 사랑의 끈이 되었다. 가질 만큼 가지고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죄악의 줄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전히 묶여 있는 이유는 영혼을 옭아매고 있는 마귀의 사슬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이 죄악의 줄을 제거해주시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실 때 우리의 얽어매고 있는 죄악의 사슬을 끊으시고 자유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여기의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는 ‘노모 아페다논’ 로서 ‘율법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서 더 이상 요구를 받는 일도 더 이상 지배되는 일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영향력 아래에 머물러 있지 않은 자신의 상태를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던 율법 의식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께 대하여 자유할 수 없음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얻으려면 하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고정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와 의식의 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자요, 섬기는 자는 낮은 자라는 생각이 완전히 죽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식과 생각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필립 얀시 (Philip Yancey)의 저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는 인간이 겪는 엄청난 고통에 대해 성경적 해석을 하는 탁월한 책입니다. 그는 장애아를 낳은 어머니의 고통,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 부모의 이혼과 자신의 우울증으로 고통당하는 신학생의 이야기, 두 자녀를 불치병으로 잃은 어머니, 심지어 필립 얀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태어나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는 소아마비에 걸려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게 되어 필립 얀시는 하나님께 대한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책에 나오는 실제 이야기들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하나님께 실망을 느끼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공평,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숨어계심’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은 숨어계시는가?’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알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 실제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지 않으시고, 숨어계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공평하게, 드러나게, 분명하게 나타내실 날이 올 것입니다. 얀시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보이는 세상이 진짜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반대의 주장을 한다.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점점 더 진짜 세상이 되어 가고, 믿음은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결정하게 한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는 사람이나 돈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보이는 출세보다 내 안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엔 피스데이 조’인데 ‘자신은 죽었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죽었기에 육체 가운데 사는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함을 자각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희망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기쁨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조금만 불이익이 다가오고 손해가 된다고 믿음과 상관없이 세상적 원리로 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무릇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은혜로 사는 것이라
수도원에 영성이 깊은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수도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예수의 마음을 담기 위해 온갖 수련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 세상 욕망과 정욕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수도사들은 원장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원장은 수도사들에게 깨어진 조그만 항아리를 주면서 물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수도사들은 열심히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채웠습니다. 그렇지만 물을 계속 부어도 깨어진 틈으로 물이 새어나가 항아리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해 하는 수도사들을 보고 원장은 항아리를 가지고 따라 오라고 말하고는 물을 길어온 연못에 그 항아리를 집어 넣으라고 합니다. 수도사들은 깨어진 항아리를 연못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깨어진 틈으로 물이 스며들어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습니다. 물이 빠져 나가던 곳이 물이 스며 들어와 채우는 곳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때 원장이 이르기를 “하나님의 은혜는 수고와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고 금이 가 있는 약한 곳으로 스며들어 올 수 있도록 자신을 은혜의 강에 던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수고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곳을 통해 스며들며 채워지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여기의 ‘폐하지’는 ‘아데테오’로 ‘거절하다, 저버리다’의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을 버리고 율법주의에 굴복하여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상태의 지속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 왜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게 합니까? 은혜는 거저 받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은혜가 거저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 받는 자들이 은혜 받은 것에 대하여 값을 지불한다면 더 이상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치러진 그리스도의 희생은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존심과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오직 기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어리석음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날마다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사 초기에 최봉석(崔鳳奭) 목사는 많은 능력을 행하였다고 최권능 목사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는 온전한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습니다. 술집에 가서도 외치고, 남의 집에 가서도 외치고 일본 순사에게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사를 받으면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일본형사들이 그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예수”라는 말이 터져 나옵니다. 이렇게 매를 쳐도 “예수”, 저렇게 쳐도 “예수”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예수”만을 외쳤습니다. 참다못한 형사가 “왜 입만 열면 예수만 외치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최목사는 “내 몸 속에 예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무리 때려도 예수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최목사는 가혹한 고문으로 병이 들어 병원에 실려 가는 중에도 “예수천당!”을 외쳤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습니까? 마음에 분노합니까?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가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안에 예수가 사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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